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에 시비걸기 ■


1. 쏙쏙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요컨대 이 이야기를 읽으시는 분들은 나쁜 자극을 주는 것은 피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읽으면 됩니다. 그 때문에 읽는 사람을 그르치지 않도록 이야기 첫머리에 모두 그 내용 전체의 줄거리가 짧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p798


  그러니까 보카치오는 100가지 이야기를 다 읽을 필요 없고 골라 읽으라 한다. 그렇다

면? 했지만 이미 나는 착실히 처음부터 읽은지라 골라 읽지 못했다. 그것은 보카치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두에 저렇게 써 놓았다면 맘이 좀 달라져 골라 읽었을까? 아닐 것이다. 보카치오는 글을 다 쓰고 나서 어떤 심경인지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차례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시 책을 들춰서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아주 세세한 제목까지 목차에 달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형태로 차례가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날의 이야기의 ‘주제’를 목차로 내세웠으면 한다. 왜냐고? 저자의 의도대로 “골라 읽기 쉽게”


2. 성별 구분이 안 가는데?


  굳이 성별구분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 형태로 이루어진 소설들을 볼 때 켄터베리 이야기도 그렇고 변신이야기도 그러했지만 이야기하는 화자에 따라 방식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데카메론의 100가지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 각자는 나름 다른 성격들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러한 구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열 명의 화자는 오로지 한 인물로 느껴졌다. 바로 보카치오 자신의 목소리다. 주제에 따른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방식, 문체, 톤 등을 좀 달리했으면 어땠을까.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열 명의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이 과연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순간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가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좀 더 생동감있는 이야기로 만들려면 열 명의 화자들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어떻게 만들어 낼까? 전체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각각의 특징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어쩌면, 이것은 번역의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특히 완역판이라 소개하는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는 “『데카메론』은 분량이 방대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전반적인 시대 상황이나 영향을 준 작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까닭에”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가 알지 못하는 이탈리아어로의 데카메론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보다 조금 더 ‘야한?’ 느낌이었을까. 


3. 페스트는 왜 등장하는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의 영향으로 씌어진 것이라 한다. 당시의 전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이탈리아에서도 절정이었고 그로 인한 참상을 직접 겪은 보카치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데카메론 이야기는 이러한 페스트가 창궐하던 도시, 보다 건강한 삶과 정신을 위하여 교외로 떠난 1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이 페스트를 피해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페스트를 피한 상황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마지막까지도 그래서 페스트는?이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들 열명이 나누게 된 이야기가 모두 페스트 때문이라 말하지만, 나는 좀더 페스트로 인한 참상이나 생각들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는 하나의 도구이긴 했지만, 그 역할이 나는 왜 미미하게 느껴졌을까.


4. 아리송해


  데카메론이 금서인 적도 있다고 하고 오늘날은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라 하기도 한다. 둘 다에 약간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보카치오는 이랬나보다, 저랬다보다 생각하다 보니 자꾸만 아리송해진다. 그는 중세시대의 가치와 신념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과 욕망을 직시하여 데카메론을 서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선적인 종교인의 행태를 묘사하고 특히 여성의 욕망에 관대한 입장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면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했다가 또 다른 이야기를 보다 보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언뜻 드는 생각은, 온전히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받을 비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 어느 정도는 생각하면서 글을 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카이오가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유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듯이 얘기되는 평이 많은데 그에 대해 3초 동안 의문이 들었다. 진짜인가. 사실, 그 시대에 보다 여성이 주도적으로 성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는 없었던 듯하고,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니까 별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어디서 이야기를 모았다고 했으니 이미 그런 이야기들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화자들이 논평하는 이야기 중 다소 여성의 욕구나 욕망, 여성 자체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듯한 발언도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라고 하지만, 사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들도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던 것을,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간 이야기 아닌가 얼핏 생각하기도 했다.

