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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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삶의 문제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최근 상당히 의아함을 자아내는 두 일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갑작스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실시간에 올랐다. 사람들이 이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검색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군가 관련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얼마만큼 알까. 이때의 단어는 사전상의 의미일까, 인터넷에 회자되며 부정적 의미를 가득 담은 의미일까. 이런 궁금증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될 때마다 궁금해졌다.

  실시간 검색어는 한 연예인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 일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뜬금없는’ 선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이 선언에서 중요한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기에 나름 대단한 걸이란 생각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람의 언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담배피는 사진을 올리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기에 그 이유와 연관성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며 자신으로 인해 “페미니스트임을 당당히 밝히는 여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선 사실, 경악했다. 논란이 일자 “'여성스럽게 입는다”, “남성적이게 운전을 한다”라는 말을 한 것과 페미니스트 발언에 대해 경솔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페미니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주창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요즘 한창 떠들썩한 김광석 부인의 발언이다. “이런 나라에요? 여자를 보호하지 않는 나라입니까?” 흔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대표가 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저런 ‘불리할 때만 여자냐’라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저 발언에 또한 경악했다.

  여성이며 페미니즘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나로선 이로 인해 생겨날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염려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력, 실천력과 관계된다. 페미니즘 또한 하나의 운동이기에 이를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을 일으켜 줘야 할 텐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행동하지 못했다면 ‘길가다 다친 사람을 도와줬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적어도 내 부족을 자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때론 소극적 저항에 머물며 스스로의 인식전환에만 만족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상당히 의미있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한때 ‘나쁜’을 붙여볼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뜬금없어 보이긴 할 것이고 어쩌면 “새삼스럽긴”이나 “당연한걸”이란 반응이 튀어나올 것도 같다.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나도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좋을 것을, 너무 이론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만큼 부담감이나 거부감없이 이 책은 읽힌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서술되어 그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리고, 재미있다. 대체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용어의 낯섦과 어려움이 가득하다는 걸 생각하면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외국인의 저서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이론의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좀더 대중적이도록 운동으로 한정된 느낌이 들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지 않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면 매사에 일관적이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할까봐 거부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뉴스에서는 도로를 단속하던 경찰이 이유없이 흑인 여성을 세워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경찰은 조롱조의 태도로 일관하다 흑인 여성이 ‘검사’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을 받아들고 무척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흑인+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여주었는데 록산 게이 역시 흑인 여성이다. 그 역시 미국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차별과 편견을 겪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나타난 다양하고 많은 여성혐오와 여성폭력 언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여전히 많은 페미니스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록산 게이가 지적하듯 아직 페미니즘이 헤쳐 가야 할 길은 멀다. 또한 페미니즘 역시 생물로서 존재하기에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분명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주저하거나 특정한 이가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변화는 있겠으나 발전은 없겠다. 변화하되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것이 ‘인신공격’ 같았다 고백했다. 그리고 차츰 록산 게이가 알아간 세상에서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경험해야 했다. 어쩜 필연적인 것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만의 언어를 정립한 록산 게이는 이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다. 이때의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이에 대항해 전혀 흠잡히지 않으려 스스로를 옥죄는 그런 페미니스트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주류로서의 페미니즘과는 다를 지라도, 그 실천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여성이기에 개똥같은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전제에서 행동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흑인 여성으로서 당해온 록산 게이의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인식의 문제이기보다 삶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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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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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저, 갈라파고스, 2009.


