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의 안도


멸종 직전의 우리, 김나정, 작가정신, 2014.


  지금 멸종직전에 서 있다. 다행인가, 아직 멸종은 아니다. 멸종으로 들어서는 길인가, 멸종에서 비켜갈 것인가.

  멸종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한데 이 소설 역시 시종일관 그 분위기를 끌고 간다. 봉인했던 기억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이에게 주도잡힌 일상은 잠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 그것은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이어진다.

  소설의 얼기는 간단하다. 내 소중한 아이를 죽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복수다. 그 복수가 20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다 마침내 20년이 지난 어느날 폭발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작가는 이 줄거리를 가해자와 피해자, 둘러싼 등장인물의 여러 시점으로 돌아가며 전개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시간을 역행하고 시점을 달리하면서 그저 신문 단신으로 처리될 내용이 아니라 보다 풍부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시종일관 답답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내 아이가 죽은 순간이 복수의 시작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엄마의 과도한 집착이 죽음의 그림자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엄마의 복수가 20년이 지난 시간에야 절정을 이루는 것은 똑같이 아이를 잃게 하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죽인 아이, 김선주는 사는 내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겨우 아들 미혼모로서 안도에게 의지한 채 윤수인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이어가는 그녀는 마침내 아들까지 유괴당한다. 아들의 유괴자가 자신이 죽인 친구 이나림의 엄마, 권희자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죄를 지었기에 분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어린 시절의 기억 역시도 끔찍하다. 그래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에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던 어린 그녀의 삶은 지금 자신의 아들의 안전 때문에 멸종 직전에 처해 있다. 죽은 아이, 이나림을 살려내라는 저 엄마의 말은 실행될 수 없기에 그렇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도끼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앞을 가로막는 겹겹의 나무에 도끼질을 했다. 몸은 몸부림쳤다. 진저리치는 나무 꼭대기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튕겨 오른 가지는 달을 겨눴다. 도끼날을 받아먹은 나무는 흉터가 나되 쓰러지진 않았다. 숲이 사라질 때는 까마득했다. 여자는 치마를 벗어 말았다. 치맛자락에 횃불에 댔다. 바람은 불을 싣고 숲을 살라갔다. 타들어가는 숲에서 순록과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불곰과 흑곰, 스라소니가 튀어나왔다. 덫들이 틉틉, 아가리를 다물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발버둥친들 발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은 웅성거렸다. 불꽃은 나무를 감싸 하늘로 끌어당겼다. 잎사귀들은 수런수런 몸을 뒤집었다. 줄기 속 수액이 뜨거워지고, 껍질이 툭툭 터졌다. 이글거리는 나무 사이로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은 숲 바깥쪽으로 밀려나가고, 숲과 하늘의 경계가 울렁거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 붉은 그림자가 서 있다. p7~8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다. 나림의 엄마가 나림을 위한 복수를 하며 광기의 도끼질을 하고 불을 지른대도 아이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이는 엄마의 그 광기에 질려 이미 죽음을 꿈꾸었기에.

  그 옛날 이뤄진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면 허무함과 동시에 나림이의 영악함과 소심한 수인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뒤범벅된다. 표면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히 나림이와 수인이지만, 수인이 또한 나림이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향해 칼을 들이댄 것은 분명 수인이지만 그 칼을 잡아 제 몸을 찌른 건 나림 자신이니까.

 언제던가, 이런 류의 기사를 본 것도 같다.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칼을 휘두른 초등학생에 대한 기사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한줄로 요약되는 사실과 수많은 페이지를 담은 진실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사실에 귀기울여 삿대질하고 어떤 이들은 진실을 알지만 거기다대고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적어도 나림의 엄마, 권희자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제 엄마의 기대가 아이를 어떻게 짓눌렸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이가 타인을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혔는지, 제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타인을 제물로 삼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안도’가 살 수 있다. 안도가.

