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마크툽 Maktub

 마크툽이란 단어를 보면 ‘툽’에서 오래 머문다. 

이내 ‘툭’으로 바꿔버리는 이 단어는 

뜻을 알기도 전에 손에서 놓아 버리는 느낌을 준다. 

‘툭’ 그렇게.

 

 그래서 마크툽은 슬픈 단어다. 아픈 단어다. 안쓰러움이 묻어 나는 단어다. 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니. 운명이, 존재가 흔들림 없이 정해져 있는 이 느낌. 내가 살아가는 동안의 기록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간다. 난 온 힘을 다해도 ‘툭’ 그 끝을 만날 수밖에 없다.

  파울로 코엘료가 묶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이 단어로 묶은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이미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뽑아내고 싶었고 그래서 <마크툽>이라 이름 붙인 이야기들은 뭔가.

  여기에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이 11년 동안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과 친구나 다른 이들로부터 들은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공자이야기나 선집에서 많이 보듯이 제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스승님께서 인생의 가르침을 전한다.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전한 이야기들이 파울로 코엘류에겐 보다 더 깊이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인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늘 비슷한 깨달음을 전한다. 늘 어리석고 모자란 우리들은 사건을 접하며 1차원적인 사고에 머물지만 스승들은 더 큰 깨달음과 시각을 던져준다. 가끔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애매한 것들도 분명 있다. 깨달음이란 또한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이 책의 목적은 인간 영혼의 풍요로움이라고 파울로는 말한다. 그래서 내 영혼은 풍요로워졌나?!

  풍요로워진 것은 모르겠고 조금은 깊어지긴 한 것 같다. 슬픔과 아픔이 버무려진 인생의 ‘툭’을 생각하게 되니까.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조금의 허무는 왜인지 지금 내 인생이 원하는 바로 가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슬펐던가. 인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힘차게 전진하지 않고 기뻐하지도 않은 채 이미 움츠러져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에 대해 미련이 많다는 것, 후회가 많다는 말과도 닮아 있다. 어찌 살았기에. 가끔 이런 때에는 내게 종교가 있어 이 의미를 맹목적인 종교의 느낌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허나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

  듣기 싫었던 말이 “네 어깨에 진 짐을 내려 놓아라, 하나님을 믿으면 다 알아서 해 주신다”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종교를 가진 이들은 모른다. 그 말은 자신들의 영역에선 마음을 평온케 해주는 말이겠지만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내 맘에 평온을 주지 못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로였겠지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요렇게 되어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겠지. 이 불쌍한 어린 양이 하루빨리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오도록 해 주세요라고......교회에만 나가면 모든 일에 해결되는데 헤매고 있느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의 위로를 들은 것이 아니라 전도사를 만난 느낌이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쓸쓸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다. 믿지 않으며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은 또 뭔가. 위로의 한마디를 파울로는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말한다. 오, 그 말은 잘된 번역이 아니에요라고. 번역을 거슬러 온전히 그 느낌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마크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랍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잘된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신은 자비롭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만 펜과 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p30

 

  인생의 스승이 하시는 말씀에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이 마크툽이 과연 내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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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가득한 남해 금산



이성복



  바다로부터 산으로 오르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숨을 헉헉거릴 때도 있었지만 귓가에선 계속 이 구절이 맴돌았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남해금산 中


  내가 밟는 어느 돌 속에 여자가 묻혀 있을까. 오랜 시간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었으니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지 오래되었을까.

  그렇게 남해 금산 돌무더기를 오른 첫 해, 뒤따르는 바다 내음보다 디디는 돌에 더 깊이 마음을 새겼던 때가 있었다. 돌 속에 묻혔는지 떠나갔는지 모를 한 여자 때문에. 그 여자는 떠나갔고 돌 속에 따라 들어간 마음으로 금산을 오르면 가까이 있는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함께 나 또한 푹 잠기어 있을 수 있었다.

  산 꼭대기, 반대편에 이르러서야 등산길이 아닌 찻길이 있음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금산을 가리라 했다면 찻길로 바로 들어서 한뼘 한뼘 디디고 올라온 돌무더기를 잊었을 것이다. 바다로 가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 선 것이 금산을 생각하기엔 좋은 운이였다. 이후로는 찻길로 금산 보리암으로 가게 되는 걸 보면.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은 금산의 돌을 밟아 올라가며 느끼는 여운이 시와 맞물려 오래 각인되어 있다. 표제어인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도 이 시를 다시 한번 더 보게 된다. 시집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이미지, 단어들이 있다. 이 시집에선 치욕과 어머니, 누이란 단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덮고 난 뒤에서 쓸쓸한 정서와 막막함이 감도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요!

