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세계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팻 머피・수전 팰위크・어슐러 K. 르 귄・

파멜라 사전트・히로미 고토・엘리자베스 보나뷔르・켈리 에스크리지・

반다나 싱・캐서린 M. 밸런트・캐롤 엠쉬윌러・안네 리히터・

카린 티드베크・에일린 건・앙헬리카 고로디스체르, 

아작. 2016-09-20.


  페미니즘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차별과 억압에 대한 것이기에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사건은 중요하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는 희망이자 노력이다. 그런데 미래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면, 더 경악스런 일들이 이뤄지고 있다면, 어떤가. 미래의 생활이 어떠할지는 막연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소설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건과 경험 속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과 내면을 부각하고 있다면『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경험을 미래라는 진보된 과학과 접목한다. 이른바 SF 소설이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쓴 글을 묶은 SF 페미니즘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소설이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대체로 70, 80년대 소설이 많다. 그때에 이미 미래의 모습을 상정했는데도 현재에서 느낄 수 있는 여전한 차별과 고정된 인식들이 팽배하다. 도대체 사고의 전이는 어떠한 사건과 맞닥뜨려야만 가능한 걸까.

  이 많은 작가들 중 아는 이름은 어슐러 르 귄이 유일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미래의 상황. 여자들은 모두 현재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이뤄진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의식과 사고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삶 속에서의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의 차별속에 놓인 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 속의 소설들은 기괴한 풍경 속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어슐러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초기 남극탐험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탐험가 모두가 여성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탐험에 관해 자신들을 떠벌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당부한다. 아문센에게는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고! 그가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라고.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안네 리히터의 <식물의 잠>을 읽으면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났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자신을 행성과 식물이라 생각하는 여자가 행성과 식물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이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들의 눈엔 비정상적인,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여성’으로 가두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의 의문과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다.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는 제목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감정에 휘말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함이 가득찼다. <공포>속의 세계는 극단적인 남성지배사회를 그린다. 그 속의 주인공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그들의 에덴에 이브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내에 나갔던 일이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향한 신념도 함께 거둬 간다. 나의 소멸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이 편평한 남성의 형태 안에 여성의 흔적만이 남을 것이다. 어쩌다 나오는 표정, 자세, 감정 따위, 사랑은 재생산과 결별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결합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낼 것이다. 인간의 애정은 유연하니까.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p314~315

 

   수잔 팰위크의 <늑대 여자>는 늑대와 인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을 길들이는 인간 연인은 네 발일 때는 ‘제시’인, 두 발일 때는 ‘스텔라’인 이 여성과 어떻게 함께 할까. 결국엔 파국이 되고 마는 이 관계. 이러한 결말로 이끄는 것은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의 변화다. 늑대 여자의 연인은 제시일 때는 개로, 스텔라일 때는 여성으로 늑대 여자를 착취한다. 물론 사랑으로 보살필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제시가, 스텔라가 그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제시의 말에 스텔라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늑대 여자의 연인은 필요에 의해 제시와 스텔라를 대했고 그리고 필요가 떨어졌을 때 잔인하게 대했다. 늑대여자라는 설정을 빼고 본다면 현실의 남녀관계의 전형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만큼 외적인 테두리의 변화가 남녀 관계의 근본적인 역할과 차별의 상황을 변화시키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별반 현실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의 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래도록 이어온 관습인가, 생물학적인 요인인가. 물론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세계 자체는 극단적이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SF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 아닌가. 현실 자체도 디스토피아가 가득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현실의 상황에서 극단적이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딱히 낯설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이 소설 속 세계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안타까운 것은 책의 제목은 <혁명하는 여자들>인데 그런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 세계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건만,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정복하고 여성들을 위한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는 달라진 사회가 특정 성이 이루는 전쟁같은 승리 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변화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착취당하고 상처받고 억눌리는 그런 모습 속에 여성들은 놓여 있다. 남성들 역시도 현재의 정형화된 남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기에, 이러한 미래 사회를 살아가고 싶지 않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문을 제기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그 방법들을 나누는 것이다. 이 소설 또한 그 역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작가들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작품 또한 수상작인 경우가 많다. 소설의 취향을 떠나서 이 소설의 역할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끊임없는 일깨움이다. 현실 자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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