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스파이다

 

고요한 밤의 눈, 박주영. 다산책방. 2016.

 

   스파이 소설이라 이름하는 이 소설에서 스파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는다.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들이 행하는 첩보 활동도 없다. 등장인물들 스스로가 ‘스파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그래서 ‘스파이의 정체는 뭔가?’라는 의문만으로도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스파이임을 알린다. 그리고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로 기록되지 않은 쌍둥이 중 한명이 기록되어 살고 있는 언니의 실종을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미스터리와 첩보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스파이 활동과 관련한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사색이 주가 된다.

   사회 현실에 대한 상당히 익숙한 비판이 줄곧 등장인물에 의해 제기되는데 이러한 철학적이고도 비판적인 사회고발의 내용을 익숙하지 않게 잘 버무린 듯하다. 끝까지 내용에 관한 모호함을 유지하면서도 ‘이 사회가 이렇다’라고 분개하게 되는 내용을 사회학 책처럼 잘 정리하여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몇 이야기를 빼고 나면 자본주의 현실, 경쟁사회의 현실, 조직사회에 대한 것,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직시하는 말들이 줄줄이 열거된다. 이것이 소설의 형태로 제시되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등장인물은 미지칭으로 알파벳으로 각 개인의 관점에서 사건이 서술된다. 또한 등장인물 자체가 많지 않다. 이들 몇 안되는 인물들은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스파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파이라는 역할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고민하고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파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가. 어쩌면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도. 스파이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적어도 등장인물 몇은 그렇게 타인을 감시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위험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감시하는 일이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X는 X의 일을 하고 Y는 Y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이면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면에 또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등 뒤를 모른 체한다.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지만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p134

 

   자기 일에 직업으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것 자체로 교묘하게 스파이일을 수행하기도 하는 이들은 왜 스파이가 되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길 없다. 그저 그렇게 막연하게 그들은 스파이가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스파이라는 삶이 가져다 줄 그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런 만큼 그들 각자의 스파이라는 삶에 대해 가지는 끊임없는 회의가 없다면 이 소설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마냥 모호한 스파이라는 존재, 그 역할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가가 말하는 ‘스파이’는 그냥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들인 것만 같아 보인다. 특정한 시스템에 그저 흘러가는. 생각을 잃어버린 채 그렇게 흘러가는. 그러니까 결국 권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겠다.

   어느 사회나 사회가 안정적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안정’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특정한 사회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희생되는 사회가 오래도록 흘러가고 있었고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혁명을 인식한 자들에 의해 기존의 틀들이 조금씩 수정되며 사회가 흘러갔다. 그 과정 속엔 늘 힘과 권력이 있는 이들이 세상을 휘둘렀고 그들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되돌려야 했던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마치 특정한 권력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의 필요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회에 가장 위험이 되는 것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나 하나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 소설은 결국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문제와 모순들을 외면한 채 그대로 굳어진 사회로 흘러가는데 일조하고 있는 각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p164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 누군가에 의해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 스파이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각 개인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헬조선이라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타인을 ‘이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 모두가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 않은 채로 특정한 이들이 원하는 시스템의 안정화를 위해 자신과 같은 소소한 사람들의 일상을 견제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스파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지배하기 더 쉬워졌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원망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뿐이다. 그래서 자살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자꾸 일어나면 세계가 흔들린다. 먹이사슬의 바닥을 장식하는 인간들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저 고려하지 않은 생지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면서도 자신들만의 세계는 굳게 유지되리라고 믿는 근거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p211

 

   소설 속에서 작가가 외치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지금 현재의 사회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느껴왔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오래도록 패배주로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변화의 기점을 맞이하는 순간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목적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무기력에서 벗어날 발판이 이루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때야말로 정말 ‘스파이’가 될 것이다. 시스템의 스파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주인으로서의 감시자, 스파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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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세계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팻 머피・수전 팰위크・어슐러 K. 르 귄・

파멜라 사전트・히로미 고토・엘리자베스 보나뷔르・켈리 에스크리지・

반다나 싱・캐서린 M. 밸런트・캐롤 엠쉬윌러・안네 리히터・

카린 티드베크・에일린 건・앙헬리카 고로디스체르, 

아작. 2016-09-20.