 다시 3초간 지나간 생각, 데카메론에 대해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같은 맥락으로 여성에 대한 비판과 고발로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머리말을 읽어 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가 사랑에 대한 우울증을 위로하고자 썼다고 했다. 그가 사랑이 깨지고 나서 위로 받은 친구들에게 은혜받은 바를 돌려주고자 이 책을 썼다는 글을 보자, 나는 정말로 3초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위로한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괜찮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여성에게 차였지만 이제 여성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으니라며 담담하게 여성을 저렇듯 묘사한 것은 아닐까. 특히나 처음과 마지막 에피소드를 대비하여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원체 데카메론에 대한 다양한 평들이 많으니 그것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며 재밌네, 대단하네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진짜 그런 거야?라며 생각하다 보니 평론가들이 얘기한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되었던 듯도 하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어쨌든 긴 책을 쉽게 읽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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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헤라자드가 이 얘기를 했다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조반니 보카치오, 한형곤 옮김, 동서문화사



  


  단테의 신곡과 견주어 인곡이라 칭할 정도로 데카메론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많은 작가들이 여러 작품에서 데카메론을 모방했고 그 모방작가 중에는 제프리 초서, 셰익스피어도 포함된다고 전한다. 또한 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문으로 된 최고의 문체를 구사한 소설이라 한다.

  데카메론은 Principe Galeotto이란 부제를 달고 있으며 데카메론은 열흘 동안의 이야기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이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열 명의 사람들이 열흘 동안 나눈 이야기들을 모은 소설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액자형태로 구성된 당시 떠돌던 많은 전설과 설화를 담고 보카치오 자신의 창작도 실려 있는 소설이다.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는 페스트가 성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보카치오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작품을 창작했다. 페스트를 피해 어느 시골로 피난을 가게 된 7명의 여자와 3명의 남성이 2주 동안 하루에 나눈 열 편의 이야기를가 실려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일인 금요일, 토요일에는 휴식하기로 하고 열흘간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를 마친 밤이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다. 그리하여 총 100편의 이야기인 단편 소설과 10발라드인 10편의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일 밤 나누는 이야기는 개인이 이야기하는 형태로 되어 있기에 이야기가 독립적이지만 실제로 매일 밤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정해져 있기에 하루마다 나열되는 열편씩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담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데카메론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의 이야기라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제가 어떤 상황에서 전략과 술수를 사용하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다른 날들의 이야기에 비해 더욱 재미있게 여겨지지 않은가 싶다.

  내게 있어 기억나는 부분은 책을 덮고 나의 화를 돋우는 이야기들이다. 가장 마지막에 있었기에 책을 덮을 때까지도 남아 있던 이야기는 열흘째 마지막 이야기이다. 자신의 아내의 덕을 시험하고자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다고 하여 이른바 아내를 길들이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이 어이없는 인간 때문에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아주 지리지리하게 긴 내용이었던 학자의 복수이야기도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여덟째날 일곱 번째 이야기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미망인에게 복수하는 학자의 모습이 정말, 학자스럽다는 느낌이 들며 학자가 하는 말은 옳은 면이 있는데도 통쾌하다는 느낌보다 참, 구질하다는 느낌이 오히려 들었다.

 여섯째날 일곱째 이야기는 필리파 부인이 나온다. 나는 이 여자, 말 잘하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라는 추임새가 나왔다.

 둘째 날 일곱 번째 이야기도 화가 나는 이야기다. 공주가 피치 못할 상황에 휘말려 4년 동안 여러 풍파를 거치고 여러 명의 남자들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보카치오는 이 이야기를 여성이 자신이 가진 재주인 미모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는 피치못할 상황에 빠진 불운한 공주의 처지와 상황에 기가 막힌데 어찌 이것이 공주의 자의로 행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자발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쟁취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 날 첫 번째 이야기도 참 황당하고 우스운 이야기였다. 나는 이 이야기는 어떡하든 그것의 진실과 마음과는 상관없이 표면적인 신앙에 집착하는 모습들과 관련하여 생각되면서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전반적으로 데카메론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수도사나 수녀, 수도하는 이들의 탐욕스러운 행동들 말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만약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가 데카메론 속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주었다면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세헤라자드는 살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확답하진 못하겠다. 천일야화 속 이야기의 부분 부분도 데카메론 속 이야기의 몇몇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으니까. 이 시대엔 정말로 이러한 식의 이야기들에 열광했던 걸까. 그래서 요즘의 시선으로 이 책을 보기에, 이 책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찾지 못해 그 이전의 시선으로 보려 해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데카메론의 매력에 빠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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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자크 아탈리 지음, 이재룡 옮김, 사월의 책, 2010.