  마침 아이의 이름이 ‘안도’인 것에 그나마 기대어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은 ‘안도’가 ‘안도하다’의 안도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안도’ 왕에서 따온 듯한 이야기에서 무너진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안도’. 백마리 코끼리를 부하로 거느린 왕, 사막을 가로질러 세계를 정복한 코끼리의 제왕 안도. 불에 타 황량한 저 숲을, 사막을 정복하는 안도가 될까?

  엄마 권희자의 증오는 복수는 나림을 위한 것일까. 자신을 위한 것일까. 나림의 죽음 이후로 황폐화된 자신의 가정과 자신에 대한 것까지를 모조리 전가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열망을 이뤄주기 바랐던 딸의 죽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압박감에 손가락이 마비된 이나림. 선주는 그저 피아노를 동경해 피아노를 잘치는 아이가 누구인가에 이나림을 외친 죄밖에 없다.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라는 것을 사건의 시작을 보며 느끼게 된다.


그래, 난 김선주를 괴롭힐 때만큼은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운 건 내가 아니라, 김선주다. 미움은 안쪽으로 졸아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뿌려졌다.


  딸이 그러한 것처럼 권희자 역시 타인에게 미움을 전가시키고 있는 거라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복수라고 행하는 일을 멈추겠지. 미움을 안쪽으로 졸아들었던 김선주, 윤수인이 자신의 미움을 바깥쪽을 뿌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인 역시 권희자처럼 제 생의 모든 것을 안도에게서 얻고 있는데, 안도가 죽게 된다면 수인은 다시 복수를 하게 될까. 그리하여 이 복수는 이들 간의 끊임없이 반복되어 움직이게 될까. 끊어낼 수 없는 증오로 이어져 멸종으로 향해 갈까.

  헌데,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리하거나 정해진 싸움같은 거였다. 수인은 처음부터 복수를 키우기보다 자신을 힐책하는 사람이었다. 나림처럼 희자처럼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삭이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인물의 성격에 기대어 어떡하든 이 증오와 복수의 고리를 이어가지 않고 끊어낼 ‘용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수인에게 기대해도 될까. 그러다 문득 마지막 수인이의 이름이 왜 또 ‘수인’인가에 머무른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사람. 어떤 삶을 살게 되더라도 수인에게 씌워진 멍은 지워지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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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탈출기


망원동 브라더스, 김호연 저, 나무옆의자, 2013.


  누군가의 집을 구경한다는 건 그 사람의 내장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내시경으로도 볼 수 없는 몸속 어떤 상태 말이다. ‘방학 옥탑남’에게선 소화불량이 엿보였고, 그에 비해 ‘수유 반지하녀’는 리드미컬한 연동운동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 옥탑방은 어떤가? 아마도 만성변비일 것이다. 빠져야 할 똥차가 너무 많은. p251


  여기, 그런 집이 있다. 똥차가 가득한 집. 이 소설은 그 집으로 안내한다.

  세상에서 백수로 산다는 건 삶에서 뒤쳐진 제일의 선으로 이야기된다. 벌써 삼심 중반, 나이도 먹어가지만 서울 한켠에 무려 8평짜리 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그 삶에서 위로가 되는 일일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수입이 없다 뿐이지 무명의 만화가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는 백수니까.

  내 공간을 가지고 이 공간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도 소통하고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히키코모리가 되어 우울과 절망에 풍덩하거나 타인을 해치는데 열을 올리는 인간이 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백수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라도.

  이런 옥탑방 속으로 어느날 갑자기 타인들이 침투한다. 백수가 가진 유일한 공간에 타인이 들이닥치는 이들은 한여름의 모기만큼이나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낯모르는 이들이 아닌 이상 거절하지 못하는 이 백수같은 오영준 작가의 성격 덕분에 점점 옥탑방은 10대에서 60대의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함께 직장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기러기 아빠가 된 40대 김부장, 만화계에 입문하게 해준 50대의 황혼이혼남이 된 싸부, 그리고 후배인 만년 고시생 20대 삼척동자가 푸닥거리며 사는데 이들을 보며 집주인이자 오지랖이신 60대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이자 자퇴생인 10대도 이 옥탑방을 들락거린다. 이들은 각자의 고민들을 지니고 옥탑방을 피난처로, 도약의 장소로 여긴다. 각 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대변하는 듯한 이들은 문제만을 안고 고뇌하며 마냥 우울에 빠져 있지 않다. 물론 사람이 원체 많다 보니 그럴 틈도 없긴 하다.

