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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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다


어제는 봄, 최은미, 현대문학, 2019.3.25.


글을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한 스물세 살 이후로 내 정체성은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수진은 그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하고 힘겹고 아프다. 많은 이들이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해 힘겨운 것과는 다르다. 글이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것인데 등단한 이후로 책을 낸 적 없고 아무도 그녀가 글쓰는 사람인 줄 모른다. 언젠가는 누군가 읽어주는 소설을 쓰느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시간을 내어 소설을 쓰지만 ‘다른 작가들처럼 원고료를 받고 책을 내고 사는 것도 아닌’ 그녀는 다른 일하는 엄마들처럼 경제활동을 하면서 글쓰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 속에 움츠러든다. 매우 성실하며 나쁜 습관과 행동이란 하나도 없는, 성욕까지 없는 남편 또한 그녀의 글쓰기에 응원군이 되지 못한다.

  정수진은 윤지욱의 아내이자 윤소은의 엄마로서의 삶을 성실히 수행해 나가며 열망처럼 갖고 잊는 글을 쓰기 위해 경찰관을 취재원으로 할 정도로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정수진의 글쓰기는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머무르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는 양주에 관한 글을 쓰리라고 하고 있지만 양주는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막는 이유가 되고 있다. 양주, 양주는 어떤 곳이기에.

  양주는 최은미 작가의 소설 『아홉번째 파도』의 척주를 생각나게 한다. 더불어 이선우 경사는 서상화의 느낌이다. 양주는 척주처럼 도시 전체에 비리가 숨겨진 곳은 아닌 그녀의 고향이지만 그녀의 마음속 그곳에서 벌어진 어떤 날의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은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제목처럼 봄날의 기운이 한껏 드리워져 있다. 그녀, 정수진은 딸 윤소은이 커가면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처럼 불러들이는 글은 사건보다는 정수진의 내면의 세계를 집중하고 훑는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나는 과거의 정수진을 소환하며 현재 이선우와의 관계를 인식하며 ‘나’인 정수진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번도 쓰지 않을 소설을 쓰게 한 기원.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역겨워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나는 1만 매가 넘는 소설을 쓴다 해도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섞다’라는 말이 역겹다.


  엄마의 부정, 그로 인해 죽은 아버지. ‘섞다’라는 동사를 소설 속엔 쓰지 않지만 정수진은 과거와 현재를 섞어야지만 비로소 하나의 정수진이 될 수 있다. 결국 정수진의 글쓰기와 정체성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인식하는가와 연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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