소설 보다 : 여름 2025 소설 보다
김지연.이서아.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요, 적들의 이름을 부른다


소설 보다 : 여름 2025, 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06-10.

 


  그래서 적들은 누구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부분이다.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라고 선화가 말할 때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긴 했지만, 대체로 사이비 종교집단이 먼저 연상되어읽는 내내 미간이 수평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게다. 영화 <미드 소마>의 장소가 파스텔톤 속 찡한색감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소설은 건조하며 폐허 속 섬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소설을 읽고 나서도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가 반복되어 머릿속을 흐르고 있었다.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

선화는 말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모든 책에서 구원은 적의 공습 뒤에 찾아왔다. 적들이 온다는 것은 긴긴 괴로움으로 뭉쳐진 기다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기다림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선화는 매일 찾아오는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산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이 고된 기다림을 끝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난 게 대단한 운명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적들을 기다리는 이 무리는 도대체 뭘까. 작품의 주인공이 노아인지라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노아가 이들에게 구원의 존재가 되는가 생각했는데, 노아는 이들 무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명을 사용한다. 어이없게도 그 가명이 무리의 리더 이름과 같다. ‘선화라는 리더 이름을 듣자 선화공주님은~’ 하며 서동요를 떠올리고 선화라는 이름이 담은 뜻은 무언가라는 생각으로 흘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꽂혀버렸다. 노아는 왜 노아이며 선화는 왜 선화인가. 왜 상사의 이름은 녹원인가. 녹원은 인도에 있는 불교 유적인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녹원이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이름 아닌가. ‘이라 할 만한.

  구원을 위해 을 기다리는 것. 마치 내가 잘났음을 타인을 깎아내리며 얻으려는 누군가처럼 여기 천문대를 점령한 사람들은 그렇다. 자신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라고 타인에게 끼치는 민폐를 당연시하는지 의문인데, 그들은 오히려 마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토록 철저한 현실반영이라니! 명확하지 않은, 막무가내로 을 상정해 놓고서 부르는 노래, 그래서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참요같다. 아니, 주술이다. 명백한 세뇌 또는 가스라이팅.

  왜 종교적 믿음은 항상 기이한 형상으로 표출되는지 모르겠다. 집단의 힘이란 그런 건가. 힘이라고 해야할 지 광기라고 해야할 지 모를 그 스산함이 계속 리더 선화 주위에 맴도는 듯하다. 항상 머무르지 않고 떠날 것이라고 하는 그 무리가 드디어 떠날 때인가, 선화는 마지막으로 여는 행사에 노아를 초대한다.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때라면 그냥 넘기고 말았겠지만, 좀더 생생한 때라면 그 버리지 못할 호기심 때문에 나도 노아처럼 가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천문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머릿속에서 봉화대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관측대의 돔이 열리고라는 글을 보자 멈칫하고 만다. 내내 상상하던 이미지와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는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검은 털옷을 입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태우고 다함께 춤을 추는 건 미드소마 같이 사이비 종교에서 주로 보게 되는 행태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기 싫은 것인지 모를 그 무리의 행동은 언제나 낯설지 않다. 그래서 구원되었나. 노아는 그들이 즐겁고 아름답다고 느꼈던가,

  ‘들이 오고나서야 구원이 있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은연 중에 타인을 으로 규정하는 삶이 평안할까.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구원과 적이 모호한 삶을 만든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모호한 적에 대해 생각한다. 모호한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냥 그 모호하고 막연한 두려움 자체가 이고 그렇기에 가시적인 을 만들어내어야 오히려 평안한 마음이 될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참요. 어쩌면 삶에서 나를 위한 참요는 필요할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응원. 그러나 나를 위해 타인에게 부적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 타인을 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들 또한 또다른 형태의 이기도 하다. 함께 살아가기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가시적.

  선화는 독수리인가. 검은 옷을 두른 선화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 떼가 그들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어디로 가려는지 모를 그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찾아가 지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다시금 도돌이표처럼 깃드는 물음.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들은 정처없이 날개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날개짓일 텐데. 그래서, 구원이 뭔데? 구원이 왜 필요했던 건데? 반대로 을 만들기 위해 구원이 필요한 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