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시간


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문예중앙, 2015.


  덥다. 달력은 지금을 봄이라 말하고 날씨는 여름이라 말한다. 소나기가 그리워진다. 쩍쩍 갈라진 논을 보면서 여름 속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어느덧 여름하면 무더위가 더 생각나는 걸 보면 나잇살이 주는 땀의 무게가 너무 힘들었나 보다. 지난 여름은 너무, 너무 지친 여름이었다. 그래도 겨울엔 봄을, 여름을 기다렸으니 또한번 지나갈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은 아직은 덤덤하다.

  그래, 지나갈 여름이다. 어떠한 삶의 경험이든 여름을 견뎌내는 이들의 감정은 격랑이다. 그리고 그 여름을 지나면 격랑의 자욱들이 또렷이 보일 것이다. 여기 조해진의 <여름을 지나가다>는 그 여름 청춘들에게 남은 자욱들을 보여준다. 민과 수의 교차적 시점으로 서술되는 6, 7, 8월의 이야기가 그들이 함께 마주치는 여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산으로부터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민과 수의 이야기다. 민은 감정의, 수는 재산의 파산으로 인해 여름을 넘기기가 힘들어 여름을 넘길 공간을 찾는다. 그들 마음의 위안을 얻을 장소를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그 순간은 여름의 절정이었을까. 여름의 끝이었을까.

  민과 수가 마주친 공간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급매로 내놓은 버려진 가구점. 그래서 현재 아무도 머물고 있지 않은 집. 그곳을 민과 수가 찾는다. 그리고 연주, 종우. 여름을 쳐다보는 그들의 얼굴들이 하나같이 닮았다. 민이 가구점 그 공간에서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모습처럼 말이다. 흐릿한.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 따위 갖지 않는.


  불안정한 터전을 삶의 피난처로 삼으며 하루를 버틸만큼, 그들의 삶엔 어떠한 아픔이 가득한 걸까.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드나드는 민에겐 파혼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종우와의 파혼의 이유가 되는 노동자의 사망이 있다. 거기에서 민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신용불량자인 채로 타인의 신분증으로 살고 있는 수.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연주. 그들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삶의 힘겨움과 아픔이다.

  그들이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니,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도 보이지만 그냥 제 아픔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수동적으로 여름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보이는 그들의 여름.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p50)”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발을 뻗어본다. 타인,인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위로하며 또한 위로 받으며 그렇게 발을 뻗는다. 민이 말하듯 발을 헛딛는 것쯤이야 두려울 게 무엇있으랴. 더는, 발을 뻗는 곳에 디딜 곳이 없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발을 뻗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 여름에 느끼기에, 지금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머문 기차 한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이 발을 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가진 또다른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뻗는 발을 그대로 받아줄 아픔을 서로 나누는 존재. 피난의 공간을 함께 한 그들의 존재. 결국 아픔은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으로부터 치유받는 모양이다. 민이 수를 돌보는 것이 진짜 삶인 듯,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그 더운 여름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던 존재들. 또한 타인에 대한 끝없는 애도. 그 여름은 그런 애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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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 고군분투 사회복지 공무원 성장기 

함창환, 바이북스, 2017-01-15.


  5월이라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들떠있다. 착 가라앉은 것보다 나쁘지 않다 생각하지만, 이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훗날의 이 상태에 대해 또다른 얘깃거리를 안겨 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희망과 기대를 긍정적인 선상에서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 긍정인지 부정이 될 지는 일의 과정과 결과가 알려주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지 너무나 오래인지라 갑작스럽게 터져 나올 일자리에 대한 전망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정부로서야 일단 공공일자리 부분의 증가를 먼저 제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공무원이 많은 사회가 좋다, 나쁘다라는 주장이 예로부터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부가 민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따르니까. Working poor가 되려도 Working할 곳이 없어 Working poor에도 속하지 못하는 poor한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일단 양적인 Working할 곳의 증가 소식은 반길만하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공공일자리 창출과 연이은 공무원 증원 채용계획,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이어지는 현상을 보면서 기분좋음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않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차이가 역시 농간이었음을, 가치의 의지의 문제였음을 실감하는 것은 기쁘지 않은 일이다.

