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윤성희, 베개를 베다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한때는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특히 어느 사고를 당한 시점에선, 어떤 사건에 맞닥뜨려서 갖는 생각이라면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일상의 잔잔한 일과를 가장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기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일상,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그저 그런 날들의 일이 윤성희의 글을 거치면 정말 특별한 사건처럼 느껴진다. 굳이 따지고 보면 소설적 ‘사건’이라 느낄 만한 일이 없어 책을 덮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게 되지만 글을 읽는 동안에는 그 잔잔함이 너무도 익숙하면서, 그래서 뭔지 뭐를 아득함과 가슴이 저린다. 이것이 소설인가라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수필 느낌이 나는 글이라서 그렇다. 수필이 어떤 글쓰기이던가. 내가 겪은 일상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이니,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에 실화의 이야기에 대한 감정의 반응인 것이다.
여기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들이 섞이어 등장인물이 섞이어 모든 가족들을 만나는 듯하다. 그리고 한 생애가 저무는 느낌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고 그리고 생을 마감하고. 마치 아주 머언 날에 삶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가 함께 했던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딱히 즐거운 일만 가득한 것이 아니고 꼭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하루, 또 하루, 그런 하루의 삶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간다.
베개를 베고 누워 멈칫 멈칫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내 가까운 이에게 들려주고 듣는 일들이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다. 예기치 못한 사물들 하나에 미운정, 고운정이 붙어 버린 듯 사람과 사물 속에서 ‘기억’들과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다. 내 감정을 담고 있어 일회용 물건이라도 버리면 안될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비어 있는 집안의 모든 것들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하신 것일까.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현관에 서서 집안을 향해 다녀왔습니다. 빈집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그 말은 꼭 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분들. 액자들, 텔레비전. 개지 않은 이불.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들. 그런 것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내가 지금 나가니 빈집 잘 부탁한다. 내가 지금 들어왔으니 걱정 마라. 뭐 그런 신호로. p174, 낮술
그래서 그는 이혼한 아내가 연수간 사이 빈집을 돌보는 것일까. Tv를 보고 음식을 시켜먹고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보며 옛 일들을 기억하며. 빈집에게 인사하기 위해, 신호를 보내기 위해. 텅빈 집안에서 1인분은 배달되지 않아 음식을 더 시켜먹으며 뒤척이며 tv를 보는 ‘그’의 모습이 애잔하다. 하지만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물받이 아래 흘러내린 물처럼 잔잔한 눈물이 나려 한다.
나는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었다. 듬뿍. 물받이 아래로 물이 흘렀다.
p124, 베개를 베다
무심히 흘러가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특별히 악에 받쳐 타인을 해치는 이도 없고, 특별히 유쾌하여 타인을 달뜨게 하는 이도 없지만 한번 생각하면 다 기억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두 번 생각나면 다시는 기억나진 않을 것도 같은 이야기들. 소설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보다 사람들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도 건네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보지 않아도 우리들의 일상의 수다는 정말 많았고, 다양했다. 그런 수다들이 모여서 가슴에만 남지 않고 사물들에 사람들 속에 속속히 각인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 하루 하루의 날들의 삶에 신호를 보내고 싶다. ‘사건’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익숙해서 무심해져버린 일상의 하루가 소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고.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달리 보일 일들인데. 문을 열고 나가 다시 들어와 이렇게 외쳐야지.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