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 -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후
변화경영연구소 지음 / 유심(USI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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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똥덩어리 위에


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 후


  공자가 집 앞으로 이사를 왔다. 그 앞으로 달려가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애쓰며 제자이고 싶다고 간절히 애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한때는 스승의 날이면 딱히 찾아가고픈 이가 없음에서 오는 허전함이 있었다. 뭔가 기막힌 운명에 방점을 두었기에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주어진 관계엔 운명이라 하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니다, 라는 결론을 맺고 안심한다. 공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라 궁합이 맞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이 예의와 존경이라는 데 의문을 표하는 바이니 말이다. 예의란 좋은 말임에도 관계에 진전을 더디게 하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설정시키는 공신이다. 그 공신이 미치는 힘이 내 인생에 얼마나 강했던가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이 책 속 열두 명이 공신을 어떻게 다루며 스승을 만들어 갔는지, 관계를 맺어갔는지, 인생을 나아갔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죽은 거나 진배없었지만 내 발목을 내어주는 대신 나는 살게 됐다. 떨어져 죽었어야 할 나를, 내 발목이, 자신을 27조각 내며 살려냈다. 산신이 바스러진 발목을 차가운 수술대에 올렸다. 의사는 절단이라는 말을 무덤덤하게 뱉어냈다.


  스승에 대해 말하기 전 제자들은 그들의 지난 삶을 얘기한다. 그 면면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의 ‘나’가 아닌 ‘고호’다. 방황과 절망과 실패의 날들이 지속되며 피폐해지고 자존감을 잃어가고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삶, 그저 분주하기만 한 삶, 공허함에 허우적이는 삶이었다고 말한다.


삶은 구석에 내팽개쳐진 목발처럼 초라했고 짝다리로 서서, 똑바로 선 모든 것들을 경멸했다. 절망이 지배했고 냉소와 비관으로 세상은 가득 찼다. 그때 스승을 만났다.


  그때 스승을 만나 그들이 변했다고 말한다. 당연, 그래서 그 변화를 이끌어 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요약판으로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이라 기대하면 안된다. 무엇보다 그리하여 그들이 변했다는 말도 적절치 않은 듯하다. 그들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를, 방향을 제 마음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들은 항상 변화에 있었다. 상황의 변화를 기회로 디딤으로 삼아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걸 알지 못했을 뿐. 그들이 자신의 변화의 조종자가 될 수 있게끔 해준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의 존재는 강렬한 영웅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로 단번에 모든 상황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소리를 기억에 남긴다.


자리를 잡고 무념에 빠져 있던 그때 누군가 내 옆 칸에 앉는다. 바지 벗어제끼는 소리가 조신하게 들렸다. 나는 혼자 눈을 크게 떴다. 움직이지 않았다. 작전상 상황 종료 시까지 음소거를 유지하기로 한다. 괄약근을 힘껏 조여 나오려는 모든 것들을 중단시켰다. 숨을 멎게 했다가 가늘게 내쉬며 숨소리조차 가라앉혔다.

그는 화장실에 앉아 시를 읊었다. 어떤 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읽어 내리는 것인지 외워서 읊조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시를 듣지 않고 그의 멋진 목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이따금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와 굽이굽이 스승의 장기를 빠져나온 가스 소리를 들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들이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시를 멈추지 않았다.


  왜인지 나는 붐빈 화장실을 피해 들어간 공용화장실에서 스승의 배설의 전과정을 몰입하여 듣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어쩐지 기묘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노동요(?)처럼 흐르는 스승의 시낭송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자세로 귀기울이고 있는 열 두명의 제자를 떠올리며 쓸데없이 파안대소한다. 그때 스승이 외우고 있던 시가 최영철의 「아직도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였으면 아주 좋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누가 쏟아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똥덩어리 위에

또다시 자신의 똥을 내려놓으며

아직도 하나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 최영철,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中 -

 

