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기라는 현실


데프 보이스-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황금가지, 2017.


  사실 사회가 행하는 배제는 어제도 오늘도 새로울 것 없다. 외면당하는 일까지 척척 이어진다. 그런데 가끔 이 배제가 주목받는 일이 있다. 이번 특수학교 설립 문제처럼 말이다. 달라진 사회분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거에도 장애인 부모들은 무릎 꿇는 일에 익숙했다.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더러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이슈화’ 되지 않았다. 이번엔 무릎 꿇은 부모들의 모습이 보도되어 반응이 일어났고 교육감과 교육부총리는 특수학교 설립 추진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끝난 것은 아니니 또 지역주민의 반대 여론 등 같은 과정이 반복되긴 할 것이다. 무릎 꿇기에 대해 ‘쇼’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쇼를 하게끔 한 이들이야말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되지 않는가.

  어쨌든 ‘특수학교 설립은 정말로 집값을 떨어뜨리나?’와 같은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여겨진다. 그동안은 ‘주민간 마찰이 벌어졌다’ ‘무산됐다’와 같이 단순보도에 그쳤으니까.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일이다.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더라도 ‘도가니’ 속 사건들이 벌어지면 또다시 학교 폐쇄가 치고 나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고 지켜봐야 한다.  

  『데프 보이스』 속 사건도 특수 시설에서 벌어진다. 장애인을 교육하고 재활하는 시설에서 장애아동을 향한 성폭력은 왜 이토록 당연한 일인 것처럼 벌어지는 것일까. 충분히 예상가능하듯 시설장이 사망했고 그 원인은 아동성폭력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또한번 같은 시설의 장이 사망한다. 이 공통의 사망자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케하면서 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 충분히 예상가능하니까.

 『데프 보이스』는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긴 하지만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쩌면 범인의 추적이 아니라 농인의 세계에 대해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수화를 잠깐 배웠지만 제대로 써보지 못해 모두 까먹어 알파벳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만 수화통역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수화통역사의 역할과 장애, 그리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아라이 나오토이다. 그는 오랫동안 경찰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공익 제보자가 됨으로써 경찰서를 그만두게 되어 구직활동에 나선 사십대 이혼남이다. 구직 상담을 받다가 그가 정한 진로는, 수화통역사다. 그는 코다였다. 코다란 농인 부모의 아이를 말한다. 부모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는 듣고 말할 수 있다. 아라이는 수화통역사 일을 하다가 피의자 농인을 위한 법정 통역 의뢰가 들어오면서 사건 속으로 개입한다.

  사건과 그 해결 과정에서 코다들이 느끼는 상처와 의무 그리고 정체성, 농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특히 농인들이 피의자로써 법정에 섰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윽박지르며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편견에 가득찬 생각들과 관료주의적인 시선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갔던가. 수화의 세계에서 언어에 대응한 수화와 전혀 교육받지 않은 경우의 수화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교육이, 배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법정에 선 농인들을 보면서 체감됐다.

  

몇 년 전부터 공식적인 자리나 문서에서는 ‘들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농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들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 혹은 ‘건청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농아인에서 ‘아=말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를 뺀 것은 자신들은 들리지 않지만 말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건청인’이라고 하지 않고 ‘청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농아인이라고 표현했다. 농아인 또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 게 익숙해 있다가 다시금 장애인을 지칭하는 말의 표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Deaf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만 바라보는데 그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을지언정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다가왔다. 다만, 소설 속에서도 나왔듯이 여기에도 여전히 갈등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각자가 주장하고 목표하는 바가 있지만 농인에는 사고나 병으로 인해 들리지 않게 된 사람은 배제한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힘든 세상에 맞서 싸워가는 방식이긴 하겠지만, 서로 간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아라이는 딱히 신념이 강한 것도 열정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문많고 자신이 코다라는 사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오로지 현실적인, 그러니까 생계로서 수화통역사를 한다. 그가 수화통역사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져 가는 것도 눈에 띈다. 범인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사건을 처리해가는 방식은 달랐다.

