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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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진이, 지니, 정유정, 은행나무, 2019.


  포털 메인 사진기사엔 뱀이 가득한 흙탕물에 선 인간에게 오랑우탄이 손을 내밀고 있다. 사진을 찍은 작가의 인상처럼 ‘내 손을 잡아’ ‘도와줄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 속 인물은 오랑우탄의 손을 잡진 않았다고 한다. 그 손을 잡았다면 이후의 사진은 어떻게 찍혔을지.

  며칠 전에는 ‘원숭이가 구석기 시대 돌입하다’라는 과학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3천년전부터 돌을 도구로, 뗀석기로 이용하고 있긴 했지만 점점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고. 이렇게 학습하고 전수하며 지금보다 문명화되어 갈지 모른다. 마치 인류가 구석기 시대 그러했던 것처럼.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오랑우탄… 그 특징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고 통칭하여 원숭이류로 분류하는 이 종들은 인간과 유사점이 많다. 분명 지적인 면에서 인간과 비교될 수 없을 텐데 가끔 이러한 동물이 인간보다 낫다 생각될 때가 있다. 인간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작용일 것이다. 퍼져가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상황 때에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 혹에 어떤 어떤 인간들의 모습 때문에도 더욱 더. 그래서 감정적인 부분이야 헤아릴 수 없겠지만 보편적 정서는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런 동물들의 행동에 감정이 끌려지게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결론은 구달 박사가 침팬지 연구에 그렇게 매진을 하고 있나 보다,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의 판타지가 판타지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인물은 김민주와 사육사 ‘진이’다. 그리고 보노보 지니가 있다. 영장류 연구자가 되기 위한 오랜 노력을 포기하고 사육사로 일해 온 진이의 마지막 출근날,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보노보 구출작업에 투입된 진이가 보노보를 구출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나는 늘 그래왔듯 내 영혼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서 버스 승강장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넋 나간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서 길 건너 병원 앞마당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내 문제는 사소하게 느껴졌다. 작아서 사소한 게 아니라 멀어져서 사소해진 경우였다.


  삶에 무력하고 의지없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세상만사가 느리고 질서없이 흘러갈 듯하지만 스릴러를 전개해온 작가의 문장답게 속도감이 있다. 정유정 작가의 그동안의 작품과는 결이 너무 달랐던 소설이지만 그 세밀한, 리얼리티는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이 소설은 맹백한 판타지임에도 상황과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정교함에 휘둘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보노보가 등장하는, 영혼의 바뀜이 일어나는 이 소설이 말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진이’라는 사육사가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기보다는 진이가 품어가는 생각과 감정이 현실적이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물들여져 간 게 맞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또한번 놀란다. 이 이야기가 사흘간 펼쳐진 일이니까 말이다.

  그 많은 시간 동안 해결치 못한 삶의 태도가 주인공들이 겪는 이런 사건을 맞닥뜨린다면 사흘 안에 달라지리란 건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터닝포인트,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의 발생, 쿵! 쾅! 하지만 내면에서 쌓아올린 그 무수한 생각과 감정이 없었다면 한번의 충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란 그저 보여지는 것만일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 변화란, 그동안 품고 있던 내면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어 그것과 맞닥뜨리고 해소하는 것일 테니 비로소 ‘나’로서의 삶을 살아갈 여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소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건 트라우마다. 죄책감 또는 책임이라는 무게. 제 삶에 대해서, 타인의 삶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생물의 삶이라는 실존에 대해. 소설은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삶에 무척이나 무력한 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의 무게는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면서 달라진다. 당연 그럴 것이다. 작가가 전력을 다해 말하고픈 바가 그것일 테니까.

  오랑우탄이 손을 내민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랑우탄의 손을 잡지 않았다. 물론 진이 또한 지니를 만나기 전 위급한 상황의 보노보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쩌면 그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그 시간을 되돌리고픈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 그런 이야기지만 소설을 덮는 시점엔 진이와 지니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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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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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인간


주말, 출근, 산책:어두움과 비, 김엄지, 현대문학, 2015.


  a, b, c…… E… 나를 가리키는 알파벳은 무얼까.

  제목처럼 이 책은 일요일 늦은 밤 그리고 월요일 새벽이면 더욱 당기는 글일 것이다.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순간의 기분들을 휘갈겨 쓴 낙서의 향연. 그리하여 소설의 서사는 희미하고 단어와 이미지가 남는다. 너무나 익숙하고 떼내고 싶은 이미지다. 반복적인 패턴에서 멈춘다면 그건 a처럼 실종이란 이름을 달았을 때가 될 것이다.

