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안다는 것


바다생물 이름 풀이사전-생명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이름들 

박수현, 지성사, 2008-04-25.


  “집채보다도 더 큰 고래가 헤엄쳐 다닌다는 바다”

  『요람기』속 아이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다엔 거대한 생물들이 살고 있고 고래가 뭍으로 올라와 소원을 가져다주는 구슬을 내밀거라고. 용의 아들 포뢰처럼 고래를 보고 놀라 울지 않고 고래입으로 걸어 들어가 뱃속을 탐험할 거라고 말이다. 물에 빠져 떠밀려간 기억에 깊은 물이면 공포를 느끼면서도 바다 깊은 곳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여전했다. 바다 세계를 탐험하고픈 꿈을 늘 가진 채 아이는 어른이 되어 뭍으로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나 심해어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거봐, 엄청나게 크잖아! 나를 만나려고 왔나 봐.”

  아니다. 이건 어린 아이의 말이다. 이제 커버린 나는 해안에서 죽거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심해어나 고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와, 저 밍크고래 발견한 사람 좋겠다. 저게 얼마라고?” 그때, 입안에 회를 자근자근 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횟집에서 무심하게 메뉴판을 고르는 어른의 나를 아이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식탁에 놓인 ‘모듬회’ 접시가 아니라 바다를 유영하는 생물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바다생물 이름 풀이 사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듯 펼친 이 책은 그저 바다생물에 관한 정보와 지식만이 아니라 이름에 가득한 신화와 동화적 상상력까지 되살려 주었다. 아이가 꿈꾸었던 바다속 환상을 눈앞에 펼쳐주었다. 고래뱃속을 탐험하고 팠던 것처럼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언젠간 스킨 스쿠버를 해보리라는 꿈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에선 108개의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어류, 연체동물, 절지동물, 자포동물, 극피동물, 포유동물, 해조류, 파충류 등으로 나누어 바다 생물들의 이름과 어원, 생태적 특성 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을 소개하며 낯선 생물들을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선조들이 남긴 어류도감뿐 아니라 많은 문헌에서 어류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지식과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바다세계를 1,900번이 넘게 탐험했다는 저자의 사진을 통해 한번도 본적 없는 화려한 바다생물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떤 생선은 ‘어’자가 어떤 생선은 ‘치’자가 붙는 것이 비늘 유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말미잘, 산호, 해파리, 히드라 같은 생물들을 가시가 있는 세포란 의미의 ‘자포’동물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먹던 홍합이 먼 바다로 나간 배에 딸려 왔던 외래종 진주담치에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들은 해삼과 굴을 바다의 삼, 바다의 우유라고 했는데 현대 과학자들이 실제 그 성분을 추출해낸 것을 보면서 다시금 선조들의 지식과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재밌는 이름도 있다. 나폴레옹 피시와 말미잘이 그렇다. 이 물고기는 농어목 놀래기과에 속하는데 2미터에 200킬로그램이 넘을 정도로 크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획득했을까. 절대 물고기 전쟁의 강자여서가 아니라 외양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물고기가 성장하면서 이마에 혹이 튀어나오는데 이 모양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아서라나.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모자를 닮은 이 물고기는 태평양 지방 원주민들에겐 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어 왔다고도 한다. 말미잘은 정약용의『자산어보』에 따르면 항문을 닮아 미주알이라 표기하고 있다.