- 치욕의 끝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이 이 먹먹함이여! 우리의 삶엔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다지도 치욕을 떨궈내지 못하고 바스라져 가는 걸까. 그 치욕은 한 개인의 삶일까, ‘우리’의 삶이었을까.


  “삶은 내게 너무 헐겁다”,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묶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소설 테스가 연상되는 ‘테스’라는 시를 보며 “누이만 아는 비밀”을 연결지어 테스가 겪은 일과 같은 치욕을 떠올려 보았다가 결국 그것은 먹는 일, 밥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됨을 떠올렸다. 테스의 일생이 떠올려지면 이 이야기의 치욕과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또 반복되는 ‘먹는’ 이미지들이 삶의 비애와 치욕의 원인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밥벌이를 위해 참고 당해야 하는 일련의 모든 견딤과 치욕들. 결국 살아가기 위해 치욕을 견디지만 그 치욕이 더욱 치욕스러워지는 ‘삶’이라는 공간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 찢긴 기억의 천막(天幕)에는 흰 피가 눈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나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그래서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희망을 꿈꿀 것인가. 희망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것인지, 어떤 모습을 희망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 여전히 먹먹한 채로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빗속에 젖어서도 공사장에서 못을 빼면서도 그렇게 그 자리에 묵묵히 있다.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강


  시가 입속에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될 때는 감각적인 한 구절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 하나가 좋아서 한 시구를 되뇌게 된다. 하지만 <남해금산>처럼 시집 전체가 한 이야기로 엮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집도 있다. 어렸을 때는 감각적인 구절 하나에 이게 뭐지, 이런 표현을, 이라며 쳐다보던 시구들에 이제는 이미지를 찾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푸욱 잠기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기보다 안개 가득한 먹먹함이라는 것을 남해금산은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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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기원전이란 말은 참으로 아득하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마저도 실체가 없는 미지다. 다만, 이 기원전 BC라는 단어에선 동양이 아닌 서양의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대해 다른 나라들보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 나라의 풍경이 떠올려진다. 문명의 발상지가 서양만 있던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기원을 그리스로마로 만들어버린 건, 신의 이야기 그리스로마신화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리스로마신화를 처음 접한 건 이야기 가득한 토마스 불핀치의 책이었다. 처음의 감흥이었는지 이후로 토마스 불핀치 것보다 재밌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널리 알린 공로자가 토마스 불핀치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쨌든 무수한 판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했다. 그림책, 만화책, 동화책 등등등.

  같은 이야기일텐데도 ‘원전’이란 말에 혹해 아폴로도로스의 책을 집었다. 이 원전이란 말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단단한 뼈대일 테고 기원이겠지만 어쨌든 뭐가 다르랴 하면서. 하지만 결론은 달랐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전달하는지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원전’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단단한 기원을 주는 느낌이었다. 형태에서 그것이 전해졌는데 성경식 형태와 같아 보였다. 또 신들의 탄생이나 자손들의 가계보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보통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야기’로 이어져 온다면 이것은 사건과 사실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다 간결한. 그래서 어쩜 이야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불친절하게 여겨질 것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사람이라는 아폴로도로스가 쓴 이 책은 ‘신’이 존재하는 듯이 역사서인 듯한 서술의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가 생략됨이 없이 잘 전개되어 있다는 점도 이설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참고하며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의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책은 그만큼 기원이며 원전이며 객관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저자 자신도 이 책의 목적이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다루기보다 그에 대한 ‘정리’라는 말에서 왜 이 책이 이렇게 서술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에 맞게 잘 쓰여진 책이다.

  저자가 만든 것인지 출판사가 정리한 것인지 신들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좋았다. 비슷한 이름이나 연대가 가물가물한 신들의 서열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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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것, 것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저, 오마이북, 2012.

 

  이 책이 기분 나쁜 건, 하나다. ‘너 때문에’라며 탓을 돌리다 문득, ‘내가?’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가 90이상이고 난 0.00001%만 하련다. 그게 솔직히 맞다고 본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0.00001%에 발목 잡혀 버린다. 나의 %가 결정적인 한방일 수 있음을 넘치지 않고 잘 버티는 컵에 내가 떨어뜨린 한방울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상황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든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한두 명의 개인이 바뀌면 그 사회는 그 몫만큼 바뀌게 된다. 나 혼자만 바뀌어도 세상은 한 사람만큼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기에 나의 변화는 항상 주변의 변화를 몰고 온다. p5~6


 지금, 우리는 망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이라니, 주욱 지금이었다. 지금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망가진 사회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모든 것들이 개판이다. 망가진 것은 내 책임이 아니었으니 복구의 책임도 내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열심히 지켜봤다. 사실, 망가진 것들을 탓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었겠나 싶다. 아니 그거라도 해야지.

