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너는 내 소유물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황금가지,.


  “너는 내 소유물”

  여기 소유물인 여자들의 세상이 있다. 남자의 소유물로 이름마저도 삭제당한 ‘of‘의 세계. 1985년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길리아드 공화국 속 이들 여성을 일컬어 ’시녀‘라고 했다. 소설은 시녀 중 하나인 오브프레드가 전하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그녀의 바람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되지 않은 채 2017년에도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소유물.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칠십 넘은 그룹 회장의 말이다. 회장은 ‘튄’ 것인지 외국에 있다 한다. 피해 여성이 합의금으로 100억을 요구했다는 얘기에 여성을 꽃뱀이라는 댓글들도 있다.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 문장이 눈에 띄어 “시녀이야기”속 남자들의 소유물이 된 무수한 시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미국 드라마 부문 에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는 기사까지 있다. 얼마 전엔 마거릿 애트우드가 올해도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이쯤되면 오늘은 자동적으로 ‘시녀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잘 설계된 날인 듯하다.

  소유물이라. 어쩌면 저런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 이 소설이 쓰여지고 지금에도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길리아드 공화국을 잘 살펴보자.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 굳이 미래사회라거나 가상사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야기는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배경이 아주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병과 생화학무기, 원자로 사고,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불임의 시대, 인구가 급감하자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길리아드 공화국을 건설했다. 성경과 가부장제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목표는 인구증가로 출산을 국가에서 통제한다. 그런 출산의 역할을 ‘시녀’들이 맡는다. 먼 나라라니, 불과 얼마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출산지도를 작성했다. 지역별 가임여성수를 작성하여 게시하며 저출산의 원인이 여성들인 양, 그것이 저출산 극복의 해결책인 양 한 것이 1년이 되지 않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집권한 이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전력도 있느니만큼 왜인지 이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 페미니즘과 젠더폭력도 실시간에 얼마나 오르내렸는가.

  출산의 도구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는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으면 ‘콜로니’라 불리는 독극물,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폐기된다. 빨간 옷을 입고 하얀 두건을 쓰고 자궁이라는 도구를 쓰기 위해 사령관이라 불리는 고위층 부부에게 할당된다. 이들 시녀들을 감시하는 것은 같은 여성집단이고 그들 역시 ‘자궁’의 활용 여부에 따라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시녀’를 동경하는 ‘하녀’들이나 ‘폐기대상’들도 존재한다. 오브프레드가 추구하는 ‘사랑’은 간과되는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배사상인 성경과 가부장제. 과연 통치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한 그들 또한 이 세계에 만족하는가. 우습게도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통제와 감시속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가부장제의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길리아드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다. 시녀 재닌이 열 네 살 때 집단 강간당하고 낙태를 해야 했던 경험을 간증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었지요? 헬레나 ‘아주머니’가 통통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한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제창한다.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구지요? 헬레나 ‘아주머니’는 우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하느님께서 허락하는 걸까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끔찍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어떤 이들의 논리가 저렇지 않던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이다.

  오브프레드와 이전의 오브프레드와 또 그 이전의 오브프레드가 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오브프레드가 오브글렌이 오브워렌이 존재하는 길리아드 공화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너는 내 소유물”이라 말하는 수많은 프레드와 글렌과 워렌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이들은 그들의 통치방식을 과거에서 배워 사용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이전의 통치방식들을 모방할 것이다. 독재, 전체주의란 늘 그런 것들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 뭔가 그런 것에만 강하게 반응하는 화학물질을 투여한 것만 같다.

  이 소설 속 세계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이의 반응이란 말인가. 어느 지역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믿을 이야기다. 시녀로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에가 겪은 일들은 무수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극적’인 느낌이 덜한 건 이미 이 세계 자체가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브프레드가 과거 회상으로 덤덤하게 그 이야기들을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 당연 혁명 세력이 없을 리가. 오브프레드는 열성적인 혁명세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이 체제에 순응해가는 인물이 되어 간다.

  가상과 과학과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어슐러 K.르귄과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들 소설들 모두 가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는데도 어쩜 이토록 현실적일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답은 정해져 있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인 오브프레드의 수동성과 여성연대이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함께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체제 순응적인 여성. 그 시대를 기록했다는 것으로 오브프레드의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보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외치는 ‘사랑’이 상당히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그렇게 볼 때 여성연대, 그들간의 결속력이 약한 것도 여성들 스스로를 감시하게끔, 서로를 질투하게끔 한 체제에 순응한 오브프레드와 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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