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반복적으로 이 얼굴을 마주쳤다. 한동안 이 작가의 사진이 인터넷에 자주 노출된 것 같다. 익숙한 얼굴인데 누굴까, 누구더라 하며 글보다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하게 한 찰스 부코스키. 역시나 작가의 인생을 엿보다 작가의 삶에 더 관심이 집중됐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부코스키의 테마 에세이로 묶인 1부작이다.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작가의 이야기와 고양이에 관한 시가 담겨 있다. 작가는 길 잃은 고양이들을 버릴 수 없어 많은 고양이들을 키우지만, 본질적으로 애정이 없다면 고양이들은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양이들은 길잃은 고양이, 다친 고양이, 죽을 뻔한 고양이들이다. 작가는 그 고양이들에게서 자신을 본다.


 자, 여기 아름다운 고양이가 있소. 혀는 쭉 내밀고 눈은 사팔이죠. 꼬리는 바짝 잘렸고. 아름다운 녀석이지. 지능도 있고. 우리는 걔를 수의사에게 데려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소. 차에 치였거든. 의사가 이러더군. “이 고양이는 차에 두 번 치였네요. 총도 맞았고. 꼬리는 잘렸어요.” 나는 말했소. “이 고양이는 나요.” 이 녀석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나타났소.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 둘 다 거리에서 온 건달들이었으니까. p75~76


   독일에서 태어나 세 살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그는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한다. 잡역부, 철도 노종자, 트럭 운전사, 주유소 직원, 경마꾼, 집배원 등등의 일들을 하며 글도 썼지만, 처음 글을 발표한 이후 10년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매일 술을 마셨고 내출혈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며 삶을 전전했다. 25세에 글을 썼고 글이 잡지에 발표되었다면 새로운 감회로 더욱 정진하여 글을 썼을 법한데 10년 동안 침묵했고 술을 마시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어서야 다시 글을 썼다. 그래도 성실한 부분은 있었던지 14년간 우체국을 다녔고 “우체국 의자에 앉아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우체국을 나와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는 찰스 부코스키. 그 때의 나이가 쉰 살이었다.

  이런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평가는 거칠고, 이색적이고, 반항아의 이미지인 모양이다. ‘위대한 아웃사이더‘라고 불린다는데, 글을 읽다 보면 왜 이런 이미지가 있는지 알게 된다. 전세계 독자들이 찰스 부코스키에게 열광하는 것은 생경하고 날 것의 느낌과 버무려진 섬세한 감성의 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투박하고 툭툭이며 내뱉은 말 속에서 담긴 애정과 자조에 연민의 느낌을 받게 되면서.

   고양이와 함께 한 처음의 시작이 어떠하였는지 몰라도 분명 그에겐 고양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몰염치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역겨워하며 그에 반한 모습을 고양이에게 투영시키고 있다. 작가는 오래도록 인간들로 인한 상처를 받을 걸까. 알콜중독자마냥 끊임없이 술을 들이키는 것은 그의 성향인 것인지, 겪어 온 삶에서 살아가기 위해 축적된 방어의 형태였을까.

   뼈가 부러지고 총알을 몇 번이나 맞고 불구이기도 하며 사팔이인 고양이를 향해 그는 자신이라고 외친다. 거리의 삶을 알고 있고 건달처럼 떠돌았던 삶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고양이는 살아남았고 이제 뛰어다닌다. 마치 자신이 의사에게 더 이상 술을 먹으면 죽을지 모른다는 경고 속에서 살아 남아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말대로 그 고양이나 그나 “독하게 미친 녀석”들이다.


 의사는 걔가 다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막 뛰어다녀요. 혀를 내밀고 사팔눈을 뜨고. 독하게 미친 녀석. p76


   거칠다는 느낌의 다른 말이, 치열한 생존의 느낌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또한 거칠어 질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일면들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고양이와의 교감 속에 언뜻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냉소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작가 자신도 외골수 아니던가.