  그들 삶에서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알아가도록 스승은 온몸을 다해 말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궁합과 타이밍의 조화다. 힘들어 죽겠다 말하면서도 그들은 스승으로서 구본형을 선택했다. 이 책은 스승이란 주어지는 것도 내게 무엇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함께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의 가르침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호과정을 통해 공감과 공명의 울림임을 보게 된다. 스승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꿈을 그려가는 방법이 가슴으로 인식되고 머리로 이해되어 손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깨우쳐가는 과정들이 책속에 담겼다. 각각의 지난한 여정들 속에서 변화해가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뭉클하게 전해진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한순간에 일궈지지 않았고 삶의 변화 또한 완결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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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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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되지 않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크로스비 마을은 올리브로 인해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다양한 색채를 띤 정감어린 실제의 마을로 느껴진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낯설던 올리브는 배우고파 지는 수학 선생님으로 그녀의 거구가 얼마만큼인지 옆에 서보고픈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마주치면 눈흘기게 되는 동네 아주머니로, 그럼에도 늘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픈 사이로 자리한다.

  열 세편의 단편소설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젊은 날, 중년의, 노년의 올리브가 타인의 삶 속에 등장해 그들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수많은 인생들이 그러하듯이. 삶은 각자의 인생에서 주연이고 타인의 삶에서는 조연이지만 어느 순간에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며 결코 별일없이 흘러가지 않을 감정을 안겨준다. 그 같은 속도의 흐름을 깊이 있는 감정으로 채어 놓는 작가의 글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런 올리브 스타일의 아줌마가 동네에 있다면 성가실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올리브 역시 그녀만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짐 오케이시의 차가 도로를 벗어난 후에,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 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 [약국]


  신기하게도 올리브도 남편 헨리도 각자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사랑을, 사람을 품고서 살아왔다. 그들 삶에 기쁨이기도 하고 회한이 되기도 한 대상, 그 시절들은 흘러가 버렸고 헨리도 올리브도 부부라는 그 충실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견뎌내고 있다고 믿었다. 부부란 사실 자그마한 일에도 무수히 싸우기도 하면서 또 자그마한 일로 인해 가장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떠나보내고 쓸쓸한 노년의 삶에 서로가 위로가 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적이자 동지로 살아온 헨리와 올리브의 삶이 주욱 「다른 길」로만 걸어 왔음을 알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이것이 삶인가 싶은.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튤립]


  애써 추억이라 말해보지만 그 어떤 좋았던 날들의 기억이라도 그쯤되면 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길을 맞닥뜨리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길」이 보여주는 파국의 여운은 길다. 인질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마주했지만, 그 대상이 되었지만 헨리와 올리브에게 충격으로 전해진 것은 평생 겪을까 말까한 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오래도록 숨겨왔던, 감춰왔던 서로의 속내다. 위급한 순간에 드러난 아찔한 말들, 그 부대끼는 독설들은 생애 자체가 거짓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하다. 상처 위에 상처, 그 위에 또다시 상처, 거듭된 상처의 중첩. 소설에서는 상실과 상처를 거듭 끄집어낸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작은 기쁨]


  돌아봐도 멈춰봐도 씁쓸하고 쓸쓸한 바닷가. 휑한 마음 가득하게 서 있는 노인 올리브의 생애가 이대로 마감되도록 작가는 두지 않는다. 결코 사과할 줄 모르며 변덕 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올리브에 대한 평가이며 그래서 힘겨워했던 두 사람, 특별히 크게 싸운 것 같지 않음에도 어느틈에 벌어진 관계는 쉬이 되돌려 지지 않는다.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아들의 말 한마디를 바랬지만 결코 이뤄지지 않았고 헨리가 죽은 후엔 외로움을 더욱 더 껴안은 채 여전한 성격을 유지하며 올리브는 살아간다.

  외로움과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듯 철썩 달라붙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라고 해서 외로움에 면역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독과 외로움에 자살을 선택하지만  「밀물」 속 젊은 케빈과 패티의 놓고 싶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가 올리브에게서도 나타난다. 노년에 만난 사랑 때문인지, 깨달음으로 인해 젊은 올리브였다면 관심두지 않았을 성향의 잭에게 마음을 주며, 결코 알지 못했던 알려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삶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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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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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휘어잡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불현듯이 들이차는 상념. 그것은 바쁘게 서둘렀던 마음을 휘어잡고 속앓이를 하게 한다. 굳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할 리 만무한데도 과거의 기억이 가지는 힘은 크다. 때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생각하기 위한 전조가 아닌가 싶다. 여기, 소설 속 루시 바턴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팠던 열망이다. 루시의 삶은 기억의 프리즘을 통해 보아도 아프다. 그 아픔을 루시는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오래 전 오래 병상에 머물렀던 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루시와 루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엄마 고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간다. 기억 속 이야기는 소설가가 된 루시의 소설 속 이야기 같기도 하다.