  이들의 몇 달간의 동거기를 작가는 찌질하지만 우울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애틋하게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그 기간 동안 서로 M.T에 온 듯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하며 끈적한 우애를 다진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가미되었겠지만 충분한 체험이 바탕이 된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각자가 옥탑방으로 들어온 사연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면 옥탑방과의 이별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시종일관 유머가득한 잠시의 동거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안겨준다. 소설에서나마 모든 이들이 가진 문제가 해결되는 해피엔딩을 맞아서 기쁘다만, 이렇게 모든 이들의 문제들이 특히나 각 세대별로 대표되는 그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밖으로 나오자 동해 바다에서 나고 자란 듯한 탐스러운 불덩이가 어두침침한 새벽하늘로 떠오른다. 세상이 밝아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명의 남자는 나란히 해변에 서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연고도 나이도 다른 네 명의 남자가 서울 한구석 옥탑방에서 만나 여기까지 동행해와 해를 바라본다. 옥탑방에서 보던 그 해와 별다를 바도 없다. 근데 뭉클하다. 지난 몇 개월,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한 이 빈대 기생충 바퀴벌레들…… 같지만, 사실은 ‘입구멍’이라는 식구. 그동안 이들을 미워하고 꽁했던 내 소갈머리는 뜨거운 태양에 소독되고 시원한 파도에 세탁되고 있다. p266


  여기서 30대의 백수 아닌 백수의 존재는 참으로 크다. 이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을 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더라도 그저, 외면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고민을 들어주는 존재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존재를 만났다는 것은 이 옥탑방에 들어온 다른 이들의 행운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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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여자들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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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제국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이 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이다. 더불어 내가 그 책을 읽고 있는 시대도 책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은 시점은 내게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모두 안겨주었다.

  부정의 요소라면 읽는 동안 너무나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상시키는, 아니 그쪽으로 생각이 몰려가는 바람에 ‘이 정도야 뭐’라고 한다거나 ‘아니, 어떻게 알았니?’라거나 ‘이거 한국 얘기야?’라고 이 여러 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을 국내 막장 드라마 이야기를 바라보듯 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긍정의 요소라면 상상력이 지나치시네라고 할 것을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더욱 더 타이밍이 좋았던 점은, 소설 속의 ‘마약’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 한창 언론에선 향정신성의약품, 프로포폴의 이야기를 거론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핵심은 그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목마른 여자들의 표면적 이야기는 여성제국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1970년 페미니즘 혁명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여성 제국이 탄생한다. 모든 여성들이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이 가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혁명제국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와의 통로가 차단되어 누구나 쉽게 드나들지 못하고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다. 이 곳에 두 명의 여성과 네 명의 남성이 방문 허가를 얻어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은 기자와 열렬 페미니스트로 구성된 지식인들이다.

  제국은 ‘목자’라 불리는 유디크가 그의 어머니에 이어서 지배하고 있다. 이들 ‘원정대’는 제국의 안내인이 이끄는 대로 구경을 한다. 목자의 얼굴 모양을 따라 형성된 도로, 여성작가들의 책만이 가득한 도서관, 생식세포를 선별하고 연구하는 곳 등등을 둘러보며 나름 의문을 가지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며 이곳에 반한 페미니스트 한 명은 제국에 살기로 결정을 할만큼 이들은 이 여행을 만족스러워하고 그들이 다녀온 제국에 대한 기사를 써서 많은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이들처럼 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이가 또 있다. 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아스트리트. 그녀는 실제 겪고 있는 생활을 담담히 기록한다. 그녀의 일기 속의 기록들은 이 혁명제국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녀는 일반 신민에서 목자와 함께 생활하는 ‘자격’을 얻음으로써 목자의 생활과 혁명제국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목격자인 것이다. 그녀 자신의 아들을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할 만큼 이곳에서 남자들은 생존이 보장받지 못한다. 임신단계에서 아예 태어나지 못하거나 태어난 후엔 공동육아소로 보내져야 하고 성인 남성들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 곳.

