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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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저, 갈라파고스, 2009.


  말장난에 혹하지 않으려 했는데, 캠벨, 캠벨을 되뇌며 어느새 나는 포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신맛과 향기가 강한 이 포도를 삼키며 캠벨 또한 그의 생에서 ‘신화’라는 강한 맛과 향기를 좇았고 살아내었구나 싶어 놀랍고 놀라웠다. ‘신화’에 관한한 대표적인 학자인 그의 생애가 신화로 흘러가고 집약되기까지 그가 주장한 영웅의 여정과, 천복을 좇는 삶이 그의 생에 드러나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캠벨의 유년 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상위 중산층에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늘 믿었고 자랑스러워한 듯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캠벨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인디언에 대한 매혹은 어쩌고 이과계 공부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대학 2학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어릴 적 그토록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그의 공부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의 천복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학사와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어릴 적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에 대한 공부를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섭렵하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와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견에 따르자면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1929년, 대공황의 시기였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불황으로 침체된 그 때, 캠벨은 우드스톡의 오두막집에 칩거하며 5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물론, 이 시기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캠벨은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우드스톡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캠벨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였다. 그가 여행을 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 융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그 느낌은 강렬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대학으로 가서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한 상태였고 논문만 쓰면 끝이었지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우드스톡으로 들어갔다고. 그리고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책만 읽었다. 그리고 돈은 없었지만 당시 뉴욕의 큰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있었고 책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다 그랬다고 하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점은 그에게 돈을 재촉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캠벨은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IMF 시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자연스레 부정적인 답이 뒤따른다. 아, 캠벨은 배짱도 운도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아, 내 예술은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우드스톡의 칩거는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끝이 났다. 그는 1934년 이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수로 임용된 후 38년 동안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일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나 그 학교에 가서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제자였던 현대 무용가 진 해드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캠벨이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듯 그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언가 들떠 있는 느낌, 이끌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캠벨이 졸업선물로 그녀에게 슈펭클러의 <서구의 몰락>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캠벨의 아내 진 해드먼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캠벨에 대해 그가 신화에 관한 책을 썼고 대공황의 시기에 실업자로서 우드스톡에 들어가 칩거하며 살던 시절만을 알았을 땐, 나는 그의 성정이 조금은 우울적 기질이 다분한 조용한 학자로서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식 사고방식이 다분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말하면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약간은 난감하지만 쿨함과 유쾌함이 조합된 코믹적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육상 선수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샌님같은 학자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달라질까. 어쨌든 경제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칩거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칩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신념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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