  미주알은 ‘구멍을 이루는 창자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에 비유하기 곤란하거나 다소 큰 것을 가리킬 때 ‘말’이라는 접사를 붙였다. 항문을 뜻하는 미주알과 말이 합쳐져 말미주알에서 말미잘로 전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말미잘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어원을 떠올리며 항문을 생각하게 될 텐데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다르다. 서양에서는 이 말미잘을 시아네모네(Sea Anemone)라고 부른단다. 바다의 아네모네라는 뜻이다. 같은 생물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항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봄에 잠깐 피었다 바람에 지는 아네모네’를 생각했다니 얼마나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과 눈이 다른가. 단지 말미잘뿐만이 아니라 바다생물의 이름에는 각 나라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각 나라가 처한 상황과 생물의 유용성에 따라 생물의 이름뿐 아니라 그 생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생물에 인간은 ‘인간’의 시각에서 이름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생물의 특성을 잘 관찰하여 그 특성을 잘 가려내어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하면서도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수많은 포획으로 멸종이 되어가는 생물은 협정을 통해 보호종으로 지정하여 포획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인간 역시도 생존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인류가 지속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 가고 있다. 절대로 ‘창꼬치 증후군’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규칙이나 관습을 고수하는 경향을 창꼬치 증후군이라 한다. 창꼬치가 수족관 유리벽이 있는 줄 모르고 작은 물고기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유리벽을 치워도 변화를 알지 못한 채 물고기를 바라만 보는 데서 붙인 말이라고 한다. 기후변화와 지각변동으로 점점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 이 변화 속에서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의 하나가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름을 알아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그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은 고유한 특성을 해치지 않고 보호·유지하며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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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蟲性)스런 나라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나무옆의자, 2017-06-07.


   이마 위 두 개의 탄알 구멍이 난 채로 발견된 피살자. 이야기는 살인 현장과 피살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연쇄’살인이라는 말이 붙으니 적어도 한건 이상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끝은 있을까. 몇 명의 살인에 ‘성공’하게 되는가. 살인의 동기는 무엇이고, 살인자는 누구이며, 살인자는 잡히는가. 살인이 일어날수록 범인이 누군가에 대한 궁금증은 증가될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되는 책이다.

  살인의 동기는 범인의 입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피살자가 사망한 이유는 범인이 드러났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된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 관해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추측하는 일들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닉네임 저스티스맨의 추리가 가장 설득력을 얻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저스티스맨의 까페는 가입자수 증가와 함께 저스티스맨의 추종자들로 넘쳐난다.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전혀 용의자를 특정치 못하는 경찰들로 인해 저스티스맨의 인기는 더욱 높아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스티스맨이 바로 범인이 아닌가라는 의심 또한 얻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사건이 벌어지고 저스티스맨이 살인 사건의 벌어지게 된 ‘이면’의 사건들을 추리하면 네티즌들이 그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패턴이 반복된다. 연쇄살인의 동기는 대체로 누군가를 ‘마녀사냥’ 당하게 한 가해자라는 특징을 보인다. 술 취해 노상에서 구토와 배면을 한 직장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이, 성폭력 동영상을 유포한 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이 등등. 사건들은 독립적인 듯 하면서 맞물려 흘러간다.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인터넷 폭력의 가해자로 추정하는 만큼, 사람들은 왜 인터넷상에서 이토록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고 무책임하게 타인의 신상을 게시하는가에 대한 저스티스맨의 분석 또한 유의미하다. 소설은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 것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이 무분별한 폭력, 마녀사냥이 되어 가는 인터넷 게시글의 세계를 더욱 조명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혐오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한 자의식 과잉이 뒤틀린 욕망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부당함으로 피해를 본 타인의 삶을 목격했을 때라고 저스티스맨은 주장했다.