  “욕을 하시면 듣고, 모욕을 주면 받겠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장애아 학부모의 목소리를 우리는 잘 듣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는 이가 있는가. 이번에는 학부모들의 무릎이 수화통역사의 역할처럼 다른 주민들의 마음에 전달되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살아가는 일, 이 속에 가득 쌓인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열게 해줄 통역이 더 많았으면 하는, 그러나 무릎 꿇기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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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순례가 아프다


순례자 O Diario de um Mago,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6.


  순례가 시작했다. 흘끗 지나며 보다가 왜 겨울 풍경이 나타나지? 의문이 들었다. 또 흘끗, 종교적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유목민의 이동 이야기인 모양인데 순례라는 제목을 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한참 파업 중인 KBS의 다큐를 틀어놓고 맞닥뜨린 몇 개의 생각 때문에 난 내 머리를 쥐어박아야 했다. 무엇보다 ‘순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슬람교의 메카로 향하는 순례를 먼저 떠올렸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대표적 순례지인 산티아고는 다음으로 생각했다. 순례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한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특정 종교와 장소만을 떠올렸기에 눈내리는 산풍경을 보고 갸우뚱하며 뒤늦게야 내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마냥 종교적 의미로 순례를 생각하지 않기에 언제고 산티아고 순례는 가리라 하면서도 일단은 제한적인 생각에 머물렀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순례를 보았다. 눈내리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유목민의 이동이 아니라 순례 행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도 라다크 지역의 소녀의 순례기는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폭발적으로 이끈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느낌과는 달랐다.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신비와 환상과 몽환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이제 발을 뗀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어간 순례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쓴 원제목이 『동방박사의 일기』인 만큼 좀더 종교적이고 사실 명상 수련의 느낌이 강했다. 또 얼핏 자기계발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었다면 쏘남 왕모의 순례에서는 종교적인 느낌이나 영적 탐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 여행과는 전혀 다른 순례 행렬의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인 소녀 쏘남 왕모의 ‘패트 야트라’를 따라갔다.

  ‘패트 야트라’는 인도 불교의 한 종파인 드루크파의 수행 중 하나이다. 발의 여정이라는 뜻으로 강이 얼어붙는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해발 5,200M 잘룽카포 산을 넘어가는 순례 여행이다. 18일의 여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걷는 이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도할 시간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보다 짧은 여정이지만 화면으로 직접 봐서인지 이제 중학생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 힘들어보였다. 무엇보다 너무 추워보였고 어깨를 멘 짐이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들은, 그러니까 승려들은 그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걸을까.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진리를 깨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중을 구원하는 대승 불교와 개인의 수양에 중심을 두는 소승불교로 나뉜다 배운 기억이 있는데 종교적인 수행의 여정에서 각 개인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고행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여정을 보면서 당연 궁금해 했다. 어쩜 그 궁금증은 내가 저 길을 걷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까, 어떤 생각들에 몰입되어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인지도 몰랐다. 왕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저 따라 걷는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딘지 상관없고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은 왕모에게 ‘패트 야트라’에서 필요한 세가가 인내와 인내와 인내라고 말한다.

  이제 출가한지 한달된 왕모를 승려로 바라보지 않고 ‘소녀’로 보는 나 때문에 이 순례의 여정은 연민의 눈길로 쫓아가게 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서, 종교에 매혹된 소녀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 몰랐다.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다면 왕모가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가정의 첫째 딸이기에 왕모는 출가한다. 영어를 좋아하고 많은 나라를 다녀보고픈 소녀의 꿈은 가난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른 선택을 불허한다. 배우고픈 마음에 도시로 나가 다른 집의 가정부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려 하지만 일만 하느라 친구들이 고등학생인데 여전히 중학과정인 왕모. 5km를 걸어 학교를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가,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데 그 소녀는 이제 없다. 동생들을 돌보며 웃던 소녀는 인생의 고행을 헤쳐 나가는 야무진 승려의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시종일관 아프게 다가왔다. 슬픈 게 아니라 아팠다. 