나는 차로를 올라갔다.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똥을 싸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고양이가 되고 싶군.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고 가만 앉아 밥을 기다리고. 엉덩이만 핥으면서 빈둥대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화만 내고 외골수라서. p139


   그는 동물들이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길 잃은 고양이들이 계속 기어들어 와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성향에 맞는 통조림을 사기 위해 다양한 식료품을 사러 다니고, 아름답게 근사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이 고양이들은 “좋아”의 에너지이다. “특히 모든 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 이렇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들 때”면 더욱 더.

  그에게 인간은 초조하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세상에 딱히 호들갑을 떨 일이 없다는 걸 알고 그는 “세계의 힘에 찢기고 있을 때면” 고양이를 바라본다. 그저 보기만 해도 그의 긴장을 가라앉게 해주는 존재가, 고양이이다.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의 글쓰기는 멋스럽게 꾸미는 글이 아니라 탁탁 박히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솔함이 그의 삶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그의 삶과 같이 느껴지는 맹크스 고양이에 관한 글은 그 자신이 왜 고양이에게 진한 애정을 가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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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버릴 것 같은 날의 행복


프랑수아 를로르, 이지연 (그림)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폭염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삶이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까지야 어쩌랴 해도 온갖 감정의 세레나데에서 허우적대다, 마침내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딱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하루 하루가 잘도 흘러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가 아니라 결국엔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 욕심으로 인한 마음의 방랑을 폭염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심란으로 가려주어 오히려 폭염에게 감사해야 할 때인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해 머언 길을 떠난 정신과 의사 꾸빼 씨처럼 나 역시, 지금 이곳을 떠나 되돌아오면 행복을 끌어올 수 있을까.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행복이라,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하다가는 머리가 깨질 겁니다. 행복은 기쁨인가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요. 기쁨,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고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단지 순간의 행복일 뿐이지요. 주의하세요.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쾌락은? 아, 그래요! 모든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것도 분명히 오래 가진 않아요. 그렇다면 행복이란 작은 기쁨들과 작은 쾌락들의 합계가 아닐까요? 내 동료 학자들은 ‘주관적인 행복’이라는 용어에 동의합니다. 물론 당신도 그 개념에 대해선 벌써 알 겁니다! p155


   행복은 상대적이었다가 절대적이 된다. 이 삶에서의 행복이란 자꾸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생각이 흘러간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원인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꾸빼 씨가 행복여행을 통해 배운 행복에 대한 의미들은 결국 마음가짐,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전한다. 잘 알고 있는 말들이 어느 순간을 대하면 모두 잊혀진다는 것이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무색케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멀리의 것, 타인의 것을 찾고 비교하느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 행복이라고 거듭 이야기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 역시 거듭된다. 반복적으로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의지와 기억력 부족만을 탓할 순 없다. 꾸빼 씨의 배움에도 나와 있듯이 바로 이러하니까!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이 행복에 대한 의미로 인해 의기소침해졌다면 꾸빼 씨가 찾아온 다른 배움의 의미를 또 끌어당겨 와 억지로라도 행복할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행복의 의미를 발견했으니 위의 말로 그 의미를 지워버려야지. 거센 폭우로 이 폭염을 지워버렸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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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이코패스인가?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프로이트˝ p380

 

   

  그러고 보니 작가 정유정의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청소년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 여행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까지. 그 사이에 ‘심장’이 있었고 ‘7년’이 있었고 ‘28’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나 역시 매니아처럼 작가의 책을 읽어 온 것 같다.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유정 작가가 책을 낸다면 굳이 안 읽는다고 발악할 독자는 아니어서 빗발치는 <종의 기원>의 여론에 힘입어 책을 읽었다. 열렬한 독자층을 거느리고 장르문학의 대가로 우뚝 선 작가답게 이번 신작에 기대하는 이들 역시 많았던 모양이다. 출간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출간 후에도 ‘역시 정유정’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종의 기원>.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인지 <종의 기원>은 심심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좀처럼 “악”의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내 속의 악이 더 악랄한 걸까. 줄거리가 예상 가능하게 흘러 간 것이 흥미가 약한 요인이었다.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이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유진의 행동이, 전개가 예상한대로 흘러가 긴장감이나 몰입감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유진의 행동을 예측하다니, 나 사이코패스인가?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장르가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워낙 넘치고 있기에 웬만한 살인의 이야기엔 극적인 느낌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밥먹으라는 말이 귀찮아 엄마와 이모를 죽인 19세 남학생 사건도 발생한 터라. 살인의 이유와 목적은 익숙한 패턴이고 구성의 쫄깃함이 소설이나 영화를 흥미있게 돋우는 장치가 된 것 같다. 허나, <종의 기원>은 1인칭 시점이 차이가 있다. 어차피 정유정 작가의 소설 속에서 늘 범인을 찾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독자도 주인공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누구와 대립하는지 알고 있으며 명확히 안티를 알기에 주인공이 그 대립에서 이기기를 응원하게 되었을 뿐이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63