  페미니즘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차별과 억압에 대한 것이기에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사건은 중요하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는 희망이자 노력이다. 그런데 미래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면, 더 경악스런 일들이 이뤄지고 있다면, 어떤가. 미래의 생활이 어떠할지는 막연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소설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건과 경험 속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과 내면을 부각하고 있다면『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경험을 미래라는 진보된 과학과 접목한다. 이른바 SF 소설이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쓴 글을 묶은 SF 페미니즘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소설이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대체로 70, 80년대 소설이 많다. 그때에 이미 미래의 모습을 상정했는데도 현재에서 느낄 수 있는 여전한 차별과 고정된 인식들이 팽배하다. 도대체 사고의 전이는 어떠한 사건과 맞닥뜨려야만 가능한 걸까.

  이 많은 작가들 중 아는 이름은 어슐러 르 귄이 유일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미래의 상황. 여자들은 모두 현재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이뤄진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의식과 사고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삶 속에서의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의 차별속에 놓인 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 속의 소설들은 기괴한 풍경 속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어슐러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초기 남극탐험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탐험가 모두가 여성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탐험에 관해 자신들을 떠벌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당부한다. 아문센에게는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고! 그가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라고.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안네 리히터의 <식물의 잠>을 읽으면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났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자신을 행성과 식물이라 생각하는 여자가 행성과 식물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이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들의 눈엔 비정상적인,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여성’으로 가두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의 의문과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다.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는 제목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감정에 휘말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함이 가득찼다. <공포>속의 세계는 극단적인 남성지배사회를 그린다. 그 속의 주인공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그들의 에덴에 이브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내에 나갔던 일이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향한 신념도 함께 거둬 간다. 나의 소멸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이 편평한 남성의 형태 안에 여성의 흔적만이 남을 것이다. 어쩌다 나오는 표정, 자세, 감정 따위, 사랑은 재생산과 결별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결합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낼 것이다. 인간의 애정은 유연하니까.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p314~315

 

   수잔 팰위크의 <늑대 여자>는 늑대와 인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을 길들이는 인간 연인은 네 발일 때는 ‘제시’인, 두 발일 때는 ‘스텔라’인 이 여성과 어떻게 함께 할까. 결국엔 파국이 되고 마는 이 관계. 이러한 결말로 이끄는 것은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의 변화다. 늑대 여자의 연인은 제시일 때는 개로, 스텔라일 때는 여성으로 늑대 여자를 착취한다. 물론 사랑으로 보살필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제시가, 스텔라가 그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제시의 말에 스텔라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늑대 여자의 연인은 필요에 의해 제시와 스텔라를 대했고 그리고 필요가 떨어졌을 때 잔인하게 대했다. 늑대여자라는 설정을 빼고 본다면 현실의 남녀관계의 전형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만큼 외적인 테두리의 변화가 남녀 관계의 근본적인 역할과 차별의 상황을 변화시키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별반 현실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의 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래도록 이어온 관습인가, 생물학적인 요인인가. 물론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세계 자체는 극단적이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SF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 아닌가. 현실 자체도 디스토피아가 가득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현실의 상황에서 극단적이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딱히 낯설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이 소설 속 세계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안타까운 것은 책의 제목은 <혁명하는 여자들>인데 그런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 세계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건만,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정복하고 여성들을 위한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는 달라진 사회가 특정 성이 이루는 전쟁같은 승리 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변화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착취당하고 상처받고 억눌리는 그런 모습 속에 여성들은 놓여 있다. 남성들 역시도 현재의 정형화된 남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기에, 이러한 미래 사회를 살아가고 싶지 않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문을 제기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그 방법들을 나누는 것이다. 이 소설 또한 그 역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작가들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작품 또한 수상작인 경우가 많다. 소설의 취향을 떠나서 이 소설의 역할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끊임없는 일깨움이다. 현실 자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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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매뉴얼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김석희 (옮긴이) | 살림 | 2016-11-01.


  저자가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라 아니, 그래서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스러운 소설이다가 첫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도 ‘일본스럽다’는 의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고심한다. 그럼에도 일본 분위기가 난다는 말도 정확치 않은 그 느낌이 맴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일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가 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일본 내에서는 폭발적인 인기와 수상을 얻었다. 저자의 프로필과 책소개에 의하면 그렇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지 초판 인쇄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읽은 책의 인쇄부수는 15쇄였다. 1쇄도 힘들다는 출판 시장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가히 베스트셀러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큰 상의 수상작이라고 하면 더 기대하는 바가 있게 된다. 이유도 명확하지 않게 책이 출간되어 홍보될 때부터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 사회학 저서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편의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사회학적인 접근을 가한 책으로 생각되어 이것이 소설이라는 것에, 그리고 저자의 자전적이란 이야기에 두 번 놀랐다.