 

 “이 이야기는 역사상 딱 한 번 있었던 일로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20년 동안의 시절에 관한 것이다. 때는 역사상 딱 한 번, 딱 한 곳에서 유일신을 믿는 세 개의 종교가 서로를 존중하고 찬양하며 서로에게서 자양분을 섭취하는 길을 택했다(p7.)”

 

 역사상 딱 한번, 딱 한곳 유일신을 믿는 세 개의 종교가 어우러졌던 곳은 12세기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코르도바는 이슬람교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공존하던 평화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북아프리카 알모아데족이 스페인으로 침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개종이 요구되고 처형이 난무한 종교박해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을 피해 이븐 루시드와 모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책은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주는 이미 시간 전에 있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슬람교도인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 제국의 왕의 의중에 따라 재상이 명령하는 대로 이 책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유대인 모세는 처형당한 외삼촌이 남긴 유언으로 이 책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종교와 이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이어지고 책을 찾는 여정 속에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고 살인 사건도 벌어진다. '깨어 있는 자들'이 등장하며 책을 찾지 말라는 위협과 찾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책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왜 그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고민하는 두 사람은 스페인의 현자로서 끊임없는 질문에 부딪치고 사상을 피력한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방식은 이 시대의 이념에 충실하다. 파란만장한 삶도 전부 실화이며, 그들이 한 말들도 실제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특히 오늘날 서구에서 아베로에스라고 불리는 아부 알 왈리드 무하마드 이븐 루시드는 정말로 위대한 이슬람 철학자이며, 마이모니데스라고 불리는 모세 벤 마이문 역시 위대한 유대교 사상가이다. 소설에서처럼 이 두 사람은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1149년 그곳을 떠나 모로코로 들어갔다가 1165년에 다른 곳으로 떠났다.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 시기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렇듯이 이 위대한 이슬람 철학자와 유대교 사상가가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눴을 공산이 매우 크다. p8

  

  자크 아탈리는 역사적인 인물과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공통의 분모를 이끌어낸다. 여기에 허구적인 상상을 더해 이 글을 완성해냈다. 실존 인물들을 통해 재현해 낸 이 이야기는 소설적인 구성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철학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자크 아탈리 자신이 ‘프랑스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며 정치, 경제, 인문, 예술 등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책은 단순한 삶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문학적인 내용을 소설이란 형식으로 풀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미스테리적이며 여행기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형식으로 자크 아탈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종교와 이성의 조화이다. 이야기 속에는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많은 현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종교와 이성에 대한 많은 대화, 담론들을 나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철학적인 논쟁이 가득하다. 이런 철학적인 담론을 이론적인 형태로 풀어냈다면 지루하거나 어렵거나 했을 터인데 미스테리 형식의 소설 속에서 강연으로, 대화로 풀어 가기에 조금 더 쉽게 느껴질 수 있는 듯하다. 또한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므로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허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주인공의 삶에 대한 몰입을 더할 수 있다.

  매우 유명한 학자인 저자가 소설을 썼다기에 궁금했다.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소설책이라는데 두께가 제법 된다. 정말 소설일까. 과연 학자라는 사람이 쓸 수 있을 만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철학자에 관한 책을 쓴 저자가 철학적 주제와 내용을 전하는데 소설 형식을 택했고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한마디 한다. 


  "나쁜 소설만이 자전적이네. 좋은 소설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쓰이지. 그리고 그 본성이란 허구 속에서만 찾을 수 있고."


  자크 아탈리는 좋은 소설을 쓴 것일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좋은 소설이라 할 것이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종교전쟁, 종교가 매개가 된 전쟁을 보건대 ‘종교전쟁의 문제는 서로 싸운다는 것보다 힘의 과시’라는 말이 오늘날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책 속에서 던지는 세 가지 질문을 계속 되묻게 된다.