“픽션 작가로서 작가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녀는 픽션 작가로서 자신의 일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루시는 외친다. 모든 생은 감동을 준다고 외친다. 루시가 타인의 생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루시라서가 아니라 ‘소설가 루시’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로 타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만든 것이라고.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 자신의 삶에 박힌 그 씁쓸한 모든 기억에서 외로움을 인생의 첫맛이라 기억하는 이라면 외로움을 짝지우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삶에 눈이 갔을 거라 싶다. 그러니 루시가 생각하는 방식이, 타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껴안으려는 그 마음이 루시를 소설가로 이끌었구나 싶다. 모든 생이 감동이라 여기는 그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소설가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루시’로서 그 마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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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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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화재 현장에서 할머니를 구한 불법체류 노동자가 영주권을 획득했다. 스리랑카인 니말은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영주 자격을 얻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제주도 예멘 난민으로 급격하게 불거진 외국인 혐오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이유와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곧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영주권을 얻은 이유를 써 붙이고 살아가진 않을 터이니 니말은 그의 피부색을 이유로 혐오의 시선을 받는 날들을 여전히 겪을 것이다. 한국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버지스 형제』에선 난민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이제는 중년이 된 세 남매의 이야기다. 형제자매는 어릴 적엔 함께 살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들 역시도 그러하지만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나자 일을 해결하려 당장 달려간다. 또한 그들은 어릴 적 함께 겪은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다. 언덕 위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고 함께 타고 있던 짐, 밥, 수전의 아버지가 내린 사이 네 살 밥의 장난으로 구른 차에 아버지가 치여 사망한 일이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날의 일이지만 이 일은 자라는 내내 밥에게 원죄를 부여하였고 그는 죄책감 가득한 소심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반면 여덟이었던 짐은 집안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뉴욕으로 간 짐과 밥과 달리 수전은 고향 셜리폴스에 머문다.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마을의 소말리족 난민 공동체 이슬람교 사원에 돼지 머리를 던진 일로 그들은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2006년 메인 주 루이스턴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 재커리는 증오범죄로 기소되어 변호사 일을 하는 짐과 밥이 이 일을 해결하는 과정이 세 남매가 살아온 이야기들과 연결되면서 각각의 상황에서의 갈등을 드러낸다.

  갈등은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돼지 머리를 던진 일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에 대한 감정만 높게, 깊게 쌓아가고 해결할 의지를 갖지 않고 싸우기 위한 대치상태로 소모적이던 상태에서 재커리가 벌인 것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드러나야 상황에 대한 다른 형태의 일들이 진행되게 된다. 문제가 있음을 소리칠 수 있고 그렇기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 서로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품고서 은근히 드러내왔던 문제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뚜렷해지는데 그때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의 갈등은 세세한 것까지 드러나게 된다. 짐과 밥의 가족들 간의 은근했던 갈등의 감정들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메인에 왜 소말리족이있는 거야?” 헬렌이 문을 통과해 옆방으로 가면서 물었다. 그녀가 돌아보며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족쇄를 찬 게 아니고서야 누가 셜리폴스에 가겠어?”