  말장난에 혹하지 않으려 했는데, 캠벨, 캠벨을 되뇌며 어느새 나는 포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신맛과 향기가 강한 이 포도를 삼키며 캠벨 또한 그의 생에서 ‘신화’라는 강한 맛과 향기를 좇았고 살아내었구나 싶어 놀랍고 놀라웠다. ‘신화’에 관한한 대표적인 학자인 그의 생애가 신화로 흘러가고 집약되기까지 그가 주장한 영웅의 여정과, 천복을 좇는 삶이 그의 생에 드러나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캠벨의 유년 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상위 중산층에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늘 믿었고 자랑스러워한 듯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캠벨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인디언에 대한 매혹은 어쩌고 이과계 공부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대학 2학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어릴 적 그토록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그의 공부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의 천복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학사와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어릴 적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에 대한 공부를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섭렵하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와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견에 따르자면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1929년, 대공황의 시기였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불황으로 침체된 그 때, 캠벨은 우드스톡의 오두막집에 칩거하며 5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물론, 이 시기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캠벨은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우드스톡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캠벨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였다. 그가 여행을 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 융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그 느낌은 강렬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대학으로 가서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한 상태였고 논문만 쓰면 끝이었지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우드스톡으로 들어갔다고. 그리고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책만 읽었다. 그리고 돈은 없었지만 당시 뉴욕의 큰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있었고 책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다 그랬다고 하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점은 그에게 돈을 재촉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캠벨은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IMF 시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자연스레 부정적인 답이 뒤따른다. 아, 캠벨은 배짱도 운도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아, 내 예술은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우드스톡의 칩거는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끝이 났다. 그는 1934년 이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수로 임용된 후 38년 동안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일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나 그 학교에 가서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제자였던 현대 무용가 진 해드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캠벨이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듯 그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언가 들떠 있는 느낌, 이끌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캠벨이 졸업선물로 그녀에게 슈펭클러의 <서구의 몰락>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캠벨의 아내 진 해드먼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캠벨에 대해 그가 신화에 관한 책을 썼고 대공황의 시기에 실업자로서 우드스톡에 들어가 칩거하며 살던 시절만을 알았을 땐, 나는 그의 성정이 조금은 우울적 기질이 다분한 조용한 학자로서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식 사고방식이 다분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말하면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약간은 난감하지만 쿨함과 유쾌함이 조합된 코믹적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육상 선수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샌님같은 학자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달라질까. 어쨌든 경제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칩거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칩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신념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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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그레이드 또는 리셋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7-05-15.


  그런 것도 같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되려 한다. 스스로 창조해낸 ‘신’이 되고자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규율을 쫓으며 ‘영원’히 살아갈 세상을 꿈꾸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 담고 있다.

   이야기를 창조하고 허구와 신화를 창조하며 협력한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기술로 기아, 역병, 전쟁까지 해결한 이후에는 이제 정복할 것은 신의 창조영역이다. 신은 창조되었는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지, 무엇을 믿든 간에 불멸, 행복, 신성을 갖고자 하는 인간을 유발 하라리는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라 명명했다. 그리고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신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비과학적인 말 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성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할 때 그 신은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보다는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천신들을 말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제우스와 인타라처럼 약점, 꼬인 구속,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과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신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인간성’이 아닐까. ‘신성’을 염원하면서 ‘인간성’ 가득한 신의 능력을 얻고자 한다는 말은 뭔가 어불성설인 듯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 두 신들의 차이를 말하라면 그렇다. 하긴 하나는 종교화되었고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차이이긴 하겠다. 종교혁명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얻은 것이라는 말은 의미있게 들리긴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종교적인 지배가 절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 때문에도 고통받는 존재들이 있다. 신의 사랑은, 그들에게는 가닿지 않는 모양이다. 인간이 신이 된다면 달라질까.

  유발 하라리의 글은 요즘의 트렌드에 맞게 감각적으로 기술된다. 비슷한 분야의 제레미 다이아몬드와는 또다른 느낌인데, 둘 다 술술 읽히긴 하는데 왜인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재미를 느낀다. 아마도 문화인류학자로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펼쳐놓는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하라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상상하기 싫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하라리의 글에 대한 집중도 약해진다. 힘있게 서술하던 처음과는 달리 그의 글 또한 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같다. 그가 그리는 ‘될 것이다’의 세계는 부분 이뤄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니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점을 잡아야 할 인류의 미래는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일 것이다. 어쩌면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 어쩌면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는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과학문명이 여기서 멈추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업그레이드 했다가 오류를 발견하면 다운그레이드 하건 리셋하는 것처럼 이 문명의 행운이 더 이상 운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말이다. 과학이 제시하는 미래가 암울한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을 이용, 활용하는 이의 결정에 미래가 놓여 있다는 것이 암울한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집단의 협력으로 종을 유지해 왔다. 절대적인 믿음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각각의 다른 믿음들을 이끌어 온 존재가 있었다. 여전히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부여도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인간을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게 된다.