  소설을 보고 있자면 지극히 단순한 패턴의 인간을 만난다.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가치화하는 인간이 가진 아주 단순한 욕구만이 살아남아 움직이는 모습을 짧은 문장 속에서 보고 있으면 아득하고 허무하다. 중요한 요인은 출근하는 인간이다. 거의 모든 직장인이 ‘출근’이란 단어에 느낄 법한 감정이 여기에 담겼다. 출근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주말이란 출근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요소에 다름 아니다. 출근을 위한 소모적인 도구로서의 주말. 그리하여 주말은 기다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극도로 싫어지기도 한다. 소설에서 느끼는 공감은 작가가 가리키는 것에 있을까. 그저 ‘출근’이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환기에 있을까.

  E는 평일엔 먹고 자고 출근하고 주말이면 밀린 빨래를 하고 밀린 잠을 자고 TV를 본다. 때로 누군가를 만나 섹스를 하고 때때로 동료들과 어울린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충실한 채 살고 있다. E의 일상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런 만큼 E의 머릿속도 깔끔하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주인공은 E이지만 소문자로 나열된 a, b, c 그들에게 클로즈업 한다면 역시 E와 같을 것이다. 그렇게 같지 않지만 결국 똑같이 패턴화된 a=b=c=E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지리멸렬과 권태의 세상이 무력감이 더욱 짙어진다.


암전.

설정만을 보여 주고 암전.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고 다시 암전.

암전.

암전은 무대 위의 유일한 개연성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벌어지고, 벌어졌다. 무대 위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책임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직장인으로서 가장 서글플 때는 주말이 지나 출근을 해야 할 때가 아니다. 아마도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며 나름 성취감을 얻고 동료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그곳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을 때 아니 그렇지 않고 그 정점에 있더라도 내가, 소모품이라고 느껴지는 때다. 그런 느낌을 안고서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그곳으로 찾아 들어갈 때.

   이 파편적인 서사의 소설이 휘갈긴 낙서같은 글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그것이다.  a, b, c 그 모두가 실종되더라도 아무런 변화도 없을 그곳을 찾아가는 수많은 E들이 있다. 미치도록 불안하고 미치도록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돌고 돌고 있다. 주말이 지났고 출근하고 때때로 비가 오고 때때로 산책을 하고 한없는 일상의 쳇바퀴를 끊을 마법의 단어. 그것은 무얼까.

  출근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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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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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켜보고 있다


새벽의 방문자들, 2019.


  여성의 방을 훔쳐보기 위해 엉덩이를 치켜들고 지독히도 낮은 자세로 창문 밖에 엎드리고 있는 남성의 모습은 CCTV에 정확히 찍혀 있다. 3달간 이어진 이 남성의 행위는 재판이 아니라 경찰 조사 단계에서 무죄, 혐의 없음으로 수사 종결되었다. 피해자는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이사한다. 여학생을 뒤쫓아 현관 비밀번호를 마구 누른 남성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새벽, 여성을 뒤따라가 여성의 집 안으로 침입하려는 남성의 기사는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나타나 같은 사건인가 생각하게 한다. 워낙 주거 획일성이 높은 나라이니 아파트 동과 호수, 때론 층을 착각하는 일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침입 범죄 건수가 지난 한해 만4천여 건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면, 한밤이나 새벽이면 여성을 뒤쫓아 가 강제로 문을 열려는 수많은 남성이 등장하는 CCTV 장면을 보게 되면, 당연 생각은 달라진다. 아니, 기저에 있던 감정들이 거침없이 올라온다. 안타깝게도 그들에 대한 ‘욕’보다도 더 빨리 퍼져가는 불안과 공포.

  페미니즘을 테마로 한 이 소설집은 일상에서 겪게 되는 불안과 공포의 순간, 불쾌하고 모멸적인 순간, 너무나 흔하게 마주해서 피해에 익숙해진 순간들을 그리고 있다. 특히 표제작과 같은 「새벽의 방문자들」엔 새벽,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여성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새로 이사 온 집에 한밤중 초인종 소리가 계속 울릴 때, 비디오 폰을 통해 방문자를 확인할 수 없다 해도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도 불확실한 방문자로 인한 두려움, 불안과 공포의 감정에 그곳에 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여자’ 역시 자신과는 일면도 없는 끊임없는 방문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숨을 참는다. 그러다 ‘여자’는 마침내 알게 된다. 끝없이 수많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그들이 왜 ‘여자’ 집 초인종을 눌러대고 문을 두들기고 열려하고 얼굴을 들이박으며 서성이는지를.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 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머뭇거리는 그들의 얼굴이 비디오 폰의 카메라에 정면으로 잡히는 순간, 여자는 휴대폰 카메라로 모니터를 촬영했다. 그들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나면 찍어둔 사진을 프린트했다. 


