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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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은, 무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김화영 예술기행, 문학동네, 2012.


  저자가 만난 성은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문이 활짝 열려지지 않을 때의 성이다. 안개가 어슴프레 끼어 있고 시선에는 보이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물러앉아 있는 성. 관광안내 책자에서 보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광택이 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만나온 저자의 이 책은, 성(城)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포장된, 깔끔한, 생기없는 모습이 아니라 서글프고 애잔한 모습이다. 보일듯 말듯, 울창한 나무에 가리워져 있거나 시간이 내린 빛깔의 흐름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안내하는 성을 둘러보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성의 주인들이 고개를 내밀듯하다. 어떤 이는 차한잔 해도 좋다고 기꺼이 성의 방문을 허락하고 어떤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라며 눈앞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릴 것도 같다. 아예 성문을 굳게 닫고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을 곳도 있을 듯하다.

  가보지 못한 많은 성들이 가진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문학에 등장하는 성, 실존 인물이 살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이 더해지고 분명 낯선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문학같은 문체에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오래 시간이 쌓아올린 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더구나 저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변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자신 또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변화와 공간의 접촉에서 여행을 실감한다고. 그렇기에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보다는 저녁밥을 지을 때쯤 동네에 피어나는 땔감의 온기처럼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하루가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나 웃긴 것이 저자가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감상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인도기행 같은 경우에는 좀더 경쾌한 발놀림과 호기심같은 게 있긴 하다. 아님 단체여행에서 오는 긴박감이거나.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프랑스의 성들을 만나 성에 살았던 주인들을 불러낸다. 성이 가진 특권일까, 살았던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네 집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만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성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성 모두에 인간이 살았지만 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각기 다르다. 성 자체가 품고 있는 특색 또한 달라서 성이라는 명사에 성의 이름이 곁들여지며 명백한 고유명사로서 위풍을 달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새삼 확인했고 역시 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은 유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왜인이 한이 서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 성 하나하나는 넘쳐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파리의 또 하나의 성을 소개한다. 바로 페르 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향 메닐몽탕 가에 위치한 이 묘지는 하나의 도시에 가까우며 수많은 골목길들과 늘어선 대로들이 뻗어 있다 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프루스트, 폴 엘뤼아르, 쇼팽, 뮈세, 코로, 오스카 와일드, 콜레트, 도데,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들, 그리고 파리 코뮌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이곳에 있다. 이 무덤을 돌아보며 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알아보려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무덤이건 무덤은 그 사람 최후의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저 돌문 뒤의 어둠, 한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사자(死者)의 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 닫혀진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어둠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성은, 참다운 성은 그 상상과 그 짐작으로 산 사람이 짓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가장 참다운 성이다. 그 어둠 속으로 난 수많은 보도와 골목길과 지하실……다시 그 지하실 밑으로 망각의 강이 흐른다고 하던가? 


  또한 저자는 개선문과 노트르담 보바리 부인의 배경지를 찾아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비교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번역한 후의 저자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보바리의 삶을 풀어낼 때 소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을 물리고 보바리 부인의 집, 성당, 약국 등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후손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그리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모델로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쉬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굳혀져버린 가족의 일대기는 남은 자에겐 멍에일 터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플로베르나 라마라크나 빅토르 위고 모두 문장력이 탁월하기에 개선문과 노트르담과 마을을 묘사하는 필력이 남다르기에 그들이 소설속에서 그린 언어로 이 건물을 마을을 보는 기분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게 되는 맛이 있다. 눈으로 머물러 말을 잊었을 지 모를 곳이 어쩌면 말로써도 그려진달까.

  동화속에서 공주들이 살았을 성 아니면 유령이 나왔을 성으로만 굳혀졌을 성이 실존인물의 희노애락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정립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살던 성의 모습은 위셰 성이 모델이고 레오나르도가 생의 마지막을 머물다가 간 곳은 프랑스의 클로 뤼셰 성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집이었던 성, 권력자의 애인이었던 이가 머물렀던 성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열어 휘익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을 허락한다. 당연히 그 옛날의 삶이야 느껴볼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정해야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저자는 그곳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을 뿐이고 그곳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다. 역시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찾아가고프다. 관광지이니 더 찾아가기 쉬울 것임은 분명한데도 아직은 시간으로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과 소설들과 인물들의 생애를 더욱 알고난 후에야 그 공간을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고프다는 느낌이 있을 때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터질 것 같은 방랑의 마음을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역시 돈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건 외에도 기질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본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쓴다. 한달 동안 가본 사람은 글을 한편 쓴다. 일년 동안 가본 사람은 중국에 대해 남이 물어보아야만 겨우 대답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중국에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미소짓기만 한다.


   여러 해 프랑스에 살아 돈 사람처럼 그저 미소짓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프랑스에 가보지 않은 채로 리뷰 하나를 썼다. 그럼, 한달 가본 사람처럼 군건가. 정말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들을 쫒아다니다가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다 보면 책한권의 얘기는 거뜬히 나옴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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