 

   그 대립이 약했던 탓일까. 몰입이나 흥미가 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응원할, 감정을 이입할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악을, 내 안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건가. 나는 유진에게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공감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기에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유진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살인의 대상이 자신에게 가까운 엄마와 이모, 그리고 함께 생활해온 친구였다는 이유로 유진을 더욱 ‘악한 본성’의 소유자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악의 어떻게 점화되는가가 작가의 의도라면 “얼마나” 악한 지는 부차적인 요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유진 역시 시작은 자기도 모르는 어느새 살인을 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니까. 그래서 최초의 살인의 기억을 유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좀더 악랄하려면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인물이 되려면 자신이 “살인”의 느낌을 기억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작가의 말대로 하면 작가의 소설에서 가장 ‘악’은 바로 유진이다. 그렇게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애를 쓴다. 그 기억을 모두 잊은 채 마치 기억처럼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진을 조금이라도 옹호라는 측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불만을 가진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206

 

   내 이런 불만을 알기라도 한 듯 작가는 기억을 잃은 채 살인을 한 유진의 행동에 대해 변명까지도 만들어두었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문제가 공감능력의 상실이라고 한다는데 유진은 공감능력이 없었던가? 이렇게 유진의 공감 능력을 따져보는 건 유진이 절대적 악인이라고 생각하려는 이유일까, 그 반대일까. 작가의 의도는 반대인 듯하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 p379

 

   상황에 따른 변화가능성. 본성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발현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 그러나 생존이 더 우월한 본성이고 핵심이라면 생존가능한 방향으로 선과 악을 행한다. 그리고 그 생존가능한 방향이라는 것은, ‘살인’이라는 진화심리학자의 말은 왜인지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아니, 유진의 재판이 진행된다면 유진의 행동에 대한 변론의 말처럼 들린다. 자, 그렇다면 유진의 행동들 어머니와 이모와 해진을 죽인 것은 진화과정이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한, 자신의 경쟁자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 몇 백번을 생각해도 그렇다. 안타깝지만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으로 그것이 그 상황에 더 발현되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를 가진 우리 모두는 유진이라는, 유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최초의 살인은 왜인가. 그것도 생존을 위한 악의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 그 진화의 한 방식으로 문화 또한 선점해왔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만드는 ‘나’의 생존. ‘어떡하든 살아남으라’라는 말이 한없이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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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윤성희, 베개를 베다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한때는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특히 어느 사고를 당한 시점에선, 어떤 사건에 맞닥뜨려서 갖는 생각이라면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일상의 잔잔한 일과를 가장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기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일상,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그저 그런 날들의 일이 윤성희의 글을 거치면 정말 특별한 사건처럼 느껴진다. 굳이  따지고 보면 소설적 ‘사건’이라 느낄 만한 일이 없어 책을 덮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게 되지만 글을 읽는 동안에는 그 잔잔함이 너무도 익숙하면서, 그래서 뭔지 뭐를 아득함과 가슴이 저린다. 이것이 소설인가라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수필 느낌이 나는 글이라서 그렇다. 수필이 어떤 글쓰기이던가. 내가 겪은 일상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이니,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에 실화의 이야기에 대한 감정의 반응인 것이다.

  여기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들이 섞이어 등장인물이 섞이어 모든 가족들을 만나는 듯하다. 그리고 한 생애가 저무는 느낌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고 그리고 생을 마감하고. 마치 아주 머언 날에 삶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가 함께 했던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딱히 즐거운 일만 가득한 것이 아니고 꼭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하루, 또 하루, 그런 하루의 삶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간다.