  목자의 이름이 ‘유디트’인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유디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떠올랐다. 성서에 나오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여인. 팜므파탈로 또는 애국심을 보여준 여인으로 그려지나 전자의 이미지가 더 강한 여인. 남성이 보이지 않고 생존을 위협받는 나라를 건설한 혁명전사라면, 클림트의 그림 속 유디트의 이미지가 딱 어울리지 않은가. 언제든 남성의 목을 베고 그 목을 높이 치켜들 수 있는 여인.

  여자들을 위한 나라는 그저 ‘남자’들만 없으면 되고 남자들의 지배만 없으면 되는 곳으로 묘사된다. 이 혁명제국에 대해 알리는 아스트리트의 기록이나 원정대의 여행담이나 마냥 심각하지 않고 조금은 유쾌하게 그려진다. 재밌게.

  분명 이 책의 표면은 남성사회를 전복시킨 여성사회를 그리는 페미니즘의 나라를 그리는 듯했다. 그러나 점점 그 부분은 지워져간다. 단지, 통치자가 독재자가 여성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이라고 읽지 말기를! 오히려 이 책은 페미니즘을 가장한, 그리하여 자칫하면 페미니즘을 더 혐오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독재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전체주의를 그린 몇몇 소설이 생각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 전체주의는, 독재자의 모습은 통치자의 성별에 상관없이 이토록 같은 모습인 건가! 그것을 구성하는 이들도, 내세우는 정책도 도무지 독창적이지 않다. 파멸에 이르는 길까지도.

  독재자들이 만드는 세상의 방식이 같다면 무력하게 통치당하는 이들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세뇌당하고 서로 견제하며 두려워하거나 칭송하거나. 그래서 눈에 띄게 좋아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 나라에 남겠다고 결정하는 페미니스트의 결정에 실소가 나왔고 이곳을 환상적인 곳으로 포장하는 원정대들의 글에선 왜 이 원정대들이 기자와 언론인으로 구성이 되었던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잘 아는 그렇고 그런 언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눈막고 귀막고, 왜곡의 달인이 된 언론. 그래도 이들을 향해 비판하는 자가 있긴 하다. 이들을 향해, 이들의 부족한 통찰력과 엉터리 기록을 비판하는 말, 스탕달의 말을 빌려 이들 언론인들에 가하는 일침은, “경계를 잊지 마라.”

  작가가 익살스러움을 가미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냥 전체주의의 민낯은 코미디다. 독재는 공포와 더불어 늘 이런 실소를 유발하게끔 하는 요소들이, 기가막힌 요소들이 늘 가득차 있다. 당장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목격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결말이다. 좀 허무하고 치밀함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외부적 요인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경쾌한 묘사와 서사가 부실하게 그려져 있다. 내가 놓쳤나 생각했지만. 혁명제국을 또다시 혁명하는 세력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통쾌함이 덜하다는 이야기다. 뚜렷하지 않게 흘리듯이 그려져 있다. 하긴, 새로운 혁명세력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은 어리석을 지도 모른다. 이 독재정권에, 전체주의 국가에 대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요구하는 모든 이들 말고 또 누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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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도덕성


  

  확실히 사람들은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최근 출간된 책들 중에서 1쇄를 넘은 책을 별로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은 5쇄를 넘었다. 게다가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니, 많은 인기를 끌고 있구나란 생각을 거듭한다. 읽다 보니 왜 열광하는지도 알겠다. 추리소설은 흥미가 당기기 마련이니까. 또한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패턴이 잘 드러나 있다. 적절한 반전과 가독성, 흥미있는 캐릭터의 탄생.

