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4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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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금술


스페인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송병선 옮김, 열린책들, 2012.


  스페인에 관한 책들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스페인은 돈끼호테, 산티아고, 그리고 카탈로니아 찬가 스페인 내전으로 기억되는 나라였다. 하고 많은 스페인에 관한 이미지 중에 하필  스페인 내전이 혁명이 각인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가지 이미지가 너무 부조화스럽다가 또 한없이 어울리는 조합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만큼 스페인 내전이 각인된 사람들은 많은 것 같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1930년대의 스페인은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단연코 단골이다.

  스페인 여행의 기록을 쓴 이 책에서도 스페인 내전에 관하여 담고 있다. 스페인을 내전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스페인이라는 도시 곳곳에 스민 자체의 매력과 수많은 예술가들이 남긴 예술품과 그들의 자취가 억울하다고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의 창작혼 또한 스페인의 역사와 이 내전에서 발현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대의 예술품에도 그들의 생애에서도 스페인 내전을 쉽게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곳, 스페인. 이 세 문화가 어울려지고 또한 각각의 특징을 내세우며 스페인이 흘러왔듯이 스페인 내전에도 수많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어떤 전쟁에서도 명백한 선악이란 구분되지 않듯이 스페인 내전에도 수많은 명분과 이유와 소망들이 혼재되어 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해서는 역사책에나 ‘권위있는’ 이의 입을 통해서 정의되는 형태로 기억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모든 전쟁의 속살은 들여다보면 비참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무엇이, 누가 더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하면서 전쟁은 반복되어 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라 칭해지는 프랑코의 편에 있었다. 이것으로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호감있는 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권위있는 자’로 보는 이들에게는 한두번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일방적인 구분이 아니라 조금 더 나쁜 자라거나 복잡하고 얽힌 상황에 대해, 그가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절망으로 몰고 가오. 이 모든 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하시오? 절반은 기독교를 믿고 나머지 절반은 레닌을 믿는 것이란 말이오? 아니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니오! 들어 보시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 보시오. 이 모든 것은 바로 스페인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오. 아무것도……, 아무것도 믿지 않소! 그들은 <데스페라도>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언어도 이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갖고 있지 않소. 왜냐하면 스페인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데스페라도>는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하오. 그들은 아무것도 안 믿는 사람들이오. 그리고 믿지 않기 때문에 거친 분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오.


  이 문단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스페인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것이나 전쟁을 겪은 것이나 절대적 신념이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배려와 존중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았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거친 분노가 어떤 상황에서 일괄적으로 움직여지느냐는 또한 신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무언가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여행은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시간이 흘러 스페인 내전이 뚫고간 이곳을 다시 방문했고 전쟁을 겪은 스페인의 모습을 덧붙였다. 스페인에 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선은 수없이 회자되고 인용되었고 그가 묘사한 스페인의 모습을 보면 달리 더 표현할 말이 떠오르진 않는다. 스페인 곳곳을 둘러보지만 일반적인 여행의 기록이라기엔 도시의 랜드마크에 대한 소소한 감상은 물러둔 채 사색적이면서 재미있는 시각을 덧붙인다. 그러니 좋다. 관광책자엔 반딱반딱한 스페인의 랜드마크들이 나열되고 있으니 경험해보지 못한 1930년대 스페인의 분위기를 그때 그곳에서 느낀 누군가의 감성을 읽는 것은 실망할 생각을 주지 않는다. 실망이란 말이 딱 맞는 것은 관광 책자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동원된 글과 사진발을 보고 난 뒤에야 오는 것이니까.

 

여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오만한 자아를 인간이라는 고통 받는 편력 군대 속으로 던져 담금질하여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만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행 후 기록을 남긴 적은 없지만 심지어 찰칵 사진 하나도 제대로 찍지 않았기에 내 영혼이 부드러워질 기회를 놓친 지난날들이 문득 아쉬워졌다. 하긴 좋다, 나쁘다, 맛있다, 맛없다, 별로다 이런 글을 쓸 거라면 굳이 기록할 필요가. 감흥은 가득찬데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말들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로 달랜다. 스페인 내전 전후의 그의 글의 느낌처럼 그의 글을 보고 또 보고 스페인을 생각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그럴 때면 이것은 내 느낌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느낌인가 구분하려 애를 쓰게 된다. 우습게도.