그것은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불사르고, 그 감정의 정체를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일방적인 옹호를 칼날처럼 내세우며, 가해자의 원인일 것으로 추축되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자신의 자괴감을 희석하려는 자구책의 전형일 따름이라고, 비열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그는 모질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저스티스맨은 최근 순식간에 인터넷 세상을 뒤흔든 ‘204번 버스’ 또는 ‘맘충’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첫 번째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이른바 ‘오물충’ 사건을 일으킨 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오물충의 만행’이라는 게시물로부터 촉발되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달구고 언론에 나오고 신상이 공개되어 직장을 잃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한 ‘오물충’. ‘204번 버스 또는 맘충’은 또 어떤가. 버스기사가 아이만 내렸다며 울부짖는 엄마를 무시하고 내려주지 않고 내달렸다는 게시물 하나로 촉발된 204번 버스기사에서 맘충 사건으로 번져버린 사건. 며칠째 난리부르스였던 이 사건은 마치 누군가에게 화를 전가하는 형태로 이어져 처음엔 버스기사를 향한 날선 분노에서 다음에는 아이 엄마에게로 그 다음에는 허위·과장된 글을 게시한 목격자에게로 옮겨갔다.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 후에 기억되는 것이라곤 냄비처럼 끓어오르는 사람들의 ‘화’를 쏟을 대상을 찾아가는 모습과 어디든 ‘충충’거리는 글들이었다.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저스티스맨의 분석이 적확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도 모를 테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을 보지 않고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떤 형태로든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졌고 아무리 뜻을 유추하려 해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온갖 비하와 조롱의 언어, 충(蟲).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조사에 따르면 가장 불쾌한 신조어로 ○○충을 꼽았다.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빈번하고 가장 널리 쓰이는 이 단어. 왜 우리는 이토록 인간들에게, 인간들의 행동 하나에 혐오와 멸시 가득한 말들을 붙이고 있는 걸까. 아름답고 살기좋은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을 좀먹으며 이 나라는, 참으로 충성(蟲性)스러운 나라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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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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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임스들

길리아드, 메릴린 로빈슨, 마로니에북스, 2013.


  길리아드를 길+일리아드의 합성어로 생각하며 길에서의 이야기로 느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 느낌과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그 생각을 이어가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길르앗(Gilead)은 요르단 북서부를 가리키고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31장에 ‘길르앗의 향유’와 함께 나온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리라   짐작하게 된다. 이 책에선 화자가 살고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책의 화자는 제임스 목사이며 그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쓴다. 일흔 일곱의 제임스 목사가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아버지가 없이 살아갈 일곱 살 아들에게 남기는 이 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차로 인해 서글픈 감정이 들게 만든다. 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이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편지는 아주 길고 오래 이어진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아들이 살아갈 나날들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진중하다. 작가의 문체 역시 담백하고 마치 시골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집을 떠나 길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어린 존 에임스 목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생을 덤덤하게 얘기한다.

  존 에임스들의 이야기라고도 붙일 수 있을 만큼 길리아드에는 존 에임스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존 에임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존 에임스이며 목사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친구인 보턴 목사는 친구 이름을 붙여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존 에임스들의 생과 갈등이 등장한다. 존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가계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출산 중에, 딸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존 에임스 목사는 오랫동안 홀로 살아오다 노년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을 둔다. 삶이 좀더 건강하게 이어진다면 좋으련만 존 에임스 목사는 점점 기력이 약해져 갈 수 없다.

  존 에임스 목사가 다소 정적으로 느껴진다면 목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좀더 동적이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대로 목사인 집안에 신자와 무신론자와의 갈등, 종교 노선의 갈등이 있다. 존 에임스의 할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예수의 환상을 보고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조부는 남북전쟁 참여를 권하는 설교를 하고 북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며 전쟁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다. 이런 조부와는 달리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라서 갈등이 반복되고 존 에임스의 형은 독일 유학을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길리아드는 존 에임스들의 터전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동료이자 친구인 보턴은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존 에임스 목사에게는 이것이 달갑지 않은데 존 에임스 보턴이 마을에서는 알아주는 문제아로 낙인된 때문이다. 보턴 집안 역시 목사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지속된다. 존 에임스 목사가 이 보턴 부자의 갈등에 개입해 중재하지만 망나니같은 보턴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적인 갈등과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의 이 마음을 무색하게 보턴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노예해방’에 대한 관점과 이어진다면 존 에임스 보턴이 표면적으로 드러낸 갈등 역시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지. 사람들은 목사가 다가가는 걸 보면 얼른 화제를 바꾼단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서재에 찾아와서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삶의 겉모습 속에는 많은 것이 있어. 모두 그걸 알지. 많은 악과 두려움, 죄책감이 있고, 도저히 외로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큰 외로움이 있기도 하단다.