   다른 것보다 이 책에서 흥미가 있는 것은 제목이다. 세상에, ‘죽여 마땅한 사람’이라니. 원제 역시 'worth killing'이다. 왜 'deserve to die'가 아닌가. ‘죽어 마땅한’과 ‘죽여 마땅한’의 차이는 흥미를 흥분을 더욱 높인다. 좀더 집중하게 만든다. 죽이는 자에 대해 더 집중하게 하니까.


내가 살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죠? 사람들 생각처럼 살인이 비도덕적인 일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정말 그렇다고 믿어요. 사람들은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누군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미란다처럼 자신을 향한 상대의 사랑을 남용한다면 그 사람은 죽여 마땅해요. 너무 극단적인 처벌처럼 들리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충만해요. 설사 짧게 끝날 지라도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이라고요. p84~85


  누군가를 ‘죽여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잴 필요 없이 싸이코 패스를 떠올리게 된다. 이유를 대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이유없이 살인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처음 이 제목을 봤을 땐 ‘사회정의’와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 형태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개인적인 이야기였음을 알고 더디게 책장을 넘겼다. 익숙한 패턴의 추리소설 하나를 더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인 릴리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아마도 첫 번째 반전에서부터 이야기를 제대로 읽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공항에서 만난 낯선 여인에게 자신의 결혼생활을 술술 털어놓고 그녀로부터 살인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으며 자신이 살인에 대한 고민을 하던 남자, 테드. 과연 그가 릴리의 도움을 받아 불륜의 아내와 내연남을 ‘처리’할 것인가, 결심에 이르는 과정 중에 테드가 죽는다. 테드가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나 했던 생각은 이내 릴리와 테드의 아내 미란다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그리고 그녀들의 과거가 펼쳐진다. 그들의 인연들이.

  이 이야기는 릴리, 테드, 미란다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다 마침내 수면 위로 ‘살인 사건’이 드러나 형사가 개입하는 순간부터 ‘킴볼’의 시점이 더해져 진행된다. 그리고 릴리는 타인에게 살인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 만큼 살인 경력이 있었다. 당연 릴리는 그 이야기도 풀어 놓는다. 당위성을 가지고. 그들 역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들이 ‘릴리’에게 개인적으로 가한 나쁜 짓이지만 릴리는 그런 이들은 타인에게도 잘못된 일을 할 암적인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살인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타인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어제 아빠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말. 어쩌면 나도 그걸 내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쳇을 죽인 후에도, 런던에서 에릭을 죽인 후에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내가 한 짓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미란다와 에릭은 둘 다 내게 상처를 줬다. 쳇은 그러려고 했고, 브래드는 직접 상처를 주진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아마도 테드 스버슨을 내 인생에 들여놓은 게 실수였을 것이다. 난 지난 몇 주간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고, 다행히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젠 끝났다. 완전히. 앞으로는 조용히 살면서 다시는 누구도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계속 생존할 것이다. 초원에서의 그날 밤,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간직한 채. 그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고, 남과 다른 도덕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깨달음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 소나 여우, 올빼미의 도덕성을. p406~407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진행될까. 릴리가 행한 살인의 이력을 보는 일일까, 릴리가 최종적으로 법의 심판을 받는 일이 될까. 자칫 살인자 릴리에 빠져 릴리를 응원할 수도 있다. 잡히지 말지어다, 릴리! 릴리의 이런 사고의 바탕엔 환경적인 요인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파티를 벌이는 집, 엄마와 아빠는 상관없이 서로의 애인을 가지고 있는 집. 그 속에서 불안정하게 지내야 했던 릴리의 어린 시절이 있었노라고. 자신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던 아이가 있었노라고.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살인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잠깐의 증오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이내 자신의 생각에 놀라 당황하고 자책하며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절절히 반성하는 패턴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계속적으로 자신이 미워하는 이가 당연히 죽어야 되는 거라고 살인을 부추긴다면,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내 손이 아닌 타인이 그 일을 해준다기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은 살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개인적인 원한으로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마침내는 확장하여 타당성을 부여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릴리의 행동은 “심판”인가.


