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기라는 현실
데프 보이스-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황금가지, 2017.
사실 사회가 행하는 배제는 어제도 오늘도 새로울 것 없다. 외면당하는 일까지 척척 이어진다. 그런데 가끔 이 배제가 주목받는 일이 있다. 이번 특수학교 설립 문제처럼 말이다. 달라진 사회분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거에도 장애인 부모들은 무릎 꿇는 일에 익숙했다.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더러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이슈화’ 되지 않았다. 이번엔 무릎 꿇은 부모들의 모습이 보도되어 반응이 일어났고 교육감과 교육부총리는 특수학교 설립 추진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끝난 것은 아니니 또 지역주민의 반대 여론 등 같은 과정이 반복되긴 할 것이다. 무릎 꿇기에 대해 ‘쇼’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쇼를 하게끔 한 이들이야말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되지 않는가.
어쨌든 ‘특수학교 설립은 정말로 집값을 떨어뜨리나?’와 같은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여겨진다. 그동안은 ‘주민간 마찰이 벌어졌다’ ‘무산됐다’와 같이 단순보도에 그쳤으니까.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일이다.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더라도 ‘도가니’ 속 사건들이 벌어지면 또다시 학교 폐쇄가 치고 나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고 지켜봐야 한다.
『데프 보이스』 속 사건도 특수 시설에서 벌어진다. 장애인을 교육하고 재활하는 시설에서 장애아동을 향한 성폭력은 왜 이토록 당연한 일인 것처럼 벌어지는 것일까. 충분히 예상가능하듯 시설장이 사망했고 그 원인은 아동성폭력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또한번 같은 시설의 장이 사망한다. 이 공통의 사망자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케하면서 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 충분히 예상가능하니까.
『데프 보이스』는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긴 하지만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쩌면 범인의 추적이 아니라 농인의 세계에 대해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수화를 잠깐 배웠지만 제대로 써보지 못해 모두 까먹어 알파벳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만 수화통역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수화통역사의 역할과 장애, 그리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아라이 나오토이다. 그는 오랫동안 경찰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공익 제보자가 됨으로써 경찰서를 그만두게 되어 구직활동에 나선 사십대 이혼남이다. 구직 상담을 받다가 그가 정한 진로는, 수화통역사다. 그는 코다였다. 코다란 농인 부모의 아이를 말한다. 부모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는 듣고 말할 수 있다. 아라이는 수화통역사 일을 하다가 피의자 농인을 위한 법정 통역 의뢰가 들어오면서 사건 속으로 개입한다.
사건과 그 해결 과정에서 코다들이 느끼는 상처와 의무 그리고 정체성, 농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특히 농인들이 피의자로써 법정에 섰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윽박지르며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편견에 가득찬 생각들과 관료주의적인 시선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갔던가. 수화의 세계에서 언어에 대응한 수화와 전혀 교육받지 않은 경우의 수화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교육이, 배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법정에 선 농인들을 보면서 체감됐다.
몇 년 전부터 공식적인 자리나 문서에서는 ‘들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농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들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 혹은 ‘건청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농아인에서 ‘아=말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를 뺀 것은 자신들은 들리지 않지만 말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건청인’이라고 하지 않고 ‘청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농아인이라고 표현했다. 농아인 또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 게 익숙해 있다가 다시금 장애인을 지칭하는 말의 표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Deaf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만 바라보는데 그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을지언정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다가왔다. 다만, 소설 속에서도 나왔듯이 여기에도 여전히 갈등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각자가 주장하고 목표하는 바가 있지만 농인에는 사고나 병으로 인해 들리지 않게 된 사람은 배제한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힘든 세상에 맞서 싸워가는 방식이긴 하겠지만, 서로 간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아라이는 딱히 신념이 강한 것도 열정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문많고 자신이 코다라는 사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오로지 현실적인, 그러니까 생계로서 수화통역사를 한다. 그가 수화통역사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져 가는 것도 눈에 띈다. 범인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사건을 처리해가는 방식은 달랐다.
“욕을 하시면 듣고, 모욕을 주면 받겠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장애아 학부모의 목소리를 우리는 잘 듣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는 이가 있는가. 이번에는 학부모들의 무릎이 수화통역사의 역할처럼 다른 주민들의 마음에 전달되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살아가는 일, 이 속에 가득 쌓인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열게 해줄 통역이 더 많았으면 하는, 그러나 무릎 꿇기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