  2016년 5월 28일이 1년 만에 되돌아왔다. 젊은 청년이 떠난 자리에는 꽃이 놓였고 사람들의 울분이 가득했다. 늘 반복되어 온 열악한 노동환경이 빚어낸 19세 비정규직 수리공의 사망은 요즈음 연이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과 맞물려 더욱 비애감을 준다.

  일을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오긴 오는 걸까. 직장인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라 치고 직장인의 애환 역시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직장인이라는 말을 떼고 오로지 업무만을 가지고 행복을 나누기도 애매하긴 하다. 결국 행복하게 일을 하는 것은 개인 차이인가. 하지만 적어도 업무의 특성과 취향을 떠나 고정적이고 안정된 수입이나 처우 등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개인의 업무를 통한 성장과 발전, 그리고 만족감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일요일 저녁에 설문조사를 하면 당연 모두다 직장인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월급날 설문조사를 하면 또한 대다수가 적정의 만족을 표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과 만족감을 가진 이들이 갈수록 덜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업무환경은, 만족감을 가지기에 총체적으로 부실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헤쳐나가는 것이 개인의 마음가짐의 몫으로 되는 것 또한 얼마나 문제인가.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제목이다. <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부러운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저 말이 정말이지 책의 제목으로서의 표현일까, 실제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잡은 마음의 표현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사회복지사는 대한민국에서 여러 가지로 열악한 직업의 대표격이다. 공무원이라는 점이 다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하지만 ‘사회복지’ 분야가 이 사회에서 대접받았다는 이야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업종에 관한 열정페이와 같은 노동업무가 가치와 의무, 도덕으로 가려져 있다. 적절한 노동환경과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하는 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회복지사든 사회복지공무원이든 과도한 업무강도로 인한 과로사나 자살 사건도 발생한다. 물론 사회복지시설 수급자나 대상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사를 행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살아온 저자의 삶은 1991년부터 시작되기에 어쩌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역사적 전개도 함께 볼 수 있다. 전남 신안군, 섬에서 시작한 저자의 사회복지 업무는 저자가 도청으로 옮기는 것만큼이나 확대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업무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당시만 해도 일반행정직에서 사회복지업무를 진행했고 직할시 정도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선발했다. 전담 사회복지공무원 선발은 2000년에야 이루어졌으니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정도를 알 수 있다. 저자도 말하듯이 단지 나이가 어리고 면지역이라는 것을 떠나서 잡다한 업무를 맡았다고 하고 있다.

  저자가 사회복지공무원으로 맡은 업무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변사자 업무다. 당시 섬지역에서는 변사자가 발생하면 시신 수습 업무를 사회복지담당자가 맡았다는 것이다. 시신 수습 업무란 시신 매장까지를 포함한다. 담당자가 직접 땅을 파고 매장하였다는 데서, 그 이전 담당자는 태풍으로 인해 하루 20~30구의 변사자를 처리한 적도 있다는 경험을 얘기하는 데서,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해경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해수욕장에 쌓인 수십톤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대목에선 별거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아무리 마구 버린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도 말이다.

  저자는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업무들을 다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훗날에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하고 있지만, 엄연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저자 자신의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과는 별개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업무 분장이나 상사의 일 떠안기기는 일종의 업무 방해 아닌가. 맡은 일을 잘 해나가는데 장애를 주는. 그러니 상사로 인해 저자가 팔이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저자는 놀라우리만큼 사회복지공무원으로서 담당 업무를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터라 그것이 무너질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저자는 의지로 극복하며, 아직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업무를 잘 수행해나가고 있다 한다. 업무를 하는 동안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또한 사회복지만이 아니라 가정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며.

  많은 고난과 경험을 겪고 지난 시절을 풀어놓은 저자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저자처럼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월요일은 여전히 출근하기 싫다고 느낀다 해도 하는 일에 만족감과 자긍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기를, 그러한 터전이 잘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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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한 망상


망상,어語, 김솔, 문학동네, 2017.


  망상,어(語)를 보고 읽음에도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망상어(魚)로 전환하고 있다. 망상하는 물고기가 있을 리 없음에도 망상되는 망상이란 물고기. 망상어라는 제목에서 뜻보다 소리에 더 재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더구나 이 망상어라 불리는, 아니 생각한 물고기는 글을 읽는 내내 자유자재로 글 속을 뛰놀고 있었다. 망상이란 단어속 그 허황됨을 품고 있음에도 이 글에서 현실이 걷어 올려지는 건 망상이 너무나 잘 뛰노는 탓으로 봐야 하나. 아니, 그보다 작가가 뉴스에서 소재를 건져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접해보기 힘든 사건들이긴 하나 엄연히 존재했던 사건으로서의 뉴스들을.