  그래서 읽고 난 후엔 오히려 수필쪽에 더 가깝게 느꼈다. 저자의 글의 서술 방식도 그렇고. 문학책 쪽보다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이 책이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도 편의점이 많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 역시 단순 명쾌하고 복잡하지 않고 분량도 매우 짧다. 쉽고 술술 읽힌다. 그래서 아쉽다고 해야 하나. 문장 자체의 재미는 없다. 모든 문학책이 ‘나 문학성이 뛰어난 책이오’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길게 오래 여운이 남진 않아서…. 편의점을 소재로 한 글이 많이 나왔으리라 생각하는데, 편의점을 전면에 내세운 글로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단편이 좀더 내 취향에 부합하는 글인 모양이다. 10년쯤 전 된 것 같은데 더 기억에 남는다. 

  소설 『편의점 인간』 속 주인공 게이코는 18년째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 저자 역시 평소 편의점을 애용한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자신이 18년째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 한다. 어릴 적부터 남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게이코였다. 초반 게이코의 이 남다른 행동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패턴이라 이 소설이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편의점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서른여섯 게이코의 모습을 그린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게 된 이후 매뉴얼이 있는 편의점에서 자신의 안정감을 느끼는 게이코의 모습은 익숙하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비켜 있는 게이코엑 많은 사람들이 우려는 표하지만 게이코는 어릴 적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움직였을 때 자신의 부모님이 아파하고 힘들어 했던 일들을 계기로 절대 자의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타인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살았다. 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온 게이코에게 사람들이 안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길들여지고 길러진 게이코는 편의점에서는 최상의 직원으로 성장한다. 매뉴얼에 맞춰 인사하고 물건을 정리하고 판매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게이코느 그렇게 자신이 세계의 부품이 되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면, 나를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꼬치꼬치 캐묻잖아? 그런 귀찮은 상황을 피하려면 그럴 듯한 변명이 있어야 편리해.”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p70


  하지만 여전히 결혼하지 않고 알바로 머물고 있는 게이코에게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다름에서 오는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적 시각으로 게이코를 바라보기에 게이코는 그들의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애를 쓴다. 역시 사회에서의 열등생으로, 문제인간으로 낙인찍힌 시라하라는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함으로써 ‘정상적’이라 불리는 궤도에 안착하려 하는 것이다.


  게이코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사회에 ‘동화’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시라하와의 대화가 이 소설의 압권이 아닌가 싶다. 복장 터지는 이 대화가 실제 일반적이라 생각되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니까. 하지만 복장이 터지는 이유는 게이코에게는 연민이 가는데 시라하에게는 연민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회의 시선을 지적하는 말들이 시라하의 입에서 나올 때 그것의 설득력이 ‘시라하가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한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도 게이코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게이코는 시라하에게서 이렇게 느끼니까.


나는 어떤 심정이었나 하면, 시라하 씨를 성범죄자가 되기 직전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곤란을 겪은 여자 알바생이나 여자 손님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에 대한 비유로 강간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시라하 씨를 보면서, 피해자 의식은 강한데 자신이 가해자일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 사고 회로를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p105~106 190


  이 소설은 편의점만이 증가하는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이용에만 익숙해져 버린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저 멀리, 저 머언 밝고 경쾌한 미래가 아니라 암울하고 음침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모든 젊은 청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또한 어떤 이는 규격화된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읽기도 하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오히려 일찍부터 사회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강제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이코는 사회의 매뉴얼에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그 매뉴얼에 따라가겠노라 애를 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는 자신이 편의점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만이 자신의 공간이라 인식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편의점 속으로 회귀한다.


보통 사람은 보통이 아닌 인간을 재판하는 게 취미예요. 하지만 나를 쫓아내면 더욱더 사람들은 당신을 재판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계속 먹일 수밖에 없어요.

나는 줄곧 복수하고 싶었어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생충이 되는 게 용납되는 것들한테, 나 자신이 기생충이 되어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죠. 나는 오기로라도 후루쿠라 씨한테 계속 붙어살 겁니다. p146