밥은 헬렌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버지스 가족의 고향을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투였다. 짐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족쇄를 찼으니까. 가난이 족쇄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시각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짐과 밥과 수전, 그들의 배우자, 그들의 아이들을 사다리로 연결하여 애정관계와 갈등관계를 선으로 잇는다면 무수한 교차가 이뤄진다. 그들 갈등의 이면을 한발짝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개인에 대한 감정의 틀을 쌓아가는 것이 환경에서 체득한 계급의식이다.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간의 갈등은 개인간, 가족간의 갈등속에 잠긴 생각의 확장판이다. 가족이 개인에게 애정을 달리 하듯, 사회는 특정 집단에게 애정을 달리한다. 그것은 곧이어 당연한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 처절한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인식, 그것이 갈등의 차별의 편견의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준 사람들한테 더 차갑게 대해. 참을 수가 없거든. 말 그대로야. 우리가 누구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그랬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온갖 이유를 다 끌어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도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고 따스하게 전개된다. 불안하고 두려움 가득한 밥과 그렇게 보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르지 않았던 짐에게 그리고 헬렌에게, 이 세 남매에게 아닌듯이 보였던 가족의 느낌이 서려가듯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형태도 이 남매들처럼이 아닐까. 미국의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쁘지 않고 소말리아의 지역문화와 가족주의가 무조건 답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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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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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 뭘 안다고?!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6.


  교사의 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에이미가 생각났다. 하나같이 다르지 않는 똑같은 패턴의 말과 행동, 여지없는 결말, 그리고 그루밍. 한여름이란 어찌 해도 그늘을 찾게 만들고 그 볕은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인 무더운 여름 날씨와 셜리폴스 풍경이 습한 열기를 드리우고 숨이 막히게끔 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관계도 그렇게 느껴진다. 익숙한 패턴처럼 10대 소녀는 제 엄마에게 애정은 저 멀리 두고 반항과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늘 엄마들은 항상 아이에게 이것을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 다그치고, 아이는 항상 그 말에 반항하느라 관계가 어그러지긴 하지만 제 엄마가 다른 엄마이기를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기를 바라는 에이미의 감정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엄마”라고 입 밖으로 나오고 난 이후에야 이저벨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에이미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이저벨에게는,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몇 주 뒤에 그윽한 밤의 어둠 속에서 이저벨은 그 말을 떠올렸는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똑같은 강도로 그녀의 가슴속에 은백색 고통의 파문이 일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휘청거리는 것 같았고, 심장은 어처구니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흉물스러운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 시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일이 도덕적 약점이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에이미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 에이미가 의도했거나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한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삼십대에 구두공장 사무실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 굿로는 교사가 되기를 꿈꿨었고 좋은 남편을 갖기를 소망하고 구두공장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셜리폴스에 십사년째 살고 있다. 사람들과 특별하게 교류하지 않으며 홀로 에이미를 키우며 에이미의 일 하나하나 단도리하기 바쁜 이저벨은 이제 햄릿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런 ‘책들을 읽는 여자’임을 에이미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저벨 마음속에 깊이 있는 또다른 욕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는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 품은 이저벨의 욕망과 열다섯 에이미의 세배쯤 나이가 많은 교사에 대한 욕망은 대비된다. 감정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실현에 있어서 말이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지독히도 닮아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평행선으로만 향하는 듯 보인다. 엄마와 딸은 과연 친밀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뒤섞인다. 먹먹해진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일이 불안으로 인해 확장됨을 느낀다.


자신이 반대만 아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에이미에게 늘 무섭게 대했나? 이런 의문조차 끔찍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고, 늘 고개를 숙이나? 이저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줄곧 스스로가 신중하고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끔찍했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은 일보다 더 끔찍했다. 자식이 겁에 질린 채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는 딸을 흘끗 돌아보며, 그 말은 맞지 않아, 완전히 반대야, 하고 생각했다. 내가 줄곧 너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올바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지.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이저벨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의 나이였다면 에이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건 이래저래 이저벨의 나이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쓰이게 된 이유였다. 에이미를 기르며, 대립하며 자신의 지나온 삶, 그리고 전개된 삶을 생각하였을 이저벨처럼 어느 순간이 시간이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해도 참으로 젊은 이저벨이었기에. ‘심각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외로운 외톨이’로 살아온 이저벨의 모습이 이 세상 거의 모든 싱글맘의 모습은 아니었을런지. 하긴 그렇게 볼만도 아니다. 이저벨은 그렇게 여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맙소사.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 것에 대해 햄릿이 뭘 안다고?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저벨은 실내복을 더 단단히 여몄다.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만 해도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지붕은 새고 차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뉴잉글랜드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나약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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