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의 안도


멸종 직전의 우리, 김나정, 작가정신, 2014.


  지금 멸종직전에 서 있다. 다행인가, 아직 멸종은 아니다. 멸종으로 들어서는 길인가, 멸종에서 비켜갈 것인가.

  멸종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한데 이 소설 역시 시종일관 그 분위기를 끌고 간다. 봉인했던 기억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이에게 주도잡힌 일상은 잠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 그것은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이어진다.

  소설의 얼기는 간단하다. 내 소중한 아이를 죽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복수다. 그 복수가 20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다 마침내 20년이 지난 어느날 폭발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작가는 이 줄거리를 가해자와 피해자, 둘러싼 등장인물의 여러 시점으로 돌아가며 전개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시간을 역행하고 시점을 달리하면서 그저 신문 단신으로 처리될 내용이 아니라 보다 풍부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시종일관 답답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내 아이가 죽은 순간이 복수의 시작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엄마의 과도한 집착이 죽음의 그림자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엄마의 복수가 20년이 지난 시간에야 절정을 이루는 것은 똑같이 아이를 잃게 하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죽인 아이, 김선주는 사는 내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겨우 아들 미혼모로서 안도에게 의지한 채 윤수인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이어가는 그녀는 마침내 아들까지 유괴당한다. 아들의 유괴자가 자신이 죽인 친구 이나림의 엄마, 권희자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죄를 지었기에 분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어린 시절의 기억 역시도 끔찍하다. 그래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에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던 어린 그녀의 삶은 지금 자신의 아들의 안전 때문에 멸종 직전에 처해 있다. 죽은 아이, 이나림을 살려내라는 저 엄마의 말은 실행될 수 없기에 그렇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도끼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앞을 가로막는 겹겹의 나무에 도끼질을 했다. 몸은 몸부림쳤다. 진저리치는 나무 꼭대기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튕겨 오른 가지는 달을 겨눴다. 도끼날을 받아먹은 나무는 흉터가 나되 쓰러지진 않았다. 숲이 사라질 때는 까마득했다. 여자는 치마를 벗어 말았다. 치맛자락에 횃불에 댔다. 바람은 불을 싣고 숲을 살라갔다. 타들어가는 숲에서 순록과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불곰과 흑곰, 스라소니가 튀어나왔다. 덫들이 틉틉, 아가리를 다물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발버둥친들 발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은 웅성거렸다. 불꽃은 나무를 감싸 하늘로 끌어당겼다. 잎사귀들은 수런수런 몸을 뒤집었다. 줄기 속 수액이 뜨거워지고, 껍질이 툭툭 터졌다. 이글거리는 나무 사이로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은 숲 바깥쪽으로 밀려나가고, 숲과 하늘의 경계가 울렁거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 붉은 그림자가 서 있다. p7~8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다. 나림의 엄마가 나림을 위한 복수를 하며 광기의 도끼질을 하고 불을 지른대도 아이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이는 엄마의 그 광기에 질려 이미 죽음을 꿈꾸었기에.

  그 옛날 이뤄진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면 허무함과 동시에 나림이의 영악함과 소심한 수인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뒤범벅된다. 표면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히 나림이와 수인이지만, 수인이 또한 나림이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향해 칼을 들이댄 것은 분명 수인이지만 그 칼을 잡아 제 몸을 찌른 건 나림 자신이니까.

 언제던가, 이런 류의 기사를 본 것도 같다.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칼을 휘두른 초등학생에 대한 기사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한줄로 요약되는 사실과 수많은 페이지를 담은 진실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사실에 귀기울여 삿대질하고 어떤 이들은 진실을 알지만 거기다대고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적어도 나림의 엄마, 권희자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제 엄마의 기대가 아이를 어떻게 짓눌렸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이가 타인을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혔는지, 제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타인을 제물로 삼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안도’가 살 수 있다. 안도가.

  마침 아이의 이름이 ‘안도’인 것에 그나마 기대어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은 ‘안도’가 ‘안도하다’의 안도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안도’ 왕에서 따온 듯한 이야기에서 무너진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안도’. 백마리 코끼리를 부하로 거느린 왕, 사막을 가로질러 세계를 정복한 코끼리의 제왕 안도. 불에 타 황량한 저 숲을, 사막을 정복하는 안도가 될까?

  엄마 권희자의 증오는 복수는 나림을 위한 것일까. 자신을 위한 것일까. 나림의 죽음 이후로 황폐화된 자신의 가정과 자신에 대한 것까지를 모조리 전가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열망을 이뤄주기 바랐던 딸의 죽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압박감에 손가락이 마비된 이나림. 선주는 그저 피아노를 동경해 피아노를 잘치는 아이가 누구인가에 이나림을 외친 죄밖에 없다.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라는 것을 사건의 시작을 보며 느끼게 된다.


그래, 난 김선주를 괴롭힐 때만큼은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운 건 내가 아니라, 김선주다. 미움은 안쪽으로 졸아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뿌려졌다.


  딸이 그러한 것처럼 권희자 역시 타인에게 미움을 전가시키고 있는 거라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복수라고 행하는 일을 멈추겠지. 미움을 안쪽으로 졸아들었던 김선주, 윤수인이 자신의 미움을 바깥쪽을 뿌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인 역시 권희자처럼 제 생의 모든 것을 안도에게서 얻고 있는데, 안도가 죽게 된다면 수인은 다시 복수를 하게 될까. 그리하여 이 복수는 이들 간의 끊임없이 반복되어 움직이게 될까. 끊어낼 수 없는 증오로 이어져 멸종으로 향해 갈까.

  헌데,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리하거나 정해진 싸움같은 거였다. 수인은 처음부터 복수를 키우기보다 자신을 힐책하는 사람이었다. 나림처럼 희자처럼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삭이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인물의 성격에 기대어 어떡하든 이 증오와 복수의 고리를 이어가지 않고 끊어낼 ‘용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수인에게 기대해도 될까. 그러다 문득 마지막 수인이의 이름이 왜 또 ‘수인’인가에 머무른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사람. 어떤 삶을 살게 되더라도 수인에게 씌워진 멍은 지워지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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