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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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결말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2018.


  음주와 심신 미약을 이유로 감형되는 사건이 연일 한국 뉴스를 장식한다면 미국에서는 총기사망사건이 그렇다. 백인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을 사살하는 일 역시 높은 통계치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 책은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아이를 사살하는 순간, 그 후의 일을 이야기한다.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의 의미, 총알이 훅 지나가는 시간이 얼만큼인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몇마디 대화가 오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바로, 탕!탕!탕! 총격이 일어난다. 뭐지 할 새도 없이 열여섯 살 아이가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다. 그 바로 옆에 스타가 있었다. 총을 겨눈 경찰에 의해 손을 들어 올려야 하기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친구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채로. 경찰은 칼릴이 무기를 소지했다며 그를 죽인 경찰관이 법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발표한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니 이야기가 매우 간단하지만 이 책은 제법 페이지가 많다. 순식간에 읽혀지는데 내면을 깊숙이 들어가는 심리묘사는 없지만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스타의 가족사는 복잡함에도 그들의 끈끈한 애정이 불안을 이겨내게끔 하는 힘이 되고, 청소년 형제들의 대화가 현실적이라 웃음짓게 한다. 다인종 국가를 정체성으로 하지만 인종차별의 나라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것인지 스타 가족의 입을 빌려 보여준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심어준 분노가 모두를 망가뜨린다(The Hate U Give Little Infants Fucks Everyone)‘의 앞글자만을 보라고. 터그 라이프 THUG LIFE! 폭력배의 삶이잖아. 우리가 어릴 때 사회가 심어준 사상이 우리가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오히려 사회를 공격하게 하는 거야.”


  이 책을 읽고프게 이끈 건 제목이다. 당신이 남긴 증오. 인종차별과 사회부조리를 노래한 힙합가수 Tupac의 말이라고 한다. 폭력배의 삶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스타의 아빠는 총과 마약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청산하려 감옥행을 택하고 자신의 아이들은 빈민가인 가든 하이츠에 있는 학교가 아니라 백인이 다니는 윌리엄슨에서 공부하게끔 한다. 그곳이 제대로 된 교육을 하며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야. 마약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우리 동네를 망가뜨리고 있어.” 아빠가 말했다. “살기 위해선 마약이 필요하다고 하는 브렌다나 살려면 마약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칼릴을 좀 봐. 브렌다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일을 못 구할 거고 일을 못 구하면 재활원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 칼릴이 마약을 팔다 붙잡히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해서 다시 마약을 팔아야 할 수도 있어. 그게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증오란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둔 것. 그게 터그 라이프야.”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든 하이츠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스타는 백인 친구들과의 학교에서의 삶과 생활과 생활터전인 가든 하이츠의 친구들과 삶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삶에는 차이가 확연했다. 백인 친구와 백인 남자친구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한 단절과 균열을 만들어 간다. 친구 칼릴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경찰의 총을 맞게 되는 걸 목격했고 마약상이자 폭력범으로 오인된 채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스타가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한 생각은 강력한 혼란을 주는 요인이자 자신의 정체성과 정의를 각성하는 요인이 된다.

  소설 속에서 스타의 친구들은, 가든 하이츠의 아이들은 갱단에 소속되기를 원하지도 않고 폭력과 마약상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떡하든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고파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그들을 보살펴야할 엄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안고 있다. 칼릴의 살해사건의 목격자임을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으려던 스타가 그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조금씩 내딛을 때,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흔들릴 때 이끌고 붙잡아 준 것은 일차적으로 스타의 부모다.

  스타의 엄마가 다른 오빠인 세븐이 현재의 가정에서의 삶과 스타의 집에서의 삶이 다르듯이 아이들이 가정에서 제대로 보호받고 교육받지 못한다면 가든 하이츠의 아이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스타의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를 휩쓰는 마약상의 무리들을 보건대 마을공동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스타의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든 하이츠를 떠나 다른 곳에 간다 한들 1-15와 같은 경찰이, 검찰이, 판사가, 언론인이, 헤일리와 같은 친구들이 있다면 스타의 가족이 터전을 옮긴들 무슨 소용이 될까. 한 사회가 사회구성원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행하고 있는지….   

