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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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현대문학, 2019.


대부분의 딸들의 서사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한 어머니를 극복하거나 혹은 대신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 마침내 다른 세계로 진입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증,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와 같은 유형의 엄마를 본 적이 업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고 나와 엄마의 이야기 역시 수많은 형태의 모녀 서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서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어머니’ ‘엄마’라는 요소는 그것 자체로 여성 서사 전체를 장악한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모녀 서사는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역전. 가난을 이유로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게끔 의무교육은 고등학교까지 확대되었으며 오히려 부모의 과한 교육열이 ‘사(死)’교육화되어 자녀들은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쨌든 자신의 욕구를 자식에게서 실현하려는 부모의 출현은 새롭지 않다.

  ‘나’는 스물두 살 대학생임에도 ‘실패자’, ‘낙오자’라는 감정에 시달린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의 근원은 아마도 따로 있을 듯.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학사경고 전력이 있고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요즘 세상이 할 일 없는 세상이겠는가. 엄마는 자신이 보기에 할 일없는 딸에게 할머니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한다. 그래서 딸은 어린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간 엄마에게서 또다시 ‘유배당한’ 느낌을 받는다. 나에겐 어릴 적부터 엄마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운 마음과 상처가 가득하다.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포기해야 했고, 사랑했던 여교사 대신 지적인 대화를 조금도 주고받을 수 없는 여자와 하는 수 없이 평생을 살게 된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우리 딸은 사내아이의 머리를 지녔어!”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딸아이에게 사내아이의 머리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으므로, 겨우 대여섯 살인 엄마는 그럴수록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가 건네는 책을 읽었다.


  할머니의 삶은 할아버지의 무시와 폭력을,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견디어내는 삶이었다. 딸에게 의지한 할머니의 삶, 어린 시절 나를 돌봐준 할머니의 삶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만 언제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친구들이 아마도 부러웠을 것이다. 엄마와 딸 사이의 공모. 딸에 한자를 가르쳐주고, 예이츠나 워즈워스의 시를 읊어주는 엄마. 그렇지만 엄마의 엄마는 그러는 대신 혼자 술을 마시며 작부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화가 난 할아버지가 술상을 엎고, 할머니를 때릴 때, 엄마가 미웠던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였는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사춘기 때의 엄마는 화가 났고, 커서는 슬펐다.


  ‘나’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이해는 그간 가져온 묵은 감정을 온전히 해소할 정도는 아니어서 딱 그만큼의 이해로 머문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좁혀지지 않는 지점이 있다. 어차피 이해란 각자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에 부두를 찾는 날이 많은 할머니처럼 가슴에 맺힌 것들은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면 부두를 찾았고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살아온 생 내내 그렇게 부두를 찾았을 할머니처럼 응어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나’가 엄마를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더 나아가는 지점은 그 스물두 살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임신과 출산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할머니와 엄마의 삶으로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나’가 비로소 엄마가 되고서야 이해하게 되는 그들의 삶. 이 결론은 여성 서사의 답습이다. 결국 제자리다. 그 삶을 살아야만 이해되는 여성서사란 문학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완벽한 결말이나 지금처럼 페미니즘과 여성 이야기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 혐오로 치닫는 상황에선 말이다. 그러니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 온전한 이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엄마처럼 살겠어’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어’ 사이에서 외치고 외쳐보아도 ‘엄마’가 되면 애증은 친애하는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여성의 삶. 여성은 사라지고 ‘엄마’가 남는, 다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삶의 순환. 결국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경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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