  도심 오피스텔이 성매매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몇몇 일당들이 잡혔다고 하는데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오피스텔 수는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이들 말고도 또다른 일당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옆집이 윗집이 아랫집 어느 곳이 현실의 그런 공간일지 모른다. 그런 공간을 활용하는 이들로 인해 혹은 그 이상의 이들로 인해 ‘여자’는 늘 불안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여자’를 성적 대상화하며 보고 즐기고 착취하려는 끊이지 않는 방문자들의 존재. 감추려고도 하지 않으며 비밀스럽고 은밀하지도 않게 진행되기도 하는 노골적인 이 행위의 기저엔 무엇이 있는 건가.   

  소설에서 ‘여자’는 문 안에서 비디오폰을 통해 남성을 보지만 문 밖의 남성은 여성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남성의 그 시선을 두려워하는 ‘여자’의 위치는 남성들을 ‘쳐다보는’ ‘촬영하는’ 위치로 바뀐다. 오래 짓눌린 감정 때문에  시선의 위치가 변한 것만으로도 감정이 들뜬다. 사뭇 통쾌하지만 그건 한순간이다. 현실에서 이렇게 대응할 수 있을까.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스쳐간다. 소설집에서 가장 전복적 행위를 펼치는 건 김현진의 「누구세요?」다.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애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낯모르는 사람만이 아니라 결혼을 앞둔 애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성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세요?」에서 지윤은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당하고 사표를 내지만 성추행 그깟것은 참으라고, 그따위로 사표를 낸다고 화를 내는 재영과 헤어진다. 이미 지윤은 그동안 벌어놓은 것을 재영에게 착취당한 뒤다. 계획하고 꿈꾸던 미래는 사라지고 월세 독촉에 시달리는 현재에 있는 지윤은 자신도 놀랄 만큼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를 상태가 된다. 그녀가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가 그집에서 행한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라는 이가 행할 때면 그저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된다.

  지윤이 서 있는 남성에 대한 전복적 위치는 잠시의 통쾌함도 주지 못한다. 쓸쓸하고 아릴뿐이다. 피해자가 되어도 피해자일 수 없는,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서 위치하는 여성이 이 굴레를 끊어낼 방법이란 자신을 잃지 않고는 없는 것인가. 지윤의 남성을 향한 미러링이 참담함을 자아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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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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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현대문학, 2019.


대부분의 딸들의 서사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한 어머니를 극복하거나 혹은 대신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 마침내 다른 세계로 진입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증,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와 같은 유형의 엄마를 본 적이 업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고 나와 엄마의 이야기 역시 수많은 형태의 모녀 서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서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어머니’ ‘엄마’라는 요소는 그것 자체로 여성 서사 전체를 장악한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모녀 서사는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역전. 가난을 이유로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게끔 의무교육은 고등학교까지 확대되었으며 오히려 부모의 과한 교육열이 ‘사(死)’교육화되어 자녀들은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쨌든 자신의 욕구를 자식에게서 실현하려는 부모의 출현은 새롭지 않다.

  ‘나’는 스물두 살 대학생임에도 ‘실패자’, ‘낙오자’라는 감정에 시달린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의 근원은 아마도 따로 있을 듯.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학사경고 전력이 있고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요즘 세상이 할 일 없는 세상이겠는가. 엄마는 자신이 보기에 할 일없는 딸에게 할머니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한다. 그래서 딸은 어린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간 엄마에게서 또다시 ‘유배당한’ 느낌을 받는다. 나에겐 어릴 적부터 엄마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운 마음과 상처가 가득하다.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포기해야 했고, 사랑했던 여교사 대신 지적인 대화를 조금도 주고받을 수 없는 여자와 하는 수 없이 평생을 살게 된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우리 딸은 사내아이의 머리를 지녔어!”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딸아이에게 사내아이의 머리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으므로, 겨우 대여섯 살인 엄마는 그럴수록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가 건네는 책을 읽었다.