  “가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인간 개개인이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과 행동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내 생각과 행동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급격히 심각해진다.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신이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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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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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뒷담화론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진정 탁월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MB부대들이 연이어 검찰 출두하는 모습을 본다. 새삼, ‘인간도 아닌’이라는 욕들이 무색해진다. 이렇게 MB를 호모 사피엔스로 등극하게 한(?) 이론을 펼친 유발 하라리는 얼마 전 TV 강연에도 등장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가 동일종의 직선계보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람들의 이런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적어도 여섯 종 이상의 인간 종이 존재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종만이 살아남아 있는가. 저자는 이것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움직여간 모든 곳에 ‘멸종’이 있었다. 그렇다. 호모 사피엔스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잘못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MB가 벌인 행태와 유사하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야기다. 허구를 만드는 능력. 상상력. 저자는 사피엔스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바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허구적인 이야기를 동일하게 믿는 한 사람들은 그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다. 이를 통해 유연한 협력을 함으로써 인류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나쁜 쪽으로 활용할 때 나쁜 것이 되고 좋은 것으로 사용한다면 좋은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 중 누군가는 이것을 좀더 나쁜 쪽으로 활용했고 그런 무리들이 되어 그들만의 사회를 유지시켰다. 이런 활용이 지속적인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가고 있는 중이고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좋은 상상력을 활용해나가고 있다. 인류 문명의 진화로 제시한 세 가지 혁명,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을 거쳐 과학혁명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단계를 거치며 인간은 행복해지고 있는가.

  홀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문명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과거의 모습들을 마치 직접 겪은듯 향수에 젖어 돌아보게도 되는데 수렵채집인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이라니! 정착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인구, 노동시간, 전염병이 급격히 증가해 간다. 오늘날의 삶이 이 농업혁명기의 삶이 모태인듯 보이며 수렵채집인의 삶이 ‘이상적’으로 보인다. 진정 꿈꾸는 삶인 것마냥 느껴지는데 저자는 바로, 지적한다. 그 시대라고 풍요사회일 수만은 없노라고. 하지만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관점은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는 입장에선 참 자조적으로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어디 그뿐인가. 미래도 마냥 낙관적이진 않다. 과학기술은 질병을 치료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하게끔 해왔지만 과연 이런 기술의 진보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을 것인가. 오랫동안 혁명의 혜택이란 항상 권력자들, 가진 자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한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니 발전된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뿐. 또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유전공학의 세계는 경이롭기도 하지만 무서움을 준다. 역시나 그것 자체로는 어떤 선악을 판단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이용할 수 있는 누군가의 ‘욕망’과 ‘의도’에 인류 전체의 행복 또한 달려 있을지 모른다. 뒷담화론과 이 과학기술혁명에 필수적으로 윤리가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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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너는 내 소유물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황금가지,.


  “너는 내 소유물”

  여기 소유물인 여자들의 세상이 있다. 남자의 소유물로 이름마저도 삭제당한 ‘of‘의 세계. 1985년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길리아드 공화국 속 이들 여성을 일컬어 ’시녀‘라고 했다. 소설은 시녀 중 하나인 오브프레드가 전하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그녀의 바람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되지 않은 채 2017년에도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소유물.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칠십 넘은 그룹 회장의 말이다. 회장은 ‘튄’ 것인지 외국에 있다 한다. 피해 여성이 합의금으로 100억을 요구했다는 얘기에 여성을 꽃뱀이라는 댓글들도 있다.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 문장이 눈에 띄어 “시녀이야기”속 남자들의 소유물이 된 무수한 시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미국 드라마 부문 에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는 기사까지 있다. 얼마 전엔 마거릿 애트우드가 올해도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이쯤되면 오늘은 자동적으로 ‘시녀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잘 설계된 날인 듯하다.

