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지음, 황소연 옮김 / 검은숲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또 하나의 마야


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검은숲, 2018.


  어항속 물고기가 뛰노는 듯한 표지에 박힌 책 제목은 다정스러워 난 이 책을 꿀벌 마야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어 담아 두었던 이유는 어디로 날아가고 꿀벌 마야가 아님을 알고선, 마야를 다정스럽게 부르기엔 마음이 잡히지 않아 더디게 책이 흘러가게 된다. 원제는 “가장 위대한”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인 교실 현장에서 시작한다. 한 사람만 총에 맞지 않았다. 총에 맞지 않은 단 한 사람, 마야. 총기소지 국가에서 자주 접하는 기사처럼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의 생존자, 아니 공범자로서의 마야. 소설은 마야의 재판을 다룬다. 현재 마야는 공범으로 9개월째 구속수감되어 있다.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고 검사는 유죄를 주장한다. 마야는 그 어디쯤에 있을까. 마야가 공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마지막 페이지에 밝혀질 것이다. 남자친구 세바스티안이 제 아버지를 죽이도록 부추기고 총기난사까지 도운 공범, 명확한 사실은 5명이 총에 맞았고 그 중 두명은 마야가 쏜 총에 의해서다. 

  책장이 느릿하게 넘어가는 이유를 책을 읽다 깨달았다. 아직 마야를 다정한 마야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첫 페이지부터 인천초등학생 살인사건의 두 명의 공범이 떠오른 탓도 클 것이다. 소설이 꼭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마야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되지 않아서, 아니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페이지가 더디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저 소설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될 것을 이미 유무죄를 판별하고서 마야를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벌써 두 명의 희생이 마야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사건의 내막을 굳이 알 필요없다 판정지은 걸까. 아닌듯 하며 마야에 대해 단정이 거의 완료가 된 상황에 따라 마야를 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떠신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했고 여전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 당신은 나를 당신이 추정하는 나의 이미지에 맞추려 한다. 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출세에 목매는 학생 자치위원회 회원도 아니고, 용감한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량 학살범도 아니고, 꽤 똑똑하고 꽤 예쁘장한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문신도 하지 않았고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친구도, 누구의 절친도, 누구의 딸도 아니다. 나는 그냥 마야다.


  어떤 사건이라도 언론과 재판의 말끝하나에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현직 변호사가 썼다는 소설은 그리하여 법정소설로서 스릴있게 이야기를 이끈다. 변호사와 검사의 증거와 추론의 핑퐁게임. 혼란과 충격에 마야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한 공간에 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범죄의 수법이나 내용이 충격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잔인해지고 그 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청소년들의 마약중독과 총기발사다.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어른, 부모의 영향력과 인종차별과 부의 축적에 따른 권력형성은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같다. 


사회적 병폐를 소수자의 탓으로 돌릴 때 이득 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아닙니다. 그 문제의 원인이 흑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도. 1930년대에는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고,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민자들이 되겠네요. 


  마야의 재판을 다룬 소설에서 많은 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미국 경제학자의 초청 강연에서의 질의응답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도 강당에 모여 이루어지는 토론이 길게 서술되어 있는 이유는 단지 사미르와 사바스티안이 자란 환경과 그들의 사고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며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키웠군!” “사회주의자 납셨어.”라 깐죽거리는 어른이 있는 강연장,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점잖고 교양을 갖춘 사람, 어쩌면 박사 학위 소지자나 할 말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지도 않는다. 알다시피 현실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다.


  재판을 받으며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마야가 깨달은 건, 모든 인간은 현실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같은 공간에서 죽은 어맨다와 데니스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라는 것을. 가난한 이와 이민자들, 인종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라면 거침없이 차별을 보여주면서도 또한 보이는 곳을 향해서는 나는 몰상식하고 배려없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외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 역시 같은 모양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성적이고 굳건하게 모범생으로서 자세를 견지하는 사미르가 결국 아직 어리다는 것을, 그 미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는 결국 아이인 것을. 사미르처럼 이 세상을 살면서 의식적으로도 모범적이려하지 않는 세바스티안의 아버지는 어떤가. 마야, 세바스티안, 사미르, 그들의 부모들만이 통하는 그 세계가 세상 모든 총기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그러고보니 스웨덴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베어타운』법정에서도 ‘마야’가 있었다. 그때 ‘마야’를 둘러싼 세상의 공방도 어른들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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