  

그게 문제다. 우리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두고 그 사람은 너무 말을 많이 한 나머지 선을 넘지만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듣는 우리도 그냥 받아들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런 상황에서 잠자코 있다면 말을 할 수 있는 게 무슨 소용일까?


  한편으로는 동화같이 여겨지기도 했는데 그건 오로지 스타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가족애와 사회의식 때문이었나 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책의 뒷장에 자리한 경찰에 의해 사망한 이들의 명단이 현실을 다시금 냉철하게 바라보게 한다. 스타는 칼릴을 포기하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소설의 결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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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8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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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조차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16.


  한증막에서 들어선 것처럼 물기 가득한 계절이, 6월의 비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그 짙은 아예메넴의 기후가 잊혀지지 않기에 오늘처럼의 물기없는 추위가 거센 날에 떠올릴 소설이 아닌데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가 불쑥 스쳐간다. 인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이 비슷하고, 또한 낙살라이트가 등장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이 소설.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 같이 느껴졌던 이 소설에서 왜인지 아예메넴의 기후 묘사가 좋았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기후로 인해 더 쓸쓸했다는 것이 더 맞겠다. 

  오래 여운이 남았던 이 소설이 뜬금없이 <조선일보> 사주의 열 살짜리 손녀의 폭언에 의해서 되새겨진다. 전우용 교수의 이 사건에 대한 “어린아이까지도 ‘한국인 고용인’에게 패악을 떠는 고용주 가족 문화는, 일제강점기 악질 일본인 가정에나 있던 것”이라는 논평 때문이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나라에 보탬이 될 리 없는 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이 나라는 어찌하여 친일의 청산이 이다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흘러왔는지, 그런 채로 발전이니 진보니 하며 흘러온 이 나라의 비극에 종결은 있는 것일까. 어떤 문화를 떠올리는 일, 이 글을 보며 식민지, 갑질, 비극, 이런 단어 끝에 무수한 ‘벨리아 파펜’의 모습이 떠올려졌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벨리아 파펜이 등장한 건, 바로 이 소설이었다.


벨루타의 아버지 벨리아 파펜은 ‘구시대’의 파라반이었다. ‘뒷걸음질치던 시절’을 보았기에 맘마치와 그 가족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넓고 깊었다. 돌조각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 맘마치가 의안을 알아봐주고 값도 치러줬다. 그는 아직도 그 빚을 갚을 만큼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 이도 없었지만 자신은 결코 갚을 능력도 없었기에, 그 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감사함에 미소는 절로 커졌고 허리는 더욱더 굽혀졌다.


