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이코패스인가?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프로이트˝ p380

 

   

  그러고 보니 작가 정유정의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청소년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 여행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까지. 그 사이에 ‘심장’이 있었고 ‘7년’이 있었고 ‘28’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나 역시 매니아처럼 작가의 책을 읽어 온 것 같다.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유정 작가가 책을 낸다면 굳이 안 읽는다고 발악할 독자는 아니어서 빗발치는 <종의 기원>의 여론에 힘입어 책을 읽었다. 열렬한 독자층을 거느리고 장르문학의 대가로 우뚝 선 작가답게 이번 신작에 기대하는 이들 역시 많았던 모양이다. 출간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출간 후에도 ‘역시 정유정’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종의 기원>.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인지 <종의 기원>은 심심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좀처럼 “악”의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내 속의 악이 더 악랄한 걸까. 줄거리가 예상 가능하게 흘러 간 것이 흥미가 약한 요인이었다.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이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유진의 행동이, 전개가 예상한대로 흘러가 긴장감이나 몰입감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유진의 행동을 예측하다니, 나 사이코패스인가?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장르가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워낙 넘치고 있기에 웬만한 살인의 이야기엔 극적인 느낌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밥먹으라는 말이 귀찮아 엄마와 이모를 죽인 19세 남학생 사건도 발생한 터라. 살인의 이유와 목적은 익숙한 패턴이고 구성의 쫄깃함이 소설이나 영화를 흥미있게 돋우는 장치가 된 것 같다. 허나, <종의 기원>은 1인칭 시점이 차이가 있다. 어차피 정유정 작가의 소설 속에서 늘 범인을 찾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독자도 주인공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누구와 대립하는지 알고 있으며 명확히 안티를 알기에 주인공이 그 대립에서 이기기를 응원하게 되었을 뿐이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63

 

   그 대립이 약했던 탓일까. 몰입이나 흥미가 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응원할, 감정을 이입할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악을, 내 안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건가. 나는 유진에게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공감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기에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유진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살인의 대상이 자신에게 가까운 엄마와 이모, 그리고 함께 생활해온 친구였다는 이유로 유진을 더욱 ‘악한 본성’의 소유자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악의 어떻게 점화되는가가 작가의 의도라면 “얼마나” 악한 지는 부차적인 요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유진 역시 시작은 자기도 모르는 어느새 살인을 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니까. 그래서 최초의 살인의 기억을 유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좀더 악랄하려면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인물이 되려면 자신이 “살인”의 느낌을 기억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작가의 말대로 하면 작가의 소설에서 가장 ‘악’은 바로 유진이다. 그렇게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애를 쓴다. 그 기억을 모두 잊은 채 마치 기억처럼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진을 조금이라도 옹호라는 측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불만을 가진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206

 

   내 이런 불만을 알기라도 한 듯 작가는 기억을 잃은 채 살인을 한 유진의 행동에 대해 변명까지도 만들어두었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문제가 공감능력의 상실이라고 한다는데 유진은 공감능력이 없었던가? 이렇게 유진의 공감 능력을 따져보는 건 유진이 절대적 악인이라고 생각하려는 이유일까, 그 반대일까. 작가의 의도는 반대인 듯하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 p379

 

   상황에 따른 변화가능성. 본성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발현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 그러나 생존이 더 우월한 본성이고 핵심이라면 생존가능한 방향으로 선과 악을 행한다. 그리고 그 생존가능한 방향이라는 것은, ‘살인’이라는 진화심리학자의 말은 왜인지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아니, 유진의 재판이 진행된다면 유진의 행동에 대한 변론의 말처럼 들린다. 자, 그렇다면 유진의 행동들 어머니와 이모와 해진을 죽인 것은 진화과정이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한, 자신의 경쟁자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 몇 백번을 생각해도 그렇다. 안타깝지만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으로 그것이 그 상황에 더 발현되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를 가진 우리 모두는 유진이라는, 유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최초의 살인은 왜인가. 그것도 생존을 위한 악의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 그 진화의 한 방식으로 문화 또한 선점해왔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만드는 ‘나’의 생존. ‘어떡하든 살아남으라’라는 말이 한없이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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