툴레도는 엘 그레코의 정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 마음속에 나타났다. 한쪽은 빛이 관통하고 있고 다른 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어느 비잔티움의 신비주의자가 말했듯이, 냉담이 아닌 하느님의 광기의 출발점이며,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적인 노력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툴레도는 엘 그레코가 유명하고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저자 역시도 이런 툴레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스페인 전쟁 전후에 툴레도에 대해 쓴 글은 차이가 있다.


툴레도는 격렬하고 고동치는 모습들로 가득하고, 모든 희망을 잃은 높고 거대한 벽으로 가득한 엘 그레코의 캔버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덧없이 사라지는 그림자들이 서로 속이듯이 움직이면서 이 도시의 건축물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너무나 마술적인 장면이어서 그곳을 떠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재앙을 향한 충동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약탈된 도시의 광경을 야만적인 기쁨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툴레도는 자신에게 맞게 사납고 모질어졌다. 그래서 마침내 호전적이고 용맹한 정신에 걸맞은 육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또 음미하며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수로 정제시키려는 마음의 연금술이 이 책에 담겼다. 읽을수록 저자가 스페인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너머 인간 영혼의 정화를 찾고자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더구나 스페인 전쟁을 겪은 후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달리 『영혼의 자서전』을 쓴 작가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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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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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랴찌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병훈 저, 한길사, 2007.12.15.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는 러시아문학에서 시작했다.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겠다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러시아문학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러시아에 대해서도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체호프, 뚜르게네프, 고골, 바흐찐, 푸시킨, 파스테르나크… 이들 덕분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가를, 수많은 혁명가를, 수많은 민중을 품고 있다. 냉기가득할 것만 같은 모스끄바는 이들 생생한 인물들의 힘으로 좀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우수에 깃든 도시로 각인된다.


모스끄바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정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다. 모스끄바는 러시아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예술가들은 모스끄바를 수없이 찬양하고 숭배해왔다. 그들은 모스끄바를 러시아 영혼의 성지라고 여겨왔다.


  러시아인에게 마음의 성지이자 영혼의 고향이라는 모스끄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가고픈 열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대체하고 몇계절이 흘렀다. 어느 도시나 고유한 속도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러시아는 커다란 나라이고 모스끄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속도는 달랐다. 같은 러시아라고 해서 모스끄바가 아닌 곳에서 모스끄바를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전체에 대한, 모스끄바에 대한 책들만을 잔뜩 읽고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했으니 그곳에선 레닌이 있을지언정 도스또예프스키며 똘스또이며 이런 예술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의 자취는 묻어났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모스끄바를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책 속에 있다. 러시아 문학가들만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여름과 겨울에 러시아의 모스끄바와 인근을 여행하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걸어서 멀리 이동하여 그들이 직접 살았던 장소를 찾는 여정은 그 풍광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다르다. 특히 저자는 모스끄바 내 박물관, 미술관, 인근 지역을 겨울의 풍경 속에서 거닐었다면 똘스또이가 살던 곳, 뿌쉬낀이 러시아의 파르나소스라고 불렀던 아스따피예보, 러시아 문학의 성지라고 불리는 뽈라냐, 체호프 문학이 깃든 멜리호보, 바쩨르나크의 집 등을 여름에 거닐었다.

  모스끄바 강의 여름을 느끼면서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 길을 잃는 저자의 동선을 따라 같이 아득함을 느끼면서 러시아의 여름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문학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쫓는 여정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왜인지 러시아의 모스끄바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겹쳐져서 더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고 깊으며 설레면서 애잔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모스끄바의 여름과 겨울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싶으면서 이토록 러시아에서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서구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러시아, 모스끄바를 찾았던 것이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예술혼이라는 것이 자유스러울 때 절정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절정의 혼이 발현된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러시아라는 모스끄바라는 도시가 예술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칫하다가는 위축되기도 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발을 걸어도 대문호라 칭송받는 이들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마감될 것 같고 또 언뜻 그들과 비교하느라 마냥 위축될 수도. 아니 예술가라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좀더 진취적으로 청출어람의 예술혼이 이루어지려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게을러진데다 겨울이라 더더욱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굴랴찌’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문다고 한다. 굴랴찌! 이것은 산책하다라는 말이다. 내게도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이긴 하다. 그러다 보면 나의 정체성도 확립되어지려나. 수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문학으로 회귀하여 러시아문학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특성이 아무리 깃들어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분위기가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작가에 대한 선호도를 물리치고는 여전히 문학은 러시아!라는 말이 깃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러시아의 굴랴찌 문화가 어떻게 그들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굴랴찌를 한다. 뿌쉬낀, 고골, 도스또예프스끼,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부닌의 주인공들을 보라. 예브게니 오네긴, 아까기 아까끼예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바자로프, 레빈, 아르세니예프 등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들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굴랴찌 문화의 산물이다.

