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야기


바보들의 결탁, 존 케네디 툴, 2010.


  소설을 읽기 전부터 소설 출간 배경에 대한 놀라운 사연을 소개한다. 그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이끄는 데, 소설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생애와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모르겠지만 고스란히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가 투영된 소설 『바보들의 결탁』은 화해하지 못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모자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장르를 알지 못하도록 널뛰는 이야기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젊은 아들의 자살 후 아들이 남긴 소설을 들고서 몇 년 동안을 출판사를 찾아 헤매었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작가의 어머니, 셀마 툴의 그 행동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아들과의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소설 속 이그네이셔스J.라일리가 실제 작가의 묘사라면 나 역시 소설이든 실제에서든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 불협화음으로 살지 않았을까. 확실히 1960년대에도 지금에도 주인공 라일리는 매력은커녕 호감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초록색 사냥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거구의 몸에 유문 괄약근의 문제로 트림과 가스를 분출하는 외형적 특성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과 언행 모든 것에서 말이다. 괴짜라고 하기에도 천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어머니의 눈에는 ‘쓸데없이 많이 배운 백수‘인 아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생계에 전혀 도움되지 않고, 무엇보다 ’하려 하지 않으며‘, 무슨 일에건 독설을 내뱉고 사회의 행태에 대해 증오가 충만한 라일리는 동네에서도 골칫거리 존재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라일리를 세상속으로 끌어내어 현재의 사회에 맞는 행위들을 하도록 종용하는 어머니와 라일리의 한판 승부는 ‘코미디 쇼’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모든 일의 발단은 라일리가 중세시대에 대한 경외감은 충만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문명을 상당히 타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세 체제의 붕괴와 함께 혼돈과 광기와 악취미의 신들이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라도 할 수 없는’ 라일리의 신념이 사회속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제발! 지금은 그 우울한 얘길 도저히 못 들어드리겠는데요. ‘용의단정, 근면성실, 책임감있고, 과묵한 분.’ 이런, 맙소사! 뭐 이따위 괴물을 원한담? 미안하지만 이따위 세계관을 지닌 회사에선 절대 일할 마음 없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방안에 처박혀 그의 세계관과 신념에 따른 글들, 이를테면 “우리의 세기를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쓰는 일에 몰두한다. 이런 아들의 신념과 노력은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더구나 거구의 아들이 먹기는 또 얼마나 먹는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취업한 라일리가 직장에서 벌이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인 건가, 게으르고 모든 것이 불평불만인 자의 괴짜놀음인 건가.


직장에서의 첫날 근무가 끝난 지금, 나는 정말이지 초주검이 된 상태다. 하지만 낙담해 있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패배감에 젖은 기분으로 비춰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 체제와 정면 대결한 것이다. 이 체제의 맥락 속에서 소위 위장한 관찰자이자 비평가로 활동해보겠다는 각오를 철저히 다지면서 말이다. 리바이 팬츠 같은 회사가 더 많이 존재한다면, 분명 미합중국의 노동력은 각자의 직무에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는 절대 곤란을 겪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니까.


  웃음과 짜증이 수없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흐름. 그러면서도 씁쓸하고 또 한없이 씁쓸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가 라일리의 행동들이 욕한바가지로 치부하고 잊어버려도 될, 정신나간 돌아이로만 바라봐지지 않는다. 때론 라일리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입하며 극도로 라일리의 행동에 분개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라일리에 대한 동정과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라일리 개인의 성향이 어떻든지 간에 그가 몸담고 있던 60년대 뉴올리언스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한창이었고, 거리엔 부랑자가 넘쳐났고 이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경찰들은 매우 재밌는 방법을 총동원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인종차별로 세계는 테러가 끊이지 않고 더불어 난민도 끊이지 않는다. 성차별도 여전하고 노숙자도 증가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더욱 증가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만의 대표적인 ‘문제’가 부각되면서 늘 이어오던 문제는 그대로인 상태.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신념과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아도 맞추려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그 모습은 사실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독히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쓴다는 것. 그런데 이 모습과는 달리 지독히도 맞지 않는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쓰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노력해도 절대로 화해되지 않는 타협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 존 케네디 툴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책을 읽기 전과 다르게 더욱 연민을 일으키게 된다. 라일리에서 작가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라일리의 어머니에게서 작가의 어머니를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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