  반면 시라하는 어떤가. 말은 온갖 사회의 모순을 짚어내고 문제점을 비판하지만 그의 이  지적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의 행동에 있다. 사회적인 통념상의 ‘기준’에서 두 사람 다 물러나 있기는 하다. 시라하는 ‘비난’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스스로 비난을 받을 행동을 일삼고 있다. 반면 게이코는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고 있진 않다.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저녁 식사를 초대받은 곳에서 음식의 메뉴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고 했을 때 게이코는 오직 한가지 음식만을 먹고 있는 거고 시라하는 그 식탁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시라하의 존재는 게이코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시라하를 더욱 ‘비정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게이코가 얼마나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처음엔 게이코의 사회살이에 위협이 되는 듯한 감수성 때문에 불안했고 그다음엔 게이코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마음씀씀이들이 안쓰러웠다. 시라하와의 동거의 이유와 동거 생활은 답답했다. 하지만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게이코에게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서오십시오’라고 인사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게이코는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그러니 게이코의 선택에 축하를 건네야 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편의점 직원으로서의 삶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족스러우면서도 사회의 기준에 따라 그 삶을 외면했던 게이코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편의점을 선택하게 된 것이니까. 시라하가 정해준 삶을 뿌리친 게이코니까. 개인적으로 시라하를 뿌리치는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했으니까.


아니, 누구에게 용납이 안 되어도 나는 편의점 점원이에요. 인간인 나에게는 어쩌면 사라하씨가 있는 게 더 유리하고, 가족도 친구도 안심하고 납득할지 모르죠. 하지만 편의점 점원이라는 동물인 나한테는 당신이 전혀 필요 없어요. p190 


  이제 게이코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이제껏 편의점직원으로 인생의 리듬을 맞춰 온 자신의 리듬을 이어가며 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선택이었음을 게이코는 스스로 인지했다. 그 동안의 내면의 갈등과 일련의 사건들은 그 선택을 위한 여정이었다. ‘편의점’이라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 게이코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 사회를 살아가는 게이코로서 바라볼 때에는 이 소설의 결말은 과히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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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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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즐거움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의도치 않게 미로에 들어섰다가 미로를 빠져나온 쾌감에 다시 미로를 들어갔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 이것이 하자르 사전에 대한 느낌이다.

 신화와 종교, 역사, 우화가 섞인 듯한 하자르 사전의 묘미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의 형식이 정점으로 이끈다. 각각의 이야기가 조금 더 큰 줄기와 맞물리고 그것은 다시 더 큰 줄기 안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줄기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의 즐거움이란. 작가는 독자의 새로운 즐거움에 관대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새로운 독서법을 위한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간단하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 개종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생한 이야기는 1982년의 이스탄불 킹스턴 호텔의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연결지어 보면 이야기의 갈래가 많아서 책을 놓을 틈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민족 자체에 대한 궁금증, 하자르 논쟁 결과에 대한 궁금증, 책 속에 등장하는 꿈사냥꾼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악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촉발은 이렇다. 하자르 민족의 군주가 어느날 꿈을 꾸고 난 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게 꿈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선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한 사람의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책 속에선 어느 종교로 개종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대표들이 자기들 나라의 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들 세 명의 현자들이 꿈에 관한 열띤 해석과 토론을 벌였음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 각각의 대표자의 관점에서 풀어 나간 하자르 개종에 관한 논쟁은 그들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 주장과 사실이 맞물린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하자르 논쟁의 당사자들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서술한 기록자가 다른 이 내용은 하자르 사전이란 이름 아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레드북, 그린북, 옐로북으로 나뉜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사전』이지만 하자르 논쟁이 시작된 후부터 현재까지, 하자르 민족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작가는 처음 편찬자가 누구인지, 하자르 논쟁에 참여한 자, 그것을 기록한 자, 책을 만든 자, 하자르 민족에 대해 연구하는 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여 하자르 사전의 이야기를 재현해 냈다.

  하자르 민족의 언어는 소멸되었으나 하자르 민족은 존재하였다. 그러니 이 사실적인 사건에 작가는 상상력을 곁들여 사전소설로서 모험과 미스터리를 전개시킨다. 아무리 가보지 않은 세계라 한들, 꿈 사냥꾼의 존재나 지옥에서 온 악마나 한두명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실제로 믿기엔 난 너무 커버렸기에 그것을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소설’이라며 놀라워한다. 그럼에도 문득 문득, 작가의 상상력이 실제인 것만 같은 착각을 한다.

  거듭 읽어도 미진한 느낌이 드는 이 퍼즐같은 이야기에 작가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 이 사전이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진다는. 이 복잡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 끝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판본의 차이는 10줄이 채 안되는 문단이라는. 이 서로의 차이가 나타내는 바는 무언가 또한 심오하게 들어가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판본에 대해 독특한 의사를 표함으로써 유쾌하기도 하며 김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하자르는 세 개의 종교를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스페인에서도 세 개의 종교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다. 12세기의 스페인의 코르도바. 이때엔 잠시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조화를 이루었다. 곧 개종과 종교박해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실제의 상황에 더해 모험과 살인 사건이 더해지며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가는 소설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이다. 하자르 사전을 읽으며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이러한 유사성과 그 분위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의 소설에서도 그랬듯 최종적인 승리는 유대교인들의 몫인 모양이다. 최근의 연구는 하자르 민족이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자르 민족의 소멸이 이 개종과도 관계된다고도 한다.

