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순례가 아프다


순례자 O Diario de um Mago,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6.


  순례가 시작했다. 흘끗 지나며 보다가 왜 겨울 풍경이 나타나지? 의문이 들었다. 또 흘끗, 종교적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유목민의 이동 이야기인 모양인데 순례라는 제목을 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한참 파업 중인 KBS의 다큐를 틀어놓고 맞닥뜨린 몇 개의 생각 때문에 난 내 머리를 쥐어박아야 했다. 무엇보다 ‘순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슬람교의 메카로 향하는 순례를 먼저 떠올렸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대표적 순례지인 산티아고는 다음으로 생각했다. 순례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한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특정 종교와 장소만을 떠올렸기에 눈내리는 산풍경을 보고 갸우뚱하며 뒤늦게야 내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마냥 종교적 의미로 순례를 생각하지 않기에 언제고 산티아고 순례는 가리라 하면서도 일단은 제한적인 생각에 머물렀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순례를 보았다. 눈내리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유목민의 이동이 아니라 순례 행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도 라다크 지역의 소녀의 순례기는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폭발적으로 이끈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느낌과는 달랐다.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신비와 환상과 몽환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이제 발을 뗀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어간 순례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쓴 원제목이 『동방박사의 일기』인 만큼 좀더 종교적이고 사실 명상 수련의 느낌이 강했다. 또 얼핏 자기계발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었다면 쏘남 왕모의 순례에서는 종교적인 느낌이나 영적 탐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 여행과는 전혀 다른 순례 행렬의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인 소녀 쏘남 왕모의 ‘패트 야트라’를 따라갔다.

  ‘패트 야트라’는 인도 불교의 한 종파인 드루크파의 수행 중 하나이다. 발의 여정이라는 뜻으로 강이 얼어붙는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해발 5,200M 잘룽카포 산을 넘어가는 순례 여행이다. 18일의 여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걷는 이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도할 시간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보다 짧은 여정이지만 화면으로 직접 봐서인지 이제 중학생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 힘들어보였다. 무엇보다 너무 추워보였고 어깨를 멘 짐이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들은, 그러니까 승려들은 그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걸을까.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진리를 깨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중을 구원하는 대승 불교와 개인의 수양에 중심을 두는 소승불교로 나뉜다 배운 기억이 있는데 종교적인 수행의 여정에서 각 개인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고행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여정을 보면서 당연 궁금해 했다. 어쩜 그 궁금증은 내가 저 길을 걷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까, 어떤 생각들에 몰입되어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인지도 몰랐다. 왕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저 따라 걷는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딘지 상관없고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은 왕모에게 ‘패트 야트라’에서 필요한 세가가 인내와 인내와 인내라고 말한다.

  이제 출가한지 한달된 왕모를 승려로 바라보지 않고 ‘소녀’로 보는 나 때문에 이 순례의 여정은 연민의 눈길로 쫓아가게 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서, 종교에 매혹된 소녀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 몰랐다.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다면 왕모가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가정의 첫째 딸이기에 왕모는 출가한다. 영어를 좋아하고 많은 나라를 다녀보고픈 소녀의 꿈은 가난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른 선택을 불허한다. 배우고픈 마음에 도시로 나가 다른 집의 가정부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려 하지만 일만 하느라 친구들이 고등학생인데 여전히 중학과정인 왕모. 5km를 걸어 학교를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가,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데 그 소녀는 이제 없다. 동생들을 돌보며 웃던 소녀는 인생의 고행을 헤쳐 나가는 야무진 승려의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시종일관 아프게 다가왔다. 슬픈 게 아니라 아팠다. 

  배움도 삶도 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 지역이 아니었다면 다른 종교를 선택했을까.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왕모의 어머니가 하는 말, “나처럼 살지 않기를.” 적어도 어머니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인가.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왕모의 모습이다. 승려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가족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축복할 수 없는 왕모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이 얼마나 많이 이뤄지고 있을지, 그들은 행복한지가 궁금했다. 가난하다는 건 늘 선택보다 포기하는 삶을 가르친다. 꿈을 정말 꿈으로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꿈, 상상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꿈.

  한시간의 화면으로 왕모를 보건대 인내와 인내와 인내로 그 삶을 견디어 갈 것을 안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견뎌야 하기에 고행인 순례길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순례라고 왕모가 말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넓은 길을 걷든 좁은 길을 걷든 살아있는 날들은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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