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굴랴찌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병훈 저, 한길사, 2007.12.15.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는 러시아문학에서 시작했다.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겠다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러시아문학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러시아에 대해서도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체호프, 뚜르게네프, 고골, 바흐찐, 푸시킨, 파스테르나크… 이들 덕분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가를, 수많은 혁명가를, 수많은 민중을 품고 있다. 냉기가득할 것만 같은 모스끄바는 이들 생생한 인물들의 힘으로 좀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우수에 깃든 도시로 각인된다.


모스끄바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정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다. 모스끄바는 러시아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예술가들은 모스끄바를 수없이 찬양하고 숭배해왔다. 그들은 모스끄바를 러시아 영혼의 성지라고 여겨왔다.


  러시아인에게 마음의 성지이자 영혼의 고향이라는 모스끄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가고픈 열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대체하고 몇계절이 흘렀다. 어느 도시나 고유한 속도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러시아는 커다란 나라이고 모스끄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속도는 달랐다. 같은 러시아라고 해서 모스끄바가 아닌 곳에서 모스끄바를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전체에 대한, 모스끄바에 대한 책들만을 잔뜩 읽고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했으니 그곳에선 레닌이 있을지언정 도스또예프스키며 똘스또이며 이런 예술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의 자취는 묻어났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모스끄바를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책 속에 있다. 러시아 문학가들만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여름과 겨울에 러시아의 모스끄바와 인근을 여행하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걸어서 멀리 이동하여 그들이 직접 살았던 장소를 찾는 여정은 그 풍광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다르다. 특히 저자는 모스끄바 내 박물관, 미술관, 인근 지역을 겨울의 풍경 속에서 거닐었다면 똘스또이가 살던 곳, 뿌쉬낀이 러시아의 파르나소스라고 불렀던 아스따피예보, 러시아 문학의 성지라고 불리는 뽈라냐, 체호프 문학이 깃든 멜리호보, 바쩨르나크의 집 등을 여름에 거닐었다.

  모스끄바 강의 여름을 느끼면서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 길을 잃는 저자의 동선을 따라 같이 아득함을 느끼면서 러시아의 여름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문학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쫓는 여정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왜인지 러시아의 모스끄바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겹쳐져서 더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고 깊으며 설레면서 애잔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모스끄바의 여름과 겨울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싶으면서 이토록 러시아에서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서구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러시아, 모스끄바를 찾았던 것이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예술혼이라는 것이 자유스러울 때 절정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절정의 혼이 발현된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러시아라는 모스끄바라는 도시가 예술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칫하다가는 위축되기도 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발을 걸어도 대문호라 칭송받는 이들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마감될 것 같고 또 언뜻 그들과 비교하느라 마냥 위축될 수도. 아니 예술가라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좀더 진취적으로 청출어람의 예술혼이 이루어지려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게을러진데다 겨울이라 더더욱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굴랴찌’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문다고 한다. 굴랴찌! 이것은 산책하다라는 말이다. 내게도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이긴 하다. 그러다 보면 나의 정체성도 확립되어지려나. 수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문학으로 회귀하여 러시아문학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특성이 아무리 깃들어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분위기가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작가에 대한 선호도를 물리치고는 여전히 문학은 러시아!라는 말이 깃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러시아의 굴랴찌 문화가 어떻게 그들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굴랴찌를 한다. 뿌쉬낀, 고골, 도스또예프스끼,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부닌의 주인공들을 보라. 예브게니 오네긴, 아까기 아까끼예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바자로프, 레빈, 아르세니예프 등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들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굴랴찌 문화의 산물이다.

 

  깊은 밤과 매서운 추위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장편소설을 깊은 밤 내내 읽지 않았겠냐며 러시아 문학에 대해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수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굴랴찌를 생각하며 그 주인공들과 소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굴랴찌’ 였구나! 싶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아열대기후인 미국 플로리다에는 이구아나와 바다거북이 얼어서 기절하고 있는 때다. 다행인지 2018년 1월의 대한민국은 눈도 내리지 않고 강추위라고 불리기엔 미적하다. 책속으로의 굴랴찌가 아니라 진짜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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