  세 개의 유일신교를 대립시키는 게 무엇인가? 무엇이 우주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진리는 예언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현시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진리의, 비밀의 책을 찾는 두 주인공이 각각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종교와 신, 종교와 이성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물음과 모순과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기를 알 수 있는 물음이다. 종교가 인간의 삶을 영원케 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종교적 갈등이 초래한 비극적인 역사의 한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논쟁들이 많이 제시되었다.

  마침 스페인 여행의 뒤라서 주인공들이 떠나는 순례의 여정을 온전히 상상이 아니라 직접 본 장소를 그리며 쫓아갈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에 세 종교가 공존했던 그 시기처럼 반목하지 않은 종교에 대한 바램, 종교가 종교답기를, 종교인이 종교의 교리의 본질을 잘 실천하기를 실로 바라는 마음으로 책의 여정을 함께 했다.

 일단, 소설인데 미스테리한 구조와 여행기가 보태지면서 흥미를 높여 준다. 그런데 소설적 구성을 갖추고 있지만 지루한 감이 있다. 흥미있게 가독성있게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종교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나 종교와 이성에 대한 물음과 질문들을 대화나 강연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 강연과 대답은 결국 같은 주제로 일관되어야 하기에 반복적인 패턴으로 나타난다. 철학적 개념과 사상을 대화식으로 풀어 좀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측면은 있다.

  ‘실화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등에 사람들의 관심을 쏟듯이 현존한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였기에 흥미를 배가시키는 부분이다. 다만 내가 그들을 잘 모를 뿐......그들의 인생을 재현하고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에 상상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부분도 흥미를 더할 수 있다. 단,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선택했지만, 양념이 첨가되지 않은 담백한 느낌이다. 이 담백이 나쁘지 않게 느껴지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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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존 브래드쇼, 오제은 역, 학지사.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는 총4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놀라운 아이‘가 어떻게 하여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되는지, 또한 어린 시절 상처가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인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제2부에서는 인간의 성장발달단계에 따라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초기, 갓난아기, 유아기, 학령전 아동기, 학령기, 청소년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성장하도록 돕는 교정훈련을 제시하고 연습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제4부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치유를 통해 놀라운 아이로 변화되는 힘을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는,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충족되었어야 할 의존적인 욕구들이 채워지지 못한 것을 당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해한 결과들은 슬퍼했어야만 했던 것을 미처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해결된 채 남아 있는 욕구들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즉 표현되었어야 할 감정들이 한 번도 표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99


  저자는 1부에서는 개념을 설명하고 2부부터는 2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바로 눈앞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인 당신을 치유하는 듯한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어떠한 상처가 내면에 남아 있는지를 이것이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거나 타인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처받은 내면 아이에 대한 이해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도록 각 장마다 설문지, 선언문 등을 첨부하고 실제 작업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은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거소가 관련된다. p109


     우리가 ‘머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일종의 ‘자아방어기제’이다. 사람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뭔가를 강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느낄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느낀다는 것은, 상처받은 아이의 수치심 중독 속에 갇혀 있는 얼어붙은 거대한 감정의 저장고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당신이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우하기 원한다면, 근본적인 고통을 다루는 ‘실제적인 작업’을 해야만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다. p110


  2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술된 장과 3장의 초기 고통치료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읽었다.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중요함을 저자는 강조하면서 인지적인 중독이 감정을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라 말하며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과 관련된다며 두 개의 문을 가진 방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각 문마다 그 위에 표시가 있다. 한쪽 방에는 ‘천국’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방에는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써있다. 대부분의 상호의존적인 성인아이들은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쓰인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고에 머물러 감정을 분출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당연, 저자의 의견에 동조한다. 다만, 사고중심주자로서 이 머리만 머무른다는 것의 장점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머리에 머무른다는 것이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것도 아니라는 점도. 그 둘은 결국 같이 이어지는 경험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가 내면의 아이를 돌보고, 변화시키고, 또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이 저자가 서문에서 내세운 바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을 통해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상처받은 내면아이’보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키우는 부모’로 시선이 더 많이 갔다. 이 책은 부모의 양육방법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점철되며 부모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아이들이 받게 되는 상처는 모두 부모와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양육방식과 훈련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저자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치유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일단 보다 많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묵상의 형태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주하여 상처받은 아이를 찾아내고 그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그 아이로 하여금 그때의 감정을 풀어내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신생아 때의 기억에 대해서 정말로 그 시기 아이들의 기억이 남아 있을까. 적어도 돌 이상의 경우는 조금 수긍이 가지만 신생아인 아이가 상처받은 경험을 지속하여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수록 의문이 든다.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아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아이에 대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든 생각은 이것은 마치 가족치료처럼 부모와 아이가 함께 치료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관심가지고 잇는 것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면서 부모의 양육방식과 훈련에 관한 것도 저자가 언급하고 있긴 하다.