  베개를 베고 누워 멈칫 멈칫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내 가까운 이에게 들려주고 듣는 일들이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다. 예기치 못한 사물들 하나에 미운정, 고운정이 붙어 버린 듯 사람과 사물 속에서 ‘기억’들과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다. 내 감정을 담고 있어 일회용 물건이라도 버리면 안될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비어 있는 집안의 모든 것들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하신 것일까.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현관에 서서 집안을 향해 다녀왔습니다. 빈집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그 말은 꼭 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분들. 액자들, 텔레비전. 개지 않은 이불.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들. 그런 것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내가 지금 나가니 빈집 잘 부탁한다. 내가 지금 들어왔으니 걱정 마라. 뭐 그런 신호로. p174, 낮술


   그래서 그는 이혼한 아내가 연수간 사이 빈집을 돌보는 것일까. Tv를 보고 음식을 시켜먹고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보며 옛 일들을 기억하며. 빈집에게 인사하기 위해, 신호를 보내기 위해. 텅빈 집안에서 1인분은 배달되지 않아 음식을 더 시켜먹으며 뒤척이며 tv를 보는 ‘그’의 모습이 애잔하다. 하지만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물받이 아래 흘러내린 물처럼 잔잔한 눈물이 나려 한다.


나는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었다. 듬뿍. 물받이 아래로 물이 흘렀다.

p124, 베개를 베다


  무심히 흘러가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특별히 악에 받쳐 타인을 해치는 이도 없고, 특별히 유쾌하여 타인을 달뜨게 하는 이도 없지만 한번 생각하면 다 기억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두 번 생각나면 다시는 기억나진 않을 것도 같은 이야기들. 소설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보다 사람들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도 건네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보지 않아도 우리들의 일상의 수다는 정말 많았고, 다양했다. 그런 수다들이 모여서 가슴에만 남지 않고 사물들에 사람들 속에 속속히 각인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 하루 하루의 날들의 삶에 신호를 보내고 싶다. ‘사건’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익숙해서 무심해져버린 일상의 하루가 소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고.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달리 보일 일들인데. 문을 열고 나가 다시 들어와 이렇게 외쳐야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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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섞은 말


  은희경, 중국식 룰렛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묻지? 뭘 알고 싶어서? 삶의 후회와 실수를 타인에게 말하고 싶은가. 아니 타인의 진심을 알고 싶을 뿐이다. 내 진심은 거짓을 섞어 순도를 줄이면서 타인이 제 진심을 얘기할 거라 기대하는가. 그럼에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런 게임. 그것에 기대어서라도 상대의 진심을 추측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별것 아닌 게임으로 위장해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는 진심.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진실을 말하고픈, 진실을 듣고픈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일까. 진심이란 건 감추어야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공교로운 운명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p28, 중국식 룰렛


  내 삶의 거짓은 악의를 감추기 위함일까. 선의를 드러내기 위함일까. 그래서 그것은 나의 운명을 어디로 끌고 가고 있을까. 어떡하든 내 이기를 위해 거짓을 일삼았대도 삶은 그저 우연의 연속이라면 그렇다면 이젠 이렇게 말하리, 세상의 모든 불운과 행운에 건배!

 

미혹과 욕망이 수없이 나를 낭떠러지로 몰았지만 나는 한번도 거짓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지난 일을 편집하고 방어장치를 만들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다. p133, 불연속선


  지난 삶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지난 삶이 아니라 다가올 삶에서조차도 “한번도 거짓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자신하지 못하겠다. 거짓에 휘둘리기에 미혹과 욕망의 낭떠러지로 골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비참하게도 미혹과 욕망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것을 점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듯, 늘 밀려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거짓에 휘둘린 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절대 휘둘릴 수 없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이라고? 아니, 지금 이 삶의 결과는 정해진 채로 흘러가고 있다. 거짓과 진실을 얼마만큼 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루한 삶으로의 낙인은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으려 바둥거리는 모습을 쳐다보며 게임처럼 즐기는 이는 따로 있다. 그렇기에 거짓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몹시도 억울했을, 아니 진실의 비율이 높은 것이 더 억울한 것이 되려나. 마치 가진 자들의 게임판의 말이 되어 달그닥거리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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