  배움도 삶도 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 지역이 아니었다면 다른 종교를 선택했을까.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왕모의 어머니가 하는 말, “나처럼 살지 않기를.” 적어도 어머니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인가.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왕모의 모습이다. 승려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가족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축복할 수 없는 왕모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이 얼마나 많이 이뤄지고 있을지, 그들은 행복한지가 궁금했다. 가난하다는 건 늘 선택보다 포기하는 삶을 가르친다. 꿈을 정말 꿈으로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꿈, 상상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꿈.

  한시간의 화면으로 왕모를 보건대 인내와 인내와 인내로 그 삶을 견디어 갈 것을 안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견뎌야 하기에 고행인 순례길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순례라고 왕모가 말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넓은 길을 걷든 좁은 길을 걷든 살아있는 날들은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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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 국제적 관점으로 쉽게 쓴 사회정책입문

존 허드슨·스테판 쿠너·스튜어트 로우, 나눔의집, 20100.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사회복지 관련된 곳에서는 오늘을 기념하며 행사가 이뤄지고 있겠지만 언론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특정한 날이 되면 그에 관한 의미를 짚어보고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는 게 지금까지 이뤄져 온 방식이었다. 가령 장애인의 날엔 그 전후로 장애인에 관한 기사가 들끓고 부부의 날엔 부부관계에 관한 기사가 들끓는 것처럼, 이런 특정한 날을 지정해야 관심받는 그런 영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때라면 복지대책에 관해 집중조명이 될 터인데 여러 이슈로 언론은 바쁘다.

  하긴 전쟁이 어쩌고저쩌고 하루종일 떠들어대는 상황이니까 심각한 상황은 맞다. 그렇게 봐야 하나? 이런 상황을 자주 맞닥뜨려 양치기 소년이 외치는 ‘늑대가 나타났다’처럼 반응하게 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안보’ 외치는 기사는 안보이고 이런 기사들만 눈에 띄나 보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9월 7일자 바른정당 원내대표 주호영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의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말하기 위해 늘 노력해온 결과 평소에도 이 말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오늘은 더욱 더 당당하게 소리 높여 외쳤다.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갖추는 데 약 10조원이면 된다고 합니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구축 가능한 방어체계를 포기하는 것은 대통령의 치명적인 직무유기입니다.”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이란 프레임은 항상 ‘복지’가 달고 살아야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회보장지출은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거의 최하위이고 국내 다른 지출비의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늘 삭감되는 수모를 당한다. 도대체가 ‘무분별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늘 특정 정당은 사회복지예산이 0.1%만 올라도 기겁을 한다. 그래 놓고서는 선거때면 노인들 관련 복지 공약은 하늘 드높은 줄 모르고 올리려고 기를 쓴다.

  10조원이라. 나라를 핑계대고 해먹은 돈이 많아서 10조원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인데 그동안 그렇게 안보를 중시하면서 각종 군사 무기를 위해 그토록 불량품을 쓰려 안달이었을까. 왜 그토록 방산비리를 저질러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않았을까. 툭하면 꺼리를 만들어 복지를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들의 생각에 대해 묻는다. 복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는 일인가. 그래 놓고서 국민은 나라를 위해서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너무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매슬로우는 의식주의 생리적 욕구를 안전의 욕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해주겠다며 마지막 밥알을 빼앗고 굶주리고 헐벗은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치라 말한다. 그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였던 적이 있던가.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 혐오국가로 가는 길이라도 되는 양 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복지국가가 나올 수는 없다. ‘복지’를 늘 없는 이들에게 날리는 적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복지’는 게을러서 굶게 생긴 이들에게 야, 먹고 떨어져라 던지는 제 침묻은 밥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복지’란 단어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고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 타인의 ‘복지’를 빼앗는 일엔 열심이고 더러 그것을 하는데 늘 ‘국민’이란 단어를 핑계한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이 책은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의 사회저책에 대해 설명하고 쟁점을 논하고 있다. 특히 몇몇 나라가 아니라 70여 개 나라의 사례를 비교분석하고 있어 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뿐 아니라 실제 적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책이란 ‘생물’과 같기에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실제 적용에서의 많은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복지정책은 다각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가치와 추구하는 목표는 갖춘 상태로 말이다. 마냥 특정한 나라의 정책만을 쫓다 보면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할 것 없이 선진정책을 배우겠다며 늘 외유성으로 관광하고 돌아와 이런 식으로 정책들을 가져다 그대로 CTRL+C 해서 CTRL+V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보장에 관한 기본 이론서이다. 이야기가 가득하고 재밌게, 가볍게 읽을 수 있다기보다 사회복지전공자들을 위한 기본서로서 더 충실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다루는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에 관한 내용들이 전혀 우리 생활과 유리된 내용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책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보면 한국이 왜 ‘복지국가’가 아닌지를 알 수 있을지도….