  책을 덮고 난 느낌은 영적인 것. 그리고 명상을 접목한 저자의 치유 방식이다. 명상의 기능을 알긴 하지만, 교과서적인 교재의 느낌에서 목회적인 책으로의 전환됨이 이 책이 가진 느낌을 상쇄시켜주는 점이 아쉬웠다. 종교적인 색채가 전면에 내세워졌던 책이라면 오히려 기꺼이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의 치달음은 뜨악하게 했다는 점이 있다. 어쩌면 종교적인, 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듯한, 그러한 색깔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들을 좀 더 잘 버무렸어야 할 것이라고, 차라리 그러한 관점임을 표면적으로 밝히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저자의 여러 가지 전공들 또한 보다 더 정교하게 버무려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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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




구본형, 휴머니티스


   저자는 이 책은 자서전이라 말한다. 자서전은 저자의 삶의 현실적인 흔적이 기술되고 그 삶에서의 저자의 생각들이 나타난다. 저자는 자서전의 부제를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라고’명명했다. 자신의 삶의 결산 방식을 저자의 삶을 구성하는 총 11개의 테마로 구성하여 기술하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자신의 지난 10년의 삶을 돌아보고 2장에서는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나이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3장에 이르러 직장생활을, 4장에서는 얼굴과 외모와 더불어 자신의 내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5장에서는 가족, 6장에서는 자연, 7장에서는 건강, 8장에서는 길, 9장에서는 집과 공간 10장은 학습, 11장은 일이라 주제로 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주제 아래 자신의 삶에서 생각해오고 실천해 오던 것에 대해 저자가 가지는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의 주제 아래 소제목을 달아 짧은 이야기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흔히 자서전이라 하면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저자의 삶의 외관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른 내면의 이야기가 흐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사적인 흐름을 따르는가 싶으면서도 삶에서의 사건이나 인생의 흐름보다는 살아온 과정 속에서의 사유를 풀어내는 것을 더 중시한 듯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주된 ‘이야기라인’이 없다. 어쩌면 특정한 인물의 인생이야기가 부각된 자서전적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의 ‘특별한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기엔 그렇지만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막장’ ,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가’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없기에 이러한 형태의 구성이 나오지 않은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하고픈 이들에게, 그럼에도 이렇다 할 ‘사건’이 뚜렷하지 않았던 삶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구성과 내용으로 보인다.

   각 장마다 소제목을 달고 이야기하고 있어 소제목에서의 연결고리는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 보면 큰 이야기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사유의 흐름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사유에 맞게 힘있고 강건한 문체가 아니라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문제가 담백하게 이어진 에세이 형태다.

  저자는 구성상에 세 개의 에필로그와 평설을 두고 있다. 특히 평설이라는 것은 글에 대한 해석이자 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이러한 역할은 저자보다 연배가 높거나 네임 밸류를 가진 사람들이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제자의 평설을 싣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글이 좋다, 나쁘다’의 평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가까이 있는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리하여 그에 대한 평을 받는 것이 더욱 진정성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적중한 듯하다.

  자서전을 읽다 보면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삶이다. 자서전을 쓰는 이들은 우선 많은 굴곡과 사건들을 겪은 삶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서 그 힘든 일들을 겪은 데 대한 ‘사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딱히 사건이라 부를 사건이 없기에 사물이나 일상에 대해 가지는 그의 차별적인 생각, 혹은 공감되는 생각, 아름답게 묘사하고 비유한 문장들에 눈이 간다.