  여러 이야기가 짧게 끊어 묶어 엮어져 있다. 36편의 이야기는 서사가 있긴 하지만 짧은 글짓기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세상에, 이런 일도라며 진짠가 가짠가 하며 넘길 이야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두룩한 걸 보면 세상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그만큼의 기이한 일도 다반사인 곳이다.

  익숙한듯 익숙하기 힘든 이야기들의 출처는 있었던 일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더해져 뻗어 나가는데 신문기사로 몇단락 남은 이야기들의 이면이 작가가 그려낸 듯한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만큼 이 이야기들의 길이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분량만큼, 딱 그만큼이 좋아 보인다. 더 길면 주절주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뉴스라는 실제와 못믿을 뉴스라는 중간 그 어디쯤의 위치인 이 지점이 딱이다. 마치 아주 재밌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딱, 그정도로. 맑고 밝은 날 들리는 천둥소리같은 기분도 간간히 느껴지는데 더러 재밌는 문장에 피식 웃음도 나고 만화같은 그림이 더해져 이야기의 재미가 좀 더 망상적으로 흘러간다.

  망상, 망상, 망상. 때론 망상은 유머의 끝에 도달하고 때론 경악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망상을 달고 다니는 물고기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보인다. 당연하다. 육지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일찍 숨이 끊어지겠지, 뭐. 내친 김에 하늘로…? 뭐, 누군가 집어 던지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 다시 내려오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이 삶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죽음의 권위를 무력화하고 그것을 대체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게 인생이다. 삶의 의지는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파동 에너지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건너오는 암흑 에너지이다. 에너지의 속도나 방향이 변할 때 사건이 일어난다.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하찮기 때문에 인간에겐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일생이 하찮지 않다면 우주는 그들을 모두 껴안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예정보다 서둘러서 자살하고 말 테니까. p171, 연꽃


  어쩌면 망상어의 세계는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일 수 있겠다. 어떤 일들은 상상속에선 벌어져도 무방하니까. 뉴스일 때의 그 황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달래는데도 약간의 망상은 필요하기도 하다. 희망의 뉴스도 불운의 뉴스도 끔찍한 뉴스도 뉴스에서 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더 잘 느끼려면 말이다. 또한 뉴스에서 알게 된 현실이, 벌어진 사건의 참담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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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 커트, 문학과지성사, 2017.



  자른 머리카락처럼 떨어진 머리통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에 무덤덤해지는 나이. 아니, 감성. 세월은 감정을 더욱 깊게 하지만 웬만해선 감정의 노출에, 표출에는 민감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행한 시대를 거쳐 오며 표정이 굳어진 채인 지도 모르겠다.  웃지 않는 묘기 대행진 마냥 웃을 거리가 없던 시대의 게임. 오래도록 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배회하던 얼굴들인지라 그 얼굴들이 떨어져 나간 것에 무어 그리 놀라겠는가.


 나는 손을 뻗었다. 딸아이가 뭘 또 잘라놓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

다.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렇다고 딸아이로 인해 치밀었던 화가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p221~222, <커트>


  조금은 아플지라도 머리통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일단 굳어진 얼굴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역시나 막혔던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은 곳곳에 멀쩡한 길을 걷다 갑자기 튀어나온 씽크홀을 맞닥뜨리게 한다. 잃어버린 기억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몽롱함 속으로 들이민다. 현실인듯하다 갑자기 환타지가 펼쳐져 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세계. 의식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디로 몸을 이끌지를 가늠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더욱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꿈꾸는 것이라면, 꿈의 실패는 다시 꿈꾸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렇기에 다시 꿈꾸기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환타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속 비현실적인 요소는 실패한 꿈꾸기로 멈춤이 아니라 다시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반복적으로 꿈꾸고 실패하고 다시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그래서 환타지마저도 현실의 느낌이 들게 한다.