  존 에임스가 목사인 만큼 사람들은 그에게 종교적인 믿음과 영혼의 평안을 얻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가 목사가 묵직하게 앉아 갈등들을 지켜보고 있거나 자신을 찾아와 내면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것이 활동적인 모습과 대비되면서 잘 어울린다. 그 나지막한 영향력이 좀더 단단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가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존 에임스 목사님의 설교도 함께 한다. 곳곳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아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고픈 목사의 마음도 갈등을 지켜보며 갖는 생각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남겨질 아내와 아들에 대한 마음도 편지에는 담겨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오면서 쓸쓸해서 책을 읽은 시기와 나쁜 친구라도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시기가 묘하게 번갈아 나타난 데 감사하지. 살면서 늘 두 감정이 번갈아 나타나지. 인간적인 것들에 굶주리게 되면 책이 들려주는 불운함이나 화려함, 뻔뻔스러움에 끌릴 수도 있단다. 네게 그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만.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언27:7).” 생각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쾌감이 발견되기도 하지. 그것은 아비로서의 지혜다만, 신의 진실이자 내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단다.

  

  이 편지는, 아니 소설은 썩 잘 썼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느낌보다는 할아버지에게 듣는 인생사로 더 다가왔다. 이리저리 생각나는 대로 쓴 편지는 격정적인 토로보다는 조용히 뒤따르는 느낌이 들고 잠깐 딴 생각이 들게끔 해서 글을 놓치는 지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1880년에서 1950년대의 조용한 시골마을의 정경이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사회 역시도 마냥 조용하게 흘러가지 않았겠지만 종교, 신과 믿음에 의지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려 했던 목사의 삶의 노력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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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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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흘러간다.


스톤 다이어리, 캐롤 쉴즈, 2015.


  사람이 태어나서 겪는 대표적인 생활사건이 결혼과 죽음이다. 흔히들 사회적인 어떤 ‘사건’들이 인생을 좌우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기본적인 생활사건에서 인생은 충분하고도 길게,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생활사건 중에서 결혼과 죽음이 차지하는 스트레스 지수도 매우 높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생활사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펼친다. 한 여성의 일대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탄생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1900년대를 살아낸 데이지 굿윌의 인생이야기는 그 시대의 분위기와 느낌과 어우러져 기인 여운과 울림을 더한다. 기나긴 삶의 이야기는 글의 전개방식과 문체의 유려함에 힘입어 쏜살같이 흘러간다. 

  데이지의 탄생은 비극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다. 1905년 캐나다 매니토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데이지는 그래서 아버지와도 헤어져 어린 시절을 보낸다. 너무나 뚱뚱해서 임신한 것을 몰랐던 어머니, 남편도 이웃들도 임신한 여자의 모습들을 그저 어머니의 평소 풍채로 알았기에 아이의 탄생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된다. 데이지의 어머니 머시 스톤의 죽음도 함께 겪기에 그날의 그 모습은 사람들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삶의 변화 요인이 된다. 적어도 이웃 여인 클래런틴 플랫 부인은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며 머시의 딸 데이지를 맡아 기르는 선택을 한다. 플랫 부인이 머시에게 한 말처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이 아닌 데이지와 함께 한다. 비록 데이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을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더 많은 세월이 지나 클래런틴은 데이지의 시어머니가 된다. 더더 많은 세월이 지나 결과적으로는 데이지를 선택하며 떠난 남편을, 며느리인 데이지가 찾아 나서는 운명이기도 하다.


여자의 삶이란 가슴 아래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느끼지 못한다면 양배추 한 접시만도 못한 거라우. 보살필 아이가 있다는 것,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는 것, 그게 사랑이지. 우린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신 앞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을 영원토록 사랑할 거라고 서약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낳은 피붙이라우.