  어떤 ‘날’엔 그것을 기념하며 그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부족한 부분을 생각하고 수정해야 할 것을 더 돌아보며 말이다. 사회복지의 날, 늘 그래왔지만 오늘마저도 철저히 무시된 ‘사회복지의 날’에 복지국가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나의 복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씁쓸하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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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계절 The Secret History, 도나 타트, 이윤기 (옮긴이), 문학동네.

  [2015 출간 비밀의 계절]

  온라인을 휩쓴 실시간 검색어를 따라가다 본 사진들 때문에 여전히 멍하다. 수많은 사람이 나와 같을 테니 온라인이 들끓고 있는 것일 테다. 얼마 전 인천초등생여아사건도 있었으니 더욱 더, 극악무도한 ‘청소년’에게 분노하면서 ‘소년법’ 폐지를 청원하는 목소리가 폭발하고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것이 표출되는 시점이 지금인 모양이다. 이제, 변화가 있을까?

  이 집단의 ‘어린’ 학생들이 추구하는 것은 뭘까. 두려움이 있었던지 처벌을 받을 것인지를 아는 선배에게 물어보는 행동에서는 지독한 생각없음과 극악성에 또한번 놀란다. 시뻘건 피가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한 다섯이 본 것은 과연 무얼까. 처음 벌인 일도 아니라고 하는 이 행동에서 그들이 추구한 것은 뭘까. 모자이크된 상황에서도 가해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시뻘건 입술색깔이 눈에 띄었다. 그것과 피해학생에게서 흘러내리는 시뻘건 피는 너무도 대비되어 보였다. 그들 머리속에 차지한 생각들은, 지배한 생각들은 과연 뭔가 생각해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행에 대한 놀라운 기사들이 뜨고 있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인천초등생살인 범인들과 이번 중학생들의 폭행을 보면서 ‘광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비밀의 계절』이 떠올랐는데 사실, 재밌게 읽은 책이라 이 사건과 이 책을 비교하면 책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작가 도나 타트의 데뷔작인데 작가가 2014년 퓰리처상을 받아서인지 2015년에 또 재출간되었다.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는, 그리스 시대 살았을 듯한 특별한 캐릭터의 향연 속에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추리와 심리 묘사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엔 항상 호기심으로 인한 매력이 상승되는 법이니까. 작가는 이런 비밀클럽의 엘리트를 동경의 눈으로 보는 리처드 페이펀을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끈다. 미국 서부에서 의대를 다니던 리처드는 의대를 그만두고 동부의 햄든 대학교로 옮겨와 고전어학과에 입학한다. 특히 지도교수 한명에 다섯 명의 학생들로 이뤄진 이 그룹에서 리처드는 동경과 열등감을 느끼며 주변인인듯 주위를 맴돌게 된다. 어쨌든 문학과 철학을 논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디오뉘소스 제祭, 칼레파 타 칼라(아름다움은 공포다)와 같은 탐미적 책들에 대해 배우고 논하는 것에 리처드는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만족감을 가진다.