  혁명적이며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이끌어 가는 아들 벨루타에게는 버거운 짐이자 방해꾼이었던 벨리아 파펜. 그는 갑질 문화를 반박하지 않는, 순응하며 철저하게 감사하는 인물이다. 벨루타와 그에게는 영원한 아가씨 암무의 관계에 극도로 두려워하며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철저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사하며 감사하는 벨리아 파펜들이, 현재 이 나라에도 제법 존재하지 않는가. 때론 시대의 비극은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을 영원히 받들어 모시는 불가촉천민이기를 자처하는 이들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 그 작은 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조용히 밀려오는 슬픔을 느끼게 만든 이 이야기에서 벨리아 파펜으로 인해 분노가, 슬픔이 배가되었던 기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을 두고서도 벨리아 파펜의 행동과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더욱 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사회, 문화적 형태에서 쉬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벨리아 파펜같은 인물이 시대의 비극을 더욱 타오르게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갑질 부류들이 등장할 때마다 제법 언론이 시끄러웠건만 이번만큼은 조용하다는 것이 그들 갑에 기생하는 어떤 을들 때문이겠지. 열 살이라는 작은 아이조차도 이 나라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아가는 모습, 한국식 카스트, 그 아이가 재력과 권력을 쥐고서 형성해갈 문화가 아찔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할머니가 자신의 소녀 시절 카스트제도가 계급에 따라 행동을 달리 해야 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한국 언론사 대표의 열 살짜리 딸이 하는 말들과 참 닮아 있다. 인도의 그 유명한 카스트제도에 의해 지주의 딸 암무와 불가촉천민 벨루타의 사랑에 제약이 있다면 암무는 가촉민임에도 여자라는, 거기에 대해 이혼녀라는 이유로 행동의 제약이 더해진다. 그리고 혁명이란, 그 혁명을 위하여 또다른 제약을 가한다. 세상은 온갖 제약을 만들어내는데 중독된 이들이 지배하는데 재미들린 듯하다.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에서 지배했던 규범과 관습들이 23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인도와 영국, 힌두교와 시리아 정교도, 불가촉천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라는 그 차이가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며 사랑을, 가족을 파괴하는지를. 그럼에도 굳건하게 사랑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 미래(그들의 ‘사랑’, 그들의 ‘광기’, 그들의 ‘희망’, 그들의 ‘무하아하 기쁨’)를 거미와 결부시켰다. 매일 밤 (갈수록 커가는 두려움을 안고) 거미가 그날을 견뎌냈는지 살폈다.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자만심에. 그들은 거미의 다양한 취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거미의 어기적대는 위엄도.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감정을 배가시키는 문체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단지 사랑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인도가 처한 현실과 문제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도 역시 그 과거의 관습이 말끔히 걷어지지 않은 사회인 탓에 23년 전의 일들이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세상의 그 거대한 규칙에, 혹은 신이 내린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에 맞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그 시간들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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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아룬다티 로이의 책들을 섭렵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의 최고 책인 <작은 것들의 신>
은 가장 끝으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모시빛 2018-11-23 18:39   좋아요 0 | URL
곧 줗은 시간을 보내겠네요.
저는 <작은 것들의 신> 읽는 시간이 좋았어요. 책을 덮고 나서는 많이 허했지만요....
 
분노와 용서 - 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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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분노가 가득한데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2018.


  어떤 형태로든 너무나 익숙해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단어, 분노. 분노와 동행하는 수많은 단어 중 용서가 붙었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분노 옆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노’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된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는 ‘분노하라’ 외치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분노할 것을 부추긴다. 그런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맘껏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힘겨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에 분노는 정의와 어울려 다녔다. 정의가 짝꿍이었기에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엄정하게 따져야 할 단어였다. 그 시대가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사라졌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분노와 정의는 짝꿍으로 이어져야 할 말이기에, 용서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니. 이 시대 대표적 석학으로 불리는 누스바움의 분노는 어떤 것이기에 용서와 짝을 지웠는가.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는 분노를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신화의 복수의 여신과 지혜의 여신을 빗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결부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수의 여신이 지혜의 여신에 의해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의 뼈대를 생각하면 누스바움이 바라보는 분노, 그러하기에 용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그것은 해결되어야 하고 발현되지 않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를 극복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누스바움은 그것을 용서로 본다. 하지만 역시 누스바움이 정의하는 용서에는 제한이 있다. “용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격성과 통제, 기쁨의 부재 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 영역,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서 분노와 용서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따져본다. 용서가 거래적‧교환적으로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되지 않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참으로 어렵다. 분노도 용서도 누스바움에 따르면 누스바음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피해서 행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선사시대의 어느 단계예서는 분노가 가치 있을지 모르는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해주었겠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노의 유용한 역할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이고 선한 정의의 체제가 세워지자 분노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분노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얼마든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얼핏 생각할 때 개인적 차원의 분노로 전제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누스바움은 “분노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규범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법체계나 사회가 정의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에 미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비-분노’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부문별한 분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성향은 지속하되, 행동으로의 표출이 아니라는 말이 가지는 그 이상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며 알아가게 된다. 분노도 용서도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교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는 넘어가지만 삐딱하게 보게 되면 이 말에 대한 반발도 차오른다. 그 수정과 교정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누구나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적 분노 표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형태에서의 분노는 특정 세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불가피하다는 말에서 그 불가피함의 수준은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분노하고 싶은데 분노할 수 없을 때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문제가 되고 대안이 되고 방법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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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의 인문학 - 이상한 놈, Peeling의 인문학을 만나다, 수정증보판
유범상 지음 / 논형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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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필링의 인문학, 유범상, 논형, 2014.