 

  깊은 밤과 매서운 추위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장편소설을 깊은 밤 내내 읽지 않았겠냐며 러시아 문학에 대해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수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굴랴찌를 생각하며 그 주인공들과 소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굴랴찌’ 였구나! 싶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아열대기후인 미국 플로리다에는 이구아나와 바다거북이 얼어서 기절하고 있는 때다. 다행인지 2018년 1월의 대한민국은 눈도 내리지 않고 강추위라고 불리기엔 미적하다. 책속으로의 굴랴찌가 아니라 진짜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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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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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은, 무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김화영 예술기행, 문학동네, 2012.


  저자가 만난 성은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문이 활짝 열려지지 않을 때의 성이다. 안개가 어슴프레 끼어 있고 시선에는 보이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물러앉아 있는 성. 관광안내 책자에서 보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광택이 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만나온 저자의 이 책은, 성(城)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포장된, 깔끔한, 생기없는 모습이 아니라 서글프고 애잔한 모습이다. 보일듯 말듯, 울창한 나무에 가리워져 있거나 시간이 내린 빛깔의 흐름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안내하는 성을 둘러보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성의 주인들이 고개를 내밀듯하다. 어떤 이는 차한잔 해도 좋다고 기꺼이 성의 방문을 허락하고 어떤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라며 눈앞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릴 것도 같다. 아예 성문을 굳게 닫고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을 곳도 있을 듯하다.

  가보지 못한 많은 성들이 가진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문학에 등장하는 성, 실존 인물이 살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이 더해지고 분명 낯선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문학같은 문체에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오래 시간이 쌓아올린 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더구나 저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변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자신 또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변화와 공간의 접촉에서 여행을 실감한다고. 그렇기에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보다는 저녁밥을 지을 때쯤 동네에 피어나는 땔감의 온기처럼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하루가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나 웃긴 것이 저자가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감상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인도기행 같은 경우에는 좀더 경쾌한 발놀림과 호기심같은 게 있긴 하다. 아님 단체여행에서 오는 긴박감이거나.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프랑스의 성들을 만나 성에 살았던 주인들을 불러낸다. 성이 가진 특권일까, 살았던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네 집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만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성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성 모두에 인간이 살았지만 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각기 다르다. 성 자체가 품고 있는 특색 또한 달라서 성이라는 명사에 성의 이름이 곁들여지며 명백한 고유명사로서 위풍을 달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새삼 확인했고 역시 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은 유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왜인이 한이 서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 성 하나하나는 넘쳐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파리의 또 하나의 성을 소개한다. 바로 페르 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향 메닐몽탕 가에 위치한 이 묘지는 하나의 도시에 가까우며 수많은 골목길들과 늘어선 대로들이 뻗어 있다 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프루스트, 폴 엘뤼아르, 쇼팽, 뮈세, 코로, 오스카 와일드, 콜레트, 도데,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들, 그리고 파리 코뮌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이곳에 있다. 이 무덤을 돌아보며 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알아보려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무덤이건 무덤은 그 사람 최후의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저 돌문 뒤의 어둠, 한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사자(死者)의 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 닫혀진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어둠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성은, 참다운 성은 그 상상과 그 짐작으로 산 사람이 짓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가장 참다운 성이다. 그 어둠 속으로 난 수많은 보도와 골목길과 지하실……다시 그 지하실 밑으로 망각의 강이 흐른다고 하던가? 


  또한 저자는 개선문과 노트르담 보바리 부인의 배경지를 찾아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비교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번역한 후의 저자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보바리의 삶을 풀어낼 때 소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을 물리고 보바리 부인의 집, 성당, 약국 등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후손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그리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모델로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쉬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굳혀져버린 가족의 일대기는 남은 자에겐 멍에일 터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플로베르나 라마라크나 빅토르 위고 모두 문장력이 탁월하기에 개선문과 노트르담과 마을을 묘사하는 필력이 남다르기에 그들이 소설속에서 그린 언어로 이 건물을 마을을 보는 기분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게 되는 맛이 있다. 눈으로 머물러 말을 잊었을 지 모를 곳이 어쩌면 말로써도 그려진달까.