불행한 사람들만이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때때로 변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이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별 의미와 보람도 없는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라고 엄살을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려니 하는 사람들이다.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과 당위성을 찾아냄으로써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변화를 꿈꾸지만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 나는 그들 속에서 불행을 감지한 치열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다. p334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이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인 것처럼 ‘마흔’에 대해 표현한 구절들이 되씹어지는 구절이다. 마흔의 삶에 대한 저자의 단상들, 비유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마흔은 정말로 흔들리는 나이인 것인지, 이와 같이 마흔에 대한 좋은 글귀로 인해 사람들이 감성적이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마흔의 삶에 대한 비유들이 이 책이 나올 수 있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는 듯해서 ‘마흔’에 대한 그의 여러 묘사와 비유를 가진 글귀들을 계속 곱씹어 볼 참이다. 근데, 또 딱히 생각하면 거기에 ‘마흔’ 이 아니라 ‘서른’도 대입해 보고 오십도 육십도 대입해 본다. 딱히 안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저자의 필력이 워낙 매끄러워 정말 ‘마흔’이 딱이구나 싶게 된다. 마흔은 당나귀의 삶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서른도, 오십도, 육십의 당나귀의 삶보다 마흔의 당나귀의 삶이 딱~이다.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쓴다. 말하자면 나의 이야기를 하며 산다.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이다. 매일 조금씩 책을 쓰는 것은 나의 일상이며 현실이다. 책을 쓰며 상상하는 모든 것 역시 나의 일상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남아 있든, 저술가에게 생각과 상상은 이미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분명한 현실이다. p211~212


 나는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분노는 억제된 불길이다. 나는 때때로 침울해 보이거나 무거워 보였다. 분노를 적의 없는 상태로 감출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스스로에게 물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제대로 타오를 수 없었다. 가득한 여기에 시달리다가 결국 불문을 열고 굴뚝을 달아 불길이 훨훨 타오르도록 했다. 이것이 나를 살려 주었다.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분노를 자극했다. 나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분노를 키웠다. 이것이 내가 내 속의 분노를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내 속의 욕망이라는 불길이 잘 타오르는 동안 나는 마음의 평화를 즐길 수 있다. 그 불길의 주위에 자리를 펴고 누워 타오름을 즐기는 것은 벽난로의 아득함이었다. p314


  너무 자서전이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고 책의 흐름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자꾸 ‘자서전’이라고 보니 흔히 하는 자서전의 틀로 책을 보게 된다. 일단, 자서전의 느낌인데 자서전을 벗어난 형식이란 것이 신선하다. 하지만, 자서전을 내는 이들은 일단 여러 방면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다. 구본형도 마찬가지다. 이미 앞선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저서를 통해 그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을 알고, 그의 생각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유들은 다른 책들에서의 사유와 어떤 차별이 있다고 봐야 할까?

  그의 삶에 대한 대강의 그림자라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보통의 자서전이 태어난 순간부터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면‘구본형’의 자서전은 그의 지난 생애를 그저 ‘지난 10년’으로 묶어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감각적, 묘사적, 비유적인 글들로 그의 생을 정리하고 있다. 자서전이 과거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면 이 책은 미래의 이야기인지 ‘하고 싶다’와 ‘되고 싶다’라는 단어가 더욱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종횡무진이다. 직장생활을 이야기하다 내 얼굴을 이야기하다가 자연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그 연결고리가 그렇게 어긋나다는 것을 느끼진 않았다. 그저 장마다 다르게 읽히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차만 봤을 때는 이것이 자서전의 제목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저자처럼 여러 책을 통해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경우에만 가능한 목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에 처음부터 자서전을 들이미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지들을 다른 글들과 얽어 내어 또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탁월한 힘을 가진 저자임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돌고 돌아 ‘직장생활’이 아닌 개인의 ‘일’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벗어나 나의 ‘일’을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인생의 사유를 개인의 내면과 외면을 넘나들며 한 편의 그림같이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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