  여전히 인문학 열풍은 지속되고 있다. 힐링이든 필링이든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는 것에 비하면 인문학적 사고와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하긴 아직도 필링보다 힐링 쪽으로 그 무게가 지워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힐링과 필링의 인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힐링의 인문학이 개인의 내면문제에 집중하여 개인의 강점을 찾고 심리치료에 노력하는 것이라면 필링(Peeling)의 인문학은 인간을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눈가리개를 문제 삼아 그것을 벗겨내는 것, 나를 지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권력관계와 구조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다. 그리하여 전자에서 인문학은 대중들을 계몽할 대상으로 보거나 고급 교양교육과 사교의 장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면 후자의 인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만나게 된다고.


이제 인문학은 개인의 이해와 힐링(healing)을 넘어 공동체의 갈등과 구조를 필링해야 한다. 힐링은 힐링 자체로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필링과 필링의 정치를 통해 진정한 힐링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필링의 인문학은 진정한 힐링의 조건을 만들고, 생각하는 정치적 주체를 통해 작동할 것이다. 이때 인문학은 단순히 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수없이 개인의 힐링을 도모한다 한들 내 힐링의 장소가 시끄럽고 불편하다면 궁극적인 힐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거나 그 장소가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삶 자체가 정치와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주는 그 부정을 함의하는 말들 때문에 정치에 대한 혐오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치를 삶과 분리시켜왔지만, 사실 겪어본 바에 의하면 하나하나의 삶에서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정치에서 뒤돌아 더 멀리로 달아나도록 부추기는 것은 그냥 이대로의 삶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이들 때문이란 생각이 거듭 든다.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생각당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과 그에 따른 욕망은 자신의 것이 맞는지 타자의 것은 아닌지 말이다. 또한 헤아려 생각해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샘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이라는 저수지에서 나온다. 지식・역사・상식 등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이것의 이면에는 어떤 권력, 즉 국가든 자본이든 그들의 의지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상식은 교양이 아니라 지배의 무기이고 정치의 싸움터이고 생사의 바로미터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매트릭스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지금을 지배하는 상식은 어떠한지를 생각해보면 거듭 기이하고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이라는 것, 지켜야 하는 것에 관해서 일정한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상식에서 벗어난 것을 행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너무나 당연하게 몰상식을 부르짖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나아가 그것을 자랑스럽고 힘차게 드러내는 어떤 상식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의 한 틀이라는 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생각당하는 삶’을 경계했는데 생각당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만을 알기 때문이구나 싶다.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지니는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책을 읽다 주먹을 굳게 쥐었던 것은 잠깐뿐 현실을 보면 고개부터 저어진다. 힐링, 필링,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무기는 어떤 철학과 상식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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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지음, 황소연 옮김 / 검은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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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또 하나의 마야


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검은숲, 2018.


