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정산


  

  이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조용조용한 이 기록들은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기에 생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지극히 이 현실적인 기록들이 몽환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상실이란 이름이 뒤덮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작가는 이별을 겪는다.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장례절차를 밟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장례에서 사십구재를 지나 탈상까지의 실제 치러야 할 일들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 소설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큰 사건없이 이뤄지는 전개이다. 아니, 인생에서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사건이기에 이 커다란 사건을 겪은 후의 ‘나’의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나’는 죽은 이를 애도할 시간없이, 내 슬픔을 토로할 시간없이 장례절차를 밟으며 사사로운 것들을 따지고 선택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를 받는 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일, 사망신고서를 제출하는 일, 핸드폰도 해지하고 은행과 보험사에 연락해 계좌를 해지하는 일도 해야 하는 절차를 밝아야 한다. 그 사람이 완전히 사회 속에서 활동했던 모든 것들을 지우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은 자의 몫이자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전의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이 그대로 흘러가야 할 일들엔 신부전증 아버지를 챙기는 일도 포함된다. 아버지와 잦은 말싸움은 기본이고 병원 동행에서 집안일을 혼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버지의 식이요법을 챙기는 일까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를 두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들은 손놓은 채 있던, 엄마에 대한 애도도 없이 멀쩡한 듯 보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가득한 채. “사랑 주던 엄마는 이제 없고, 효도 받으려는 아버지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43년 인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생활엔 어떤 서사가 있기에 그런 것인지. 명령과 복종에 익숙했던 군인 아버지를 엄마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가장이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퇴직 후 엄마의 생활을 간섭하고 힘들게 했다. 엄마의 심장이 고장난 건 아빠의 퇴직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엔 언니의 결혼과 이민과 동생의 박사 진학 등이 있었다. 또한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나’까지 엄마의 생활에 변화와 불안이 한꺼번에 닥친 시기에 엄마는 몸의 문제가 급격히 생긴 것이다. 그런 엄마의 결혼 이전의 모습까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자랐고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는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늘 우리는 누군가가 영영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의 뒷모습을 쫓는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엄마’를 떠올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엄마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에서 ‘인간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맞닥뜨리는 당연한 현실이다. 지금은 나 혼자만 겪는 일인 듯하지만 모드가 겪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 죽음으로 승화된 죽음으로 상실을 소거해 나간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나’는 되돌아가는 것이겠지.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물론, 그렇다고 엄마의 죽음이 슬픈 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슬픈 건 슬픈 거니까.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비단 탈상까지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릴 것이다. 한결같이 왼쪽 밑창이 오른쪽 보다 닳아 있는 엄마의 구두를 보며 엄마가 왼쪽 다리에 힘을 싣고 걸었을 걸 생각하는 일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일상의 일들을 진행하고 그냥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뿐인데도 슬픔의 강도가 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통곡과 오열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되살아나는 슬픔과 상실의 표정들이 생생하다. 아무리 ‘누구나’ 겪는 일이라 위안삼으려 해도 내게 닥친 일은 어떡하든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인 것이다. 작가의 엄마의 죽음에 애도 방식은 ‘엄마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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