그날의 주제는 인간의 자아상실, 플라톤의 네 가지 신성한 광기 및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광기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바로 이러한 광기다. 우리는 종교적 접신 현상이 원시사회에나 잇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버릇이 들어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문명화한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같이 이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참으로 착실한 학생들이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진지하게 토론하고 배움을 실천하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신비스러운 광기, 종교적 접신 현상을 경험하고픈 이들은 실제로 디오뉘소스 제를 실행한다. 광기와 자아상실, 이것에 대한 매혹을 성공한 것에 그들은 만족감을 느꼈을까? 어쩌면…. 우발적인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이 아니라 그들의 제의에 다섯명이 완벽하게 참여하여 함께 그 일이 치러졌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비롭고 초현실적이며 접신 상태에 대한 만족감이 벌어진 사건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자에 의해 소거되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제의로부터 또다른 죽음이 이어진다.

  비밀의 계절은 그리스 시대를 재연하는 듯한 생생한 캐릭터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신비스럽게 만드는데 이것은 리처드가 이들을 우러러 보는 듯한 시선 덕분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다섯 명의 행태들, 그들이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내용들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하는 이성과 광기, 쾌락과 열정, 그리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비교…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생각, 그들만의 것. 그들이 욕망하는 세계는 진정 광기였던가. 광기 앞에서도 이성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

  줄곧 ‘아름다움은 곧 공포’라 했던 그들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든 그것 앞에서 전율한다’고 한 이들은 공포와 전율의 세계를 만끽한다. 사건이 주는 결과는 예측가능하고 타당하게도 이들 모두가 죄책감에 푸욱 빠지는 것이다. 다만 죄책감에 빠진다는 것이 잘못을 반성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벌인 일들을 회피하고픈 마음, 그들에게 돈독했던 우정과 사랑은 어디로 가버렸으며 그들이 추구했던 세계는 파괴되었다. 원시적 순수성이라는 게 무엇인가. 원시가 곧 순수의 세계이고 문명이 악의 세계라는 단순한 구조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 그들 비밀의 세계가 끝이 나는 순간, 거대하고 신비스럽고 천재적으로 보였던 그들 하나하나의 모습은 순식간에 비이성적인 철부지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작가는 나름 이들의 체면을 유지하긴 하지만, 신비가 사라진 그들을 바라보는 리처드처럼 그들은 땅 위로 내려앉는다. 하지만, 리처드의 선택이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 또한 이야기는 달라진다.


흥미 있는 질문 하나 해볼까? 버니에게는 최후의 순간이었을 터인 바로 그 순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버니("야, 장난이 지나치잖아!")를 보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겠느냐는 것이다. 버니에게 당하고 살던 내 친구들을 돕는다는 생각? 아니다. 공포? 아니다. 죄의식도 아니었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모욕, 야유, 피해망상, 몇 달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것은, 버니로부터 받은 수백 가지의 사소한 능멸, 갚아주지 못한 능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서 더도 덜도 아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연민이나 회한의 느낌 없이, 벼랑으로 미끄러지는 버니, 그러다가는 뒤로 넘어지면서 숨을 거두는 버니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의 틀에 빠진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긴 하지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생각없음 역시도 마찬가지. 그들이 벌인 수많은 토론들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다. 한때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길게 회한과 후회로 살아가는 이들. 역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그랬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렇듯이, 균형과 통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무서운 것은 없다.” 아름답다는 건 잘 모르겠고, 확실히 무서운 것은 틀림없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제도의 균형과 통제가 합당하지 못한 정의로 발현될 때면 그에 대해 반발하며 해방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 위주로 인간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성의 균형과 통제를 상실하는 것만은 욕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7 출간 비밀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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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야기


바보들의 결탁, 존 케네디 툴, 2010.