  꿈꾸기는 커다란 한덩이를 상상해 내는 것이라 그 한덩이를 이루는 작은 요소들은 꿈꾸는 당시에는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닥친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큰 한덩어리를 구성함을 알 때, 작은 덩어리들에 일일이 대처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에 우리는 잊고, 잘라내고, 먼 곳으로 이동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꿈꾸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진처럼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니,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p135 <꿈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꿈꾸기는 세밀하지 않다. 뒤따를 것에 대한 책임도 상황도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그것 역시도 당면한 현실이 가로막은 것 아니었던가. 좀더 긴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한 꿈꾸기로 표정있는 얼굴을 할 겨를도 없는 현실로 인해 마냥 도피와 같은 꿈을 꾸던 시대로 인해, 질적이지 못한 꿈들. 우리의 꿈꾸기의 바탕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그 꿈의 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조금은 안정된 땅이 다져지는 현실 위에 서 있으니 이제 마냥 잘라내던 조금 길게 보는 꿈들을 그려내도 좋지 않을까. 하나의 머리통이 잘라져 이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잡냄새도 이제 덜 나는 것 같고. 그러니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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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6=2016.5.17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9-30.


  몇 년 전 찰나 언니가 여성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른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했다. 201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은 있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고 나서야 그때, 찰나 언니가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공허하게 외치다가 어느 결엔가 묻혀버렸을 내 조상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한 그들이 원했을, 여전히 한탄스럽지만 제법 나아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후세에게 금세 부정당할 이는 결국 누구인가? p145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여성운동사의 계보를 이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그러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의 변화와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다.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알려 하지 않거나, 무심했던 사건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작업이고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인물, 이태영 변호사. 함께 일한 스승인 유명한 임신 전문 한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부 아들 낳는 처방만 바라는 것을 보고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를 비판하며 호주제 폐지제를 위해 애쓴 고은광순 한의사. 강간과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에 씌어진 모멸적이고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도록 노력했던 이들과 피해자들. 이들의 지난한 희생과 노력으로 변화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법률도 있고 그렇기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또한 있다.

 계보를 살펴보면 느끼듯이 단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한 무수한 피해자가 있었다. 그 피해의 터 위에서, 더 이상 피해를 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간과 세월들이었다.

  

이번 살인 사건에서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지 여성을 일부러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다. 또한 살인범도 사회구조의 희생자였고 정신병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p140 


  위 단락은 작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논평이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똑같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나왔던 말과 너무나 똑같다. 이 말은 1989년에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당시에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사건은 1989년 12월 6일 캐나다 공과대학에서 여학생들만을 강의실로 몰아넣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 한다” 27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여전히 캐나다 시민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도 이 사건 이후의 파장은 거셌다. 총기규제 검토뿐만 아니라 여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규정하기 꺼리던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 바로 위 단락과 같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후 일단, “절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했다. 무엇이 그토록 강남역 사건이 “절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묻지마 범죄”이고 그저 “정신병자의 실수”라는 주장이 단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형태로 규정되어 쾅쾅쾅 도장받듯이, 그러니 끝났다는 듯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특정 단체, 정부, 언론 등을 통해 사건의 본질 규정과 이로 인해 벌어진 분위기에 대한 타당하고 명확한 추론과 분석은 차치하고 그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결론”냈으니 더 이상 그 말은 말라는 듯한 분위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여성혐오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토록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한다는 성마른 논평과 주장들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비단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주목한다. 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여성문제에 관한 한 같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차별에 관해 개혁적이고 차별이 덜하다는 나라들, 그냥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조차도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개별 사안에 대해 먼저 관련 법개정을 이루거나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변화를 이루었다 뿐이다.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싶다가도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라야 그 일을 다르게, 바르게 볼 시선과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은 어찌 이토록 시공간을 초월해 같을까.

  그러한 ‘사건’ 속에 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사건’을 통해 잘못된 점에 대해 온갖 모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계보가 아직 더 있으리라 본다. 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과 전작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아쉬운 점이라면 이야기를 담는 형식에 대한 것이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돋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생각할 때 교정과 편집에도 신경을 쓴다면 좀더 내용을 충실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쭉날쭉한 글자크기, 의미없이 느껴지는 문장정렬 등이 사실 지나치게 급하게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특히 이런 주제의 책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가지고 보는 독자들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올 다음의 책들은 조금 더 짜임새 있는 편집형태로 책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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