그녀는 뼛속까지 썩어빠진 인간이었다.

어쩌면 나는 희생양을 다시 찾아 신나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에게 살인은 오랫동안 긁지 않아 가려운 부위였다. p218


  릴리에게도 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죽인 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릴리도 가진다. 가슴이 아프기까지 하다. 죄책감과 후회는 아니다. 그저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외로움.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여러모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현이었다. p376


  릴리는 살아남았다. 현재는. 릴리는 살인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시체를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애초에 살인이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그녀는 자신이 살던 집 외곽의 우물 속에 두 명의 죽여 마땅한 이를 숨겨놓았다. 그리고 그 집은 타인에게 팔려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될 것이다. 릴리는 계속 살아남을까. 그리고 계속 외로워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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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정산


  

  이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조용조용한 이 기록들은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기에 생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지극히 이 현실적인 기록들이 몽환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상실이란 이름이 뒤덮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작가는 이별을 겪는다.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장례절차를 밟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장례에서 사십구재를 지나 탈상까지의 실제 치러야 할 일들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 소설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큰 사건없이 이뤄지는 전개이다. 아니, 인생에서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사건이기에 이 커다란 사건을 겪은 후의 ‘나’의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나’는 죽은 이를 애도할 시간없이, 내 슬픔을 토로할 시간없이 장례절차를 밟으며 사사로운 것들을 따지고 선택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를 받는 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일, 사망신고서를 제출하는 일, 핸드폰도 해지하고 은행과 보험사에 연락해 계좌를 해지하는 일도 해야 하는 절차를 밝아야 한다. 그 사람이 완전히 사회 속에서 활동했던 모든 것들을 지우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은 자의 몫이자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전의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이 그대로 흘러가야 할 일들엔 신부전증 아버지를 챙기는 일도 포함된다. 아버지와 잦은 말싸움은 기본이고 병원 동행에서 집안일을 혼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버지의 식이요법을 챙기는 일까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를 두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들은 손놓은 채 있던, 엄마에 대한 애도도 없이 멀쩡한 듯 보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가득한 채. “사랑 주던 엄마는 이제 없고, 효도 받으려는 아버지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43년 인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생활엔 어떤 서사가 있기에 그런 것인지. 명령과 복종에 익숙했던 군인 아버지를 엄마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가장이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퇴직 후 엄마의 생활을 간섭하고 힘들게 했다. 엄마의 심장이 고장난 건 아빠의 퇴직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엔 언니의 결혼과 이민과 동생의 박사 진학 등이 있었다. 또한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나’까지 엄마의 생활에 변화와 불안이 한꺼번에 닥친 시기에 엄마는 몸의 문제가 급격히 생긴 것이다. 그런 엄마의 결혼 이전의 모습까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자랐고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는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늘 우리는 누군가가 영영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의 뒷모습을 쫓는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엄마’를 떠올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엄마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에서 ‘인간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맞닥뜨리는 당연한 현실이다. 지금은 나 혼자만 겪는 일인 듯하지만 모드가 겪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 죽음으로 승화된 죽음으로 상실을 소거해 나간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나’는 되돌아가는 것이겠지.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물론, 그렇다고 엄마의 죽음이 슬픈 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슬픈 건 슬픈 거니까.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비단 탈상까지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릴 것이다. 한결같이 왼쪽 밑창이 오른쪽 보다 닳아 있는 엄마의 구두를 보며 엄마가 왼쪽 다리에 힘을 싣고 걸었을 걸 생각하는 일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일상의 일들을 진행하고 그냥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뿐인데도 슬픔의 강도가 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통곡과 오열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되살아나는 슬픔과 상실의 표정들이 생생하다. 아무리 ‘누구나’ 겪는 일이라 위안삼으려 해도 내게 닥친 일은 어떡하든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인 것이다. 작가의 엄마의 죽음에 애도 방식은 ‘엄마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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