  동화속에서 공주들이 살았을 성 아니면 유령이 나왔을 성으로만 굳혀졌을 성이 실존인물의 희노애락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정립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살던 성의 모습은 위셰 성이 모델이고 레오나르도가 생의 마지막을 머물다가 간 곳은 프랑스의 클로 뤼셰 성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집이었던 성, 권력자의 애인이었던 이가 머물렀던 성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열어 휘익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을 허락한다. 당연히 그 옛날의 삶이야 느껴볼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정해야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저자는 그곳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을 뿐이고 그곳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다. 역시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찾아가고프다. 관광지이니 더 찾아가기 쉬울 것임은 분명한데도 아직은 시간으로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과 소설들과 인물들의 생애를 더욱 알고난 후에야 그 공간을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고프다는 느낌이 있을 때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터질 것 같은 방랑의 마음을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역시 돈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건 외에도 기질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본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쓴다. 한달 동안 가본 사람은 글을 한편 쓴다. 일년 동안 가본 사람은 중국에 대해 남이 물어보아야만 겨우 대답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중국에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미소짓기만 한다.


   여러 해 프랑스에 살아 돈 사람처럼 그저 미소짓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프랑스에 가보지 않은 채로 리뷰 하나를 썼다. 그럼, 한달 가본 사람처럼 군건가. 정말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들을 쫒아다니다가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다 보면 책한권의 얘기는 거뜬히 나옴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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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마고 -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지음 / 한언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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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이미지


호모 이마고-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한언, 2013.


  세계 최대 ‘항손둥 동굴’(Hang Son Doong Cave)을 보다보니 역시 여행과 탐험에 대한, 베트남 여행에 대한 의지가 생겼다. 동굴을 보기 위해서인데 제한적 허용이라고 하니 기분을 스르륵 가라앉히지만, 생각해보니 동굴 탐험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항손동 동굴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의지도 가라앉혔으니 동굴탐험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졌다가 다시 피어올랐다가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 ‘호모 이마고’다.

  『호모 이마고Homo Imago』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부제를 가지고 동굴을 탐험하고 있다. 항손둥 동굴과 호모 이마고 속에서 다루는 동굴들은 느낌이 다르다. 항손동 동굴이 자연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라면 호모 이마고속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은 저자의 말대로 갤러리같다. 동굴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동굴탐험이라기보다는 동굴 속 이미지를 다룬다. 호모 이마고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왜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삶의 본질 면면을 사유하고, 소유하며, 소통하는 존재이다. 이런 특징은 인류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적 동력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은 내면에 오롯이 떠오르는 생각을 개인가 사회가 가진 문화와 예술적 코드가 내포된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미지는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을 지속해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문화가 속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동일 시공간에서 인간이 만든 메시지를 ‘이미지 코드’로 추출·분석해서 ‘인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저자가 추출한 이미지코드는 문자, 그림 등등 다양하다. 이것을 신화와 종교,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적용해 분석한다. 저자가 대표적인 ‘이미지’ 분석으로 사용한 것이 ‘라스코 동굴벽화’다. 구석기인들이 쇼베 동굴,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 등등에 그린 많은 벽화를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라스코 동굴벽화는 다섯 개의 갤러리로 나누어 생생하게 라스코 동굴벽화를 현재 탐험하듯이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 코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후기구석기인들이 남긴 동일한 동물 이미지를 통해, 지역은 달라도 그들이 가진 감성의 소산에 의해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그 부근에서 주로 서식했던 들소를 그린 것이다.


  후기구석기인들은 벽화를 ‘신성한 곳’ ‘신성한 구조’에 그리고 있다. 후기구석기를 대표하는 동굴의 구조가 여성의 자궁과 같은 구조이며 동굴은 여러 중요한 의식, 사냥꾼이 될 청년의 입문식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의 사냥꾼은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서 입문식과 같은 통과의례를 통해 샤먼이 되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완수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가는 시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그 속에 나타난 건축과 의식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아내면서 동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문화적 현상에 대한 동일한 이미지는 비단 제한된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동일한 하고를 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가진 사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민족이든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고 가더라도 이 지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지구에 형성된 자연환경과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미지를 통해서 구현해낸 생각의 결을 읽고 있으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정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조라고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동일하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한, 인간의 삶을 위해 추구하는 형태가 세밀화되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지금보다 더 머언 미래의 인류가 지금 현재의 인류가 남긴 이미지를 추출해내서 비교분석하면서 그들은 뭐라고 해석을 할지가 궁금해진다. 살기 위해서 이토록 무식하게 버둥거린 인류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려나. 외경심을 가지려나. 그 이전의 인류가 해온 행위들을 통해 살아갈 미래를 위한 방법을 학습한다고 할 때 어느쪽에 무게를 더 두게 될지,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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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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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행복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저, 문학동네, 2011.