  소유물이라. 어쩌면 저런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 이 소설이 쓰여지고 지금에도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길리아드 공화국을 잘 살펴보자.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 굳이 미래사회라거나 가상사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야기는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배경이 아주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병과 생화학무기, 원자로 사고,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불임의 시대, 인구가 급감하자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길리아드 공화국을 건설했다. 성경과 가부장제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목표는 인구증가로 출산을 국가에서 통제한다. 그런 출산의 역할을 ‘시녀’들이 맡는다. 먼 나라라니, 불과 얼마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출산지도를 작성했다. 지역별 가임여성수를 작성하여 게시하며 저출산의 원인이 여성들인 양, 그것이 저출산 극복의 해결책인 양 한 것이 1년이 되지 않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집권한 이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전력도 있느니만큼 왜인지 이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 페미니즘과 젠더폭력도 실시간에 얼마나 오르내렸는가.

  출산의 도구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는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으면 ‘콜로니’라 불리는 독극물,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폐기된다. 빨간 옷을 입고 하얀 두건을 쓰고 자궁이라는 도구를 쓰기 위해 사령관이라 불리는 고위층 부부에게 할당된다. 이들 시녀들을 감시하는 것은 같은 여성집단이고 그들 역시 ‘자궁’의 활용 여부에 따라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시녀’를 동경하는 ‘하녀’들이나 ‘폐기대상’들도 존재한다. 오브프레드가 추구하는 ‘사랑’은 간과되는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배사상인 성경과 가부장제. 과연 통치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한 그들 또한 이 세계에 만족하는가. 우습게도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통제와 감시속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가부장제의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길리아드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다. 시녀 재닌이 열 네 살 때 집단 강간당하고 낙태를 해야 했던 경험을 간증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었지요? 헬레나 ‘아주머니’가 통통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한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제창한다.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구지요? 헬레나 ‘아주머니’는 우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하느님께서 허락하는 걸까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끔찍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어떤 이들의 논리가 저렇지 않던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이다.

  오브프레드와 이전의 오브프레드와 또 그 이전의 오브프레드가 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오브프레드가 오브글렌이 오브워렌이 존재하는 길리아드 공화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너는 내 소유물”이라 말하는 수많은 프레드와 글렌과 워렌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이들은 그들의 통치방식을 과거에서 배워 사용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이전의 통치방식들을 모방할 것이다. 독재, 전체주의란 늘 그런 것들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 뭔가 그런 것에만 강하게 반응하는 화학물질을 투여한 것만 같다.

  이 소설 속 세계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이의 반응이란 말인가. 어느 지역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믿을 이야기다. 시녀로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에가 겪은 일들은 무수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극적’인 느낌이 덜한 건 이미 이 세계 자체가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브프레드가 과거 회상으로 덤덤하게 그 이야기들을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 당연 혁명 세력이 없을 리가. 오브프레드는 열성적인 혁명세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이 체제에 순응해가는 인물이 되어 간다.

  가상과 과학과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어슐러 K.르귄과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들 소설들 모두 가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는데도 어쩜 이토록 현실적일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답은 정해져 있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인 오브프레드의 수동성과 여성연대이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함께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체제 순응적인 여성. 그 시대를 기록했다는 것으로 오브프레드의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보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외치는 ‘사랑’이 상당히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그렇게 볼 때 여성연대, 그들간의 결속력이 약한 것도 여성들 스스로를 감시하게끔, 서로를 질투하게끔 한 체제에 순응한 오브프레드와 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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