  어항속 물고기가 뛰노는 듯한 표지에 박힌 책 제목은 다정스러워 난 이 책을 꿀벌 마야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어 담아 두었던 이유는 어디로 날아가고 꿀벌 마야가 아님을 알고선, 마야를 다정스럽게 부르기엔 마음이 잡히지 않아 더디게 책이 흘러가게 된다. 원제는 “가장 위대한”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인 교실 현장에서 시작한다. 한 사람만 총에 맞지 않았다. 총에 맞지 않은 단 한 사람, 마야. 총기소지 국가에서 자주 접하는 기사처럼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의 생존자, 아니 공범자로서의 마야. 소설은 마야의 재판을 다룬다. 현재 마야는 공범으로 9개월째 구속수감되어 있다.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고 검사는 유죄를 주장한다. 마야는 그 어디쯤에 있을까. 마야가 공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마지막 페이지에 밝혀질 것이다. 남자친구 세바스티안이 제 아버지를 죽이도록 부추기고 총기난사까지 도운 공범, 명확한 사실은 5명이 총에 맞았고 그 중 두명은 마야가 쏜 총에 의해서다. 

  책장이 느릿하게 넘어가는 이유를 책을 읽다 깨달았다. 아직 마야를 다정한 마야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첫 페이지부터 인천초등학생 살인사건의 두 명의 공범이 떠오른 탓도 클 것이다. 소설이 꼭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마야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되지 않아서, 아니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페이지가 더디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저 소설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될 것을 이미 유무죄를 판별하고서 마야를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벌써 두 명의 희생이 마야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사건의 내막을 굳이 알 필요없다 판정지은 걸까. 아닌듯 하며 마야에 대해 단정이 거의 완료가 된 상황에 따라 마야를 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떠신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했고 여전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 당신은 나를 당신이 추정하는 나의 이미지에 맞추려 한다. 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출세에 목매는 학생 자치위원회 회원도 아니고, 용감한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량 학살범도 아니고, 꽤 똑똑하고 꽤 예쁘장한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문신도 하지 않았고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친구도, 누구의 절친도, 누구의 딸도 아니다. 나는 그냥 마야다.


  어떤 사건이라도 언론과 재판의 말끝하나에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현직 변호사가 썼다는 소설은 그리하여 법정소설로서 스릴있게 이야기를 이끈다. 변호사와 검사의 증거와 추론의 핑퐁게임. 혼란과 충격에 마야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한 공간에 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범죄의 수법이나 내용이 충격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잔인해지고 그 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청소년들의 마약중독과 총기발사다.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어른, 부모의 영향력과 인종차별과 부의 축적에 따른 권력형성은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같다. 


사회적 병폐를 소수자의 탓으로 돌릴 때 이득 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아닙니다. 그 문제의 원인이 흑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도. 1930년대에는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고,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민자들이 되겠네요. 


  마야의 재판을 다룬 소설에서 많은 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미국 경제학자의 초청 강연에서의 질의응답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도 강당에 모여 이루어지는 토론이 길게 서술되어 있는 이유는 단지 사미르와 사바스티안이 자란 환경과 그들의 사고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며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키웠군!” “사회주의자 납셨어.”라 깐죽거리는 어른이 있는 강연장,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점잖고 교양을 갖춘 사람, 어쩌면 박사 학위 소지자나 할 말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지도 않는다. 알다시피 현실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다.


  재판을 받으며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마야가 깨달은 건, 모든 인간은 현실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같은 공간에서 죽은 어맨다와 데니스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라는 것을. 가난한 이와 이민자들, 인종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라면 거침없이 차별을 보여주면서도 또한 보이는 곳을 향해서는 나는 몰상식하고 배려없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외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 역시 같은 모양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성적이고 굳건하게 모범생으로서 자세를 견지하는 사미르가 결국 아직 어리다는 것을, 그 미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는 결국 아이인 것을. 사미르처럼 이 세상을 살면서 의식적으로도 모범적이려하지 않는 세바스티안의 아버지는 어떤가. 마야, 세바스티안, 사미르, 그들의 부모들만이 통하는 그 세계가 세상 모든 총기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그러고보니 스웨덴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베어타운』법정에서도 ‘마야’가 있었다. 그때 ‘마야’를 둘러싼 세상의 공방도 어른들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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