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 커트, 문학과지성사, 2017.



  자른 머리카락처럼 떨어진 머리통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에 무덤덤해지는 나이. 아니, 감성. 세월은 감정을 더욱 깊게 하지만 웬만해선 감정의 노출에, 표출에는 민감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행한 시대를 거쳐 오며 표정이 굳어진 채인 지도 모르겠다.  웃지 않는 묘기 대행진 마냥 웃을 거리가 없던 시대의 게임. 오래도록 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배회하던 얼굴들인지라 그 얼굴들이 떨어져 나간 것에 무어 그리 놀라겠는가.


 나는 손을 뻗었다. 딸아이가 뭘 또 잘라놓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

다.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렇다고 딸아이로 인해 치밀었던 화가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p221~222, <커트>


  조금은 아플지라도 머리통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일단 굳어진 얼굴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역시나 막혔던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은 곳곳에 멀쩡한 길을 걷다 갑자기 튀어나온 씽크홀을 맞닥뜨리게 한다. 잃어버린 기억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몽롱함 속으로 들이민다. 현실인듯하다 갑자기 환타지가 펼쳐져 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세계. 의식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디로 몸을 이끌지를 가늠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더욱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꿈꾸는 것이라면, 꿈의 실패는 다시 꿈꾸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렇기에 다시 꿈꾸기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환타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속 비현실적인 요소는 실패한 꿈꾸기로 멈춤이 아니라 다시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반복적으로 꿈꾸고 실패하고 다시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그래서 환타지마저도 현실의 느낌이 들게 한다.

  꿈꾸기는 커다란 한덩이를 상상해 내는 것이라 그 한덩이를 이루는 작은 요소들은 꿈꾸는 당시에는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닥친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큰 한덩어리를 구성함을 알 때, 작은 덩어리들에 일일이 대처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에 우리는 잊고, 잘라내고, 먼 곳으로 이동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꿈꾸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진처럼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니,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p135 <꿈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꿈꾸기는 세밀하지 않다. 뒤따를 것에 대한 책임도 상황도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그것 역시도 당면한 현실이 가로막은 것 아니었던가. 좀더 긴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한 꿈꾸기로 표정있는 얼굴을 할 겨를도 없는 현실로 인해 마냥 도피와 같은 꿈을 꾸던 시대로 인해, 질적이지 못한 꿈들. 우리의 꿈꾸기의 바탕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그 꿈의 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조금은 안정된 땅이 다져지는 현실 위에 서 있으니 이제 마냥 잘라내던 조금 길게 보는 꿈들을 그려내도 좋지 않을까. 하나의 머리통이 잘라져 이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잡냄새도 이제 덜 나는 것 같고. 그러니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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