  할머니의 삶은 할아버지의 무시와 폭력을,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견디어내는 삶이었다. 딸에게 의지한 할머니의 삶, 어린 시절 나를 돌봐준 할머니의 삶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만 언제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친구들이 아마도 부러웠을 것이다. 엄마와 딸 사이의 공모. 딸에 한자를 가르쳐주고, 예이츠나 워즈워스의 시를 읊어주는 엄마. 그렇지만 엄마의 엄마는 그러는 대신 혼자 술을 마시며 작부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화가 난 할아버지가 술상을 엎고, 할머니를 때릴 때, 엄마가 미웠던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였는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사춘기 때의 엄마는 화가 났고, 커서는 슬펐다.


  ‘나’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이해는 그간 가져온 묵은 감정을 온전히 해소할 정도는 아니어서 딱 그만큼의 이해로 머문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좁혀지지 않는 지점이 있다. 어차피 이해란 각자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에 부두를 찾는 날이 많은 할머니처럼 가슴에 맺힌 것들은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면 부두를 찾았고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살아온 생 내내 그렇게 부두를 찾았을 할머니처럼 응어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나’가 엄마를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더 나아가는 지점은 그 스물두 살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임신과 출산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할머니와 엄마의 삶으로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나’가 비로소 엄마가 되고서야 이해하게 되는 그들의 삶. 이 결론은 여성 서사의 답습이다. 결국 제자리다. 그 삶을 살아야만 이해되는 여성서사란 문학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완벽한 결말이나 지금처럼 페미니즘과 여성 이야기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 혐오로 치닫는 상황에선 말이다. 그러니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 온전한 이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엄마처럼 살겠어’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어’ 사이에서 외치고 외쳐보아도 ‘엄마’가 되면 애증은 친애하는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여성의 삶. 여성은 사라지고 ‘엄마’가 남는, 다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삶의 순환. 결국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경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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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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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다


어제는 봄, 최은미, 현대문학, 2019.3.25.


글을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한 스물세 살 이후로 내 정체성은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수진은 그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하고 힘겹고 아프다. 많은 이들이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해 힘겨운 것과는 다르다. 글이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것인데 등단한 이후로 책을 낸 적 없고 아무도 그녀가 글쓰는 사람인 줄 모른다. 언젠가는 누군가 읽어주는 소설을 쓰느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시간을 내어 소설을 쓰지만 ‘다른 작가들처럼 원고료를 받고 책을 내고 사는 것도 아닌’ 그녀는 다른 일하는 엄마들처럼 경제활동을 하면서 글쓰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 속에 움츠러든다. 매우 성실하며 나쁜 습관과 행동이란 하나도 없는, 성욕까지 없는 남편 또한 그녀의 글쓰기에 응원군이 되지 못한다.

  정수진은 윤지욱의 아내이자 윤소은의 엄마로서의 삶을 성실히 수행해 나가며 열망처럼 갖고 잊는 글을 쓰기 위해 경찰관을 취재원으로 할 정도로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정수진의 글쓰기는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머무르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는 양주에 관한 글을 쓰리라고 하고 있지만 양주는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막는 이유가 되고 있다. 양주, 양주는 어떤 곳이기에.

  양주는 최은미 작가의 소설 『아홉번째 파도』의 척주를 생각나게 한다. 더불어 이선우 경사는 서상화의 느낌이다. 양주는 척주처럼 도시 전체에 비리가 숨겨진 곳은 아닌 그녀의 고향이지만 그녀의 마음속 그곳에서 벌어진 어떤 날의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은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제목처럼 봄날의 기운이 한껏 드리워져 있다. 그녀, 정수진은 딸 윤소은이 커가면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처럼 불러들이는 글은 사건보다는 정수진의 내면의 세계를 집중하고 훑는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나는 과거의 정수진을 소환하며 현재 이선우와의 관계를 인식하며 ‘나’인 정수진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번도 쓰지 않을 소설을 쓰게 한 기원.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역겨워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나는 1만 매가 넘는 소설을 쓴다 해도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섞다’라는 말이 역겹다.


  엄마의 부정, 그로 인해 죽은 아버지. ‘섞다’라는 동사를 소설 속엔 쓰지 않지만 정수진은 과거와 현재를 섞어야지만 비로소 하나의 정수진이 될 수 있다. 결국 정수진의 글쓰기와 정체성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인식하는가와 연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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