  잭 키보키언은 ‘죽음의 의사’로 불린다. 실존인물로 1999년 2급 살인혐의로 8년 2개월간 복역 중 2007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존엄사를 더 이상 방조하지 않겠다”가 가석방 조건이었다. 박사는 1987년 디트로이트 지역 신문에 ‘죽음 상담가’ 광고를 내고 1990∼1998년 약 130명의 존엄사를 도우며 환자와의 상담 장면을 촬영했다. 커트 보니컷은 이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책으로 엮었다. 기자가 된 커트 보니컷이 잭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으로 사후세계 경험을 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의 이야기다.

  인도주의자로서 작가는 인도주의를 “훌륭한 시민정신과 보편적 품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도주의 실천의 한 방법으로 글을 쓰며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사후에 어떻게 되든 우리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기자 커트 보니것이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러한 결론으로 가는가. 커트 보니것은 셰익스피어, 아돌프 히틀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 아이작 뉴턴, 공상과학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인들과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애견을 지키려다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건설 노동자 살바토레 비아지니를 만나서는 개를 위해 죽은 기분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베트남전쟁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오늘 천국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역대 최고의 예지력과 영향력을 갖춘 공상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썼습니다. 그때가 1818년이었으니, 1차 대전이 그로부터 딱 일 세기 후에 일어났군요. 그건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처럼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온갖 발명품이 사용된 전쟁이었습니다.

 나는 메리 셸리가 우리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민간인과 어린이에게 투하한―그리고 또다시 그러겠다고 약속한―원자폭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부모인 윌리엄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남편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그와 그녀의 친구인 존 키츠와 바이런 경에 대해서만 열광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질문만을 할 커트 보니것이 아니다. 비비언 핼리넌이라는 “화려한 태평양 연안 가문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는 화려하다는 뜻을 알아낸다.


이젠 암호가 풀렸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화려하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모가 아름답고 품위있고 부유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비비언의 변호사 남편인 고 빈센트 핼리넌은 부동산 투자에서 번 돈을 짊어지고 1952년에 진보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사람이란,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도 얼마나 익살맞고 귀여워해질 수 있는지요?

이렇게까지 익살맞고 귀여워질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노동운동 지도자 해리 브리지스를 목청 높여 변호했다는 이유로 육 개월 형을 살았습니다. 해리 브리지스는 매카시즘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이었지요. 비비언은 1964년 인권을 옹호하는 시위에서 숙녀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삼십 일 동안 감방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작품을 직접 쓴 게 맞느냐는 질문을 하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궁금한 것을 묻고 그들이 살아 새전에 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켜 묻는다. 단지 그들이 지금 현재 살아 있지 않다 뿐이지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면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죽어서 내세에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득한 짧은 인터뷰를 보면 작가가 선택한 인터뷰이가 성인이나 영웅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히틀러나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죽인 제임스 얼 레이,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을 곡괭이로 죽인 칼라 페이 터커도 있다. 이렇게 스무명이 넘는 인터뷰이들과 인터뷰하면서 위트와 유머들을 동원해 작가는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알렉스 삼촌이 특히 인간 일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점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하다는 걸 도통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삼촌 자신은 즐거울 때 즐겁다는 걸 인정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는 사과나무 그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곤 했다. 알렉스 삼촌은 하던 말을 멈추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나 역시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기쁨이 밀려올 때면 큰 소리로 외친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그러나 역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행복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터뷰 과정에서의 위트와 유머들이 유쾌하게 다가온다. 때론 책을 읽는 순간,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바탕 웃고 또 한바탕 사회모순에 대해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안타깝게도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닥터 잭 키보키언도 훌륭한 인터뷰어 커트 보니컷도 현재에 없다. 사후세계에 있다. 이들을 만나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말들을 듣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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