  소설을 읽기 전부터 소설 출간 배경에 대한 놀라운 사연을 소개한다. 그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이끄는 데, 소설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생애와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모르겠지만 고스란히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가 투영된 소설 『바보들의 결탁』은 화해하지 못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모자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장르를 알지 못하도록 널뛰는 이야기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젊은 아들의 자살 후 아들이 남긴 소설을 들고서 몇 년 동안을 출판사를 찾아 헤매었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작가의 어머니, 셀마 툴의 그 행동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아들과의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소설 속 이그네이셔스J.라일리가 실제 작가의 묘사라면 나 역시 소설이든 실제에서든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 불협화음으로 살지 않았을까. 확실히 1960년대에도 지금에도 주인공 라일리는 매력은커녕 호감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초록색 사냥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거구의 몸에 유문 괄약근의 문제로 트림과 가스를 분출하는 외형적 특성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과 언행 모든 것에서 말이다. 괴짜라고 하기에도 천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어머니의 눈에는 ‘쓸데없이 많이 배운 백수‘인 아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생계에 전혀 도움되지 않고, 무엇보다 ’하려 하지 않으며‘, 무슨 일에건 독설을 내뱉고 사회의 행태에 대해 증오가 충만한 라일리는 동네에서도 골칫거리 존재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라일리를 세상속으로 끌어내어 현재의 사회에 맞는 행위들을 하도록 종용하는 어머니와 라일리의 한판 승부는 ‘코미디 쇼’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모든 일의 발단은 라일리가 중세시대에 대한 경외감은 충만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문명을 상당히 타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세 체제의 붕괴와 함께 혼돈과 광기와 악취미의 신들이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라도 할 수 없는’ 라일리의 신념이 사회속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제발! 지금은 그 우울한 얘길 도저히 못 들어드리겠는데요. ‘용의단정, 근면성실, 책임감있고, 과묵한 분.’ 이런, 맙소사! 뭐 이따위 괴물을 원한담? 미안하지만 이따위 세계관을 지닌 회사에선 절대 일할 마음 없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방안에 처박혀 그의 세계관과 신념에 따른 글들, 이를테면 “우리의 세기를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쓰는 일에 몰두한다. 이런 아들의 신념과 노력은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더구나 거구의 아들이 먹기는 또 얼마나 먹는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취업한 라일리가 직장에서 벌이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인 건가, 게으르고 모든 것이 불평불만인 자의 괴짜놀음인 건가.


직장에서의 첫날 근무가 끝난 지금, 나는 정말이지 초주검이 된 상태다. 하지만 낙담해 있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패배감에 젖은 기분으로 비춰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 체제와 정면 대결한 것이다. 이 체제의 맥락 속에서 소위 위장한 관찰자이자 비평가로 활동해보겠다는 각오를 철저히 다지면서 말이다. 리바이 팬츠 같은 회사가 더 많이 존재한다면, 분명 미합중국의 노동력은 각자의 직무에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는 절대 곤란을 겪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니까.


  웃음과 짜증이 수없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흐름. 그러면서도 씁쓸하고 또 한없이 씁쓸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가 라일리의 행동들이 욕한바가지로 치부하고 잊어버려도 될, 정신나간 돌아이로만 바라봐지지 않는다. 때론 라일리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입하며 극도로 라일리의 행동에 분개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라일리에 대한 동정과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라일리 개인의 성향이 어떻든지 간에 그가 몸담고 있던 60년대 뉴올리언스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한창이었고, 거리엔 부랑자가 넘쳐났고 이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경찰들은 매우 재밌는 방법을 총동원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인종차별로 세계는 테러가 끊이지 않고 더불어 난민도 끊이지 않는다. 성차별도 여전하고 노숙자도 증가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더욱 증가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만의 대표적인 ‘문제’가 부각되면서 늘 이어오던 문제는 그대로인 상태.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신념과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아도 맞추려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그 모습은 사실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독히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쓴다는 것. 그런데 이 모습과는 달리 지독히도 맞지 않는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쓰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노력해도 절대로 화해되지 않는 타협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 존 케네디 툴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책을 읽기 전과 다르게 더욱 연민을 일으키게 된다. 라일리에서 작가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라일리의 어머니에게서 작가의 어머니를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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