  하자르 사전은 여러 가지로 생각들을 뻗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도.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자르라는 나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종교를 이어가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나타난 하자르인들은 그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랬기에 그 언어가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하자르 민족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하자르 군주는 꿈을 이유로 종교를 선택하려 할 때 일찌감치 제 나라의 종교는 배제시켰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에서 말하는 꿈의 의미는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일 테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책을 읽으며 일찌감치 유대교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꿈 해석에 대한 각 나라의 대표들의 해석을 거듭 읽었다. 하자르 군주는 어디에 끌렸을까, 그가 결정짓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어떤 생각의 갈래들은 너무도 뛰쳐나와서 이 애들을 끌어모아 정리할 새가 없다. 물론 명징한 하나로 귀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자르 사전이 대표적이다. 다만,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외국어를 공부하며 반복해서 뒤적여야 하는 사전처럼, 반복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가의 글쓰기로 인한 새로운 책읽기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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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 풍경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유주환, 문학과지성사, 2014.

 

    한 해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 스펙트럼을 경험하지만 2016년 한 해에 끝자락에 걸린 최고의 단어는 ‘자괴감’일 것이다. 그 자괴감을 아래로 내리고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한국인에게 안겨준 감정은 모멸감이다. 자괴감마저도 모멸감 후에 오는 감정일 테니까. 모멸이 만연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가져다 준 성과라면, 거듭된 모멸의 현장을 맞닥뜨리는 거랄까.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거침없는 모멸의 현장은,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그것을 당연시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저자는 감정이란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 말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멸받지 않는 생을 위한 사회문화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저자는 “감정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를 구상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모멸감의 기본적 속성과 그 감정의 뿌리인 수치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데 수치심이 사회통합과 자아파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욕이 바로 이 수치심의 촉발제이다. 이 모욕이 삶과 인간관계를 왜곡하고 폭력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 저자는 무수히 보여준다.

   이 모멸 만연 사회에 대해 누구나 같은 진단을 내릴 것이다. 한국사회의 경쟁구조. 불균형 시스템, 경제성장을 강조하지만 분배정의는 나 몰라라 하는 사회.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쇠퇴하는, 혹독한 경쟁에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이 그 원인이리라. 저자는 말한다.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경쟁에 민감한 한국인은 그렇기에 모멸을 일상화한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도 모멸감을 준다. 열등한 집단에 대한 범주화, 비인격적 관료제도 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자해고통보, 갑을관계 등등 모욕할 거리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찾아낸다. 무엇마다 ‘충’을 붙이며 비하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저자는 이것이 시민사회와 인권의식의 미성숙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너무도 ‘경제성장’ 위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늘 경제성장을 외치고 기치로 내걸지만, 언제 경제가 정말로 성장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서 늘 인권과 시민사회 문화의 성장에 대해 외면한다. 어쨌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모욕의 실체를 규명하고 모멸감을 성찰하는 언어가 빈곤하다고 말한다.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p64

 

   언어가 생각과 문화를 담아낸다고 할 때 한국 사회에선 무형의 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한국인은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또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과민하다. 과시적이며 인정 욕구 또한 강하다. 심지어 악플 반응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려 한다. 갈수록 만면해지는 개인주의와 인종주의 또한 모멸을 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모멸은 사람을 비하하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조롱과 멸시와 차별과 오해와 동정의 시선속에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해야 한다고 당연히 말하고 중요성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행복한 감정을 영위하고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품위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할 때, 목숨을 걸고 보복하거나 그것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회를 가리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 p210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욕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담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낸 운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습관화된 문화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간의 자존감이 정체성이 사회적 지위와 동급으로 삼는다면 자존심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기에 회복 탄력성이 강한 긍정적 자아존중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행복감을 우월감과 동일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행복강박관념자인 듯 행복에 집착하고 살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타인과 비교한 우월감을 행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불행의 원천이 된다는 것일 인식해야 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p305~306

 

   결국 개인의 노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 하나의 변화로 행복해줄 수 있기도 하다. 자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다 그래 좋다. 그러나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토대속에서 이 행복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더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회다. 그 사회를 만든 것도 개개인의 사람이다. 다시 이 상호관계의 작용을 생각하며 ‘나 혼자’ 만의 변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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