  또다시 생활환경이 바뀌게 된 데이지의 생이다. 태어나서 아버지라 부를 만큼 결코 가까워보지 못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그리고 결혼하고, 결혼식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맞게 되는 미망인의 삶. 1927년 스물 두 살의 데이지는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확고하게 불행의 이미지로 덧씌워진 채 정의된다. 그러니, 데이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제 존재에 대한 의구심으로 뿌리를 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는 것일 게다.


단 하나의 극적인 사건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에 무성했던 엉겅퀴 덤불이 깨끗이 사라질 수 있다니,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보다 갑작스러운 반전이라든가 스릴, 사건을 단순하게 정리하려는 절박함에 가능성을 두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데이지 굿윌 호드의 신혼여행에서 생긴 비극은, 그 반전이 너무나도 괴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한창 뻗어 나가는 인생의 평범한 겉모습을 흐리게 만들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그녀의 인생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것이었다.


  ‘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데이지의 딸은 이런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니, 데이지의 생에선 사랑이 있고 결혼이 있고 출산이 있다. 그렇게 삶은 행복했던 순간도 그렇지 않은 순간도 함께 뒤범벅이며 데이지의 인생을 끌어 왔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데이지의 친구들과 데이지의 자녀와 손주들 역시도 태어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갑작스레 이혼하고 또다른 사랑을 찾고 결혼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생은 누군가와의 만남이 자리하는 부분이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로 인한 상실감이 인생을 지배하는 또다른 감정이기도 하고. 여기 데이지의 아버지 카일러 굿윌이 자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은 아내로 인해 석탑 쌓는 일에 몰두하는 것, 돈을 잘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매그너스 플랫이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며 오랫동안 백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내며 가지는 감정, 남편을 잃은 데이지가 칼럼을 쓰면서 일에 몰두하며 상실을 달래는 시간들.

  먼훗날의 내가 과거를 돌아보듯 삶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어느 날의 기억보다 어떤 사건 중심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고 그 페이지 속에 평범한 웃음과 평온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생을 살고 한 여자가 죽음의 순간에 있다. 그래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언제든 삶의 여정이란 현재가 아닌 순간이면 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여전히 미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어서일까.

 

그녀는 역사적 우연 때문에, 경솔함 때문에, 무지 때문에, 기회와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생에 단 한 번도 다음과 같은 스릴 넘치는 모험을 경험할 수 없었다. 유화, 스키, 항해, 알몸 수영, 에메랄드 보석, 담배, 오랄 섹스, 피어스, 물침대, SF, 포르노 영화, 종교의 무아경, 트러플, 키르슈, 할라피뇨, 베이징 오리, 비엔나, 모스크바, 마드리드, 그룹 세러피, 전신 마사지, 굶주림, 훈장, 견책 등등.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해보고 싶다하면서도 해보지 못한 일들이, 전혀 해보려고 도전해보지 않은 일들이 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스릴 넘치는 모험’에 대한 경험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토록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밑줄을 그어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면 생은 좀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걸까. 글쎄 행복이라는 것도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해 보이기도 하면서 온전히 어떤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인생이란, 뭐든 뒤범벅이라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과 죽음의 순간 돌아보는 행복이란 다를 것이라고, 내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쨌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황홀한 순간들, 살아볼 만한 인생으로 기억될지 어떨지 모르게 내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정말 황홀한 순간들이 있었나요?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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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기라는 현실


데프 보이스-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황금가지, 2017.


  사실 사회가 행하는 배제는 어제도 오늘도 새로울 것 없다. 외면당하는 일까지 척척 이어진다. 그런데 가끔 이 배제가 주목받는 일이 있다. 이번 특수학교 설립 문제처럼 말이다. 달라진 사회분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거에도 장애인 부모들은 무릎 꿇는 일에 익숙했다.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더러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이슈화’ 되지 않았다. 이번엔 무릎 꿇은 부모들의 모습이 보도되어 반응이 일어났고 교육감과 교육부총리는 특수학교 설립 추진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끝난 것은 아니니 또 지역주민의 반대 여론 등 같은 과정이 반복되긴 할 것이다. 무릎 꿇기에 대해 ‘쇼’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쇼를 하게끔 한 이들이야말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되지 않는가.

  어쨌든 ‘특수학교 설립은 정말로 집값을 떨어뜨리나?’와 같은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여겨진다. 그동안은 ‘주민간 마찰이 벌어졌다’ ‘무산됐다’와 같이 단순보도에 그쳤으니까.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일이다.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더라도 ‘도가니’ 속 사건들이 벌어지면 또다시 학교 폐쇄가 치고 나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고 지켜봐야 한다.  

  『데프 보이스』 속 사건도 특수 시설에서 벌어진다. 장애인을 교육하고 재활하는 시설에서 장애아동을 향한 성폭력은 왜 이토록 당연한 일인 것처럼 벌어지는 것일까. 충분히 예상가능하듯 시설장이 사망했고 그 원인은 아동성폭력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또한번 같은 시설의 장이 사망한다. 이 공통의 사망자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케하면서 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 충분히 예상가능하니까.

 『데프 보이스』는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긴 하지만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쩌면 범인의 추적이 아니라 농인의 세계에 대해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수화를 잠깐 배웠지만 제대로 써보지 못해 모두 까먹어 알파벳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만 수화통역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수화통역사의 역할과 장애, 그리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아라이 나오토이다. 그는 오랫동안 경찰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공익 제보자가 됨으로써 경찰서를 그만두게 되어 구직활동에 나선 사십대 이혼남이다. 구직 상담을 받다가 그가 정한 진로는, 수화통역사다. 그는 코다였다. 코다란 농인 부모의 아이를 말한다. 부모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는 듣고 말할 수 있다. 아라이는 수화통역사 일을 하다가 피의자 농인을 위한 법정 통역 의뢰가 들어오면서 사건 속으로 개입한다.

  사건과 그 해결 과정에서 코다들이 느끼는 상처와 의무 그리고 정체성, 농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특히 농인들이 피의자로써 법정에 섰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윽박지르며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편견에 가득찬 생각들과 관료주의적인 시선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갔던가. 수화의 세계에서 언어에 대응한 수화와 전혀 교육받지 않은 경우의 수화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교육이, 배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법정에 선 농인들을 보면서 체감됐다.

  

몇 년 전부터 공식적인 자리나 문서에서는 ‘들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농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들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 혹은 ‘건청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농아인에서 ‘아=말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를 뺀 것은 자신들은 들리지 않지만 말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건청인’이라고 하지 않고 ‘청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농아인이라고 표현했다. 농아인 또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 게 익숙해 있다가 다시금 장애인을 지칭하는 말의 표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Deaf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만 바라보는데 그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을지언정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다가왔다. 다만, 소설 속에서도 나왔듯이 여기에도 여전히 갈등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각자가 주장하고 목표하는 바가 있지만 농인에는 사고나 병으로 인해 들리지 않게 된 사람은 배제한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힘든 세상에 맞서 싸워가는 방식이긴 하겠지만, 서로 간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아라이는 딱히 신념이 강한 것도 열정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문많고 자신이 코다라는 사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오로지 현실적인, 그러니까 생계로서 수화통역사를 한다. 그가 수화통역사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져 가는 것도 눈에 띈다. 범인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사건을 처리해가는 방식은 달랐다.

  “욕을 하시면 듣고, 모욕을 주면 받겠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장애아 학부모의 목소리를 우리는 잘 듣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는 이가 있는가. 이번에는 학부모들의 무릎이 수화통역사의 역할처럼 다른 주민들의 마음에 전달되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살아가는 일, 이 속에 가득 쌓인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열게 해줄 통역이 더 많았으면 하는, 그러나 무릎 꿇기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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