  수많은 지표들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고 그나마 유일하게 총기사고는 거의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치안이 안전한’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당장 총기자유가 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체감하는 입장에선 치안이 안전한지 잘 모르겠다. 그것만이 자주 없을 뿐이라는 걸 아니까. 망가진 것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는데 하나씩 정리되어 보니 이토록 많았었나 싶은 것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꼽는 것이 더 쉬울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털 메인화면 뒤로 재빨리 숨어버린 당장의 전기, 가스 민영화 소식이나 ‘혐오’와 ‘분노’를 기반한 사건들,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안전사고들도 ‘망가짐’을 더하는 요소가 되겠지.

  망가짐의 이유는 결국 망가진 ‘의식’이 결정적인 건가. 망가뜨리는 주체와 더불어 망가짐을 방치하고 망가짐에 익숙한 사고들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진행된다. 약자가 되는 것은 권리는 사라지고 권력이 힘을 펼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뭐, 권리를 챙기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것을 어쩌라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물고 물린 이 약자의 삶과 권력의 세상.

  우리가 망가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패배주의에 물든 공명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상실된 것도 있지만 인터넷 상에서 비난이 속출하고 조롱이 난무하는 것은 공명심마저도 망가져 있기 때문이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패배의식 때문이다. 공명심은 느끼고 싶지만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짓이 ‘만만한 상대 물고 늘어지기’다. 이는 한국 주류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p87~88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외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많이 들어온 소리지만 투표해야 한다고. 지금 당장은 총선도 끝난 마당이라......마냥 투표를 끝내 놓은 시점에서도 ‘가시적’인 것이 아직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긴 하다. 당장 내년이 대선인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과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저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안타깝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모든 사회학 서적들은 ‘투표’를 강조한다. 나 또한 모든 것들에 결국 답은 투표이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무 자주 듣고 자주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이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진실성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진 사회에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일단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가 우선될 것이다. 당장 내가 취업하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명퇴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무얼 더 가지거나 내가 현재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눈 앞이 아득한 상황에서 내 안정을 먼저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눈 앞의 안전을 확보해야 그 다음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본능인걸.

  그래도 저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니 내 삶이 절박할 때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내 삶을 다른 이가 보아주길 원한다면 말이다. 이렇듯 역지사지의 심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가자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 희망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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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904년 6월 16일의 랩 혹은 일기




이것은 랩이야!

 

  어디에서 뽑은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책을 순위화한 목록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본 목록들의 상위권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나는 타인이, 전문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목록을 살피면서도 이 율리시스를 잘 피해왔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이미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이야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제임스 조이스의 시각으로 다시 읽을 필요까지야라며 스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강제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책을 펼치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까닭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등한시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지며 이 두꺼운 책을 얼른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짐과 동시에 읽는다는 기쁨이 솟구쳤다. 그토록 사람들이 율리시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정복욕이지 않을까.

  율리시스를 읽다가,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것은 랩이야’란 생각이었다. 사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말들이 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생각의 흐름을 감히 말이 뒤따라 갈 수 없다. 

  오디세우스 10년의 이야기보다 율리시스 하루의 이야기가 이렇게 양적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페넬로페 역시 남편을 기다리면서 무수한 내적 갈등을 했을 것이고 거듭 거듭 생각의 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몰리가 내뱉는 문장들을 보면서 마침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블룸의 생각들을 다시 뒤적였다. 마침표가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읽어 가면서의 호흡도 달라진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이겠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블룸의 간결하면서도 딱딱 끊어진 호흡과 달리 몰리의 호흡은 쉴새가 없다. 여성의 생각도 수다스러움이려니 하는 걸까. 아무튼 몰리의 생각들은 랩처럼 음악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했고 내용의 놀라움도 상쇄시켜주는 듯 고조시켜 주는 듯한 문장들을 읽으며 현대판 랩으로 읽어 내려갔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이 아니다


   율리시스 이야기를 생각했던 내게 당연 첫 장부터 ‘이게 뭐지’란 당황스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담이다. 머릿속을 항해하는 이야기. 하루 동안에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가. 참 재밌네, 재밌어란 생각들을 하면서 어딘가를 떠도는 것만큼 의식의 흐름 역시도 재미있는 유랑이란 생각을 했다.

   거창하게 들리는 의식의 흐름이란 문학용어가 사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소설기법이 가미되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낯설다기보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 뭔가 익숙해, 익숙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쓰라고 재촉받으며 제출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일기가 아니라 뭔가 가정의 격랑을 겪을 때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써내려간 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토록 기법적으로 쉬운 소설이 어디있을까.


율리시스는 외설인가 아닌가


   조이스의 연보에서 율리시스가 외설시비로 휘말렸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뭐?’. 그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마광수의 책. 마광수의 책을 본 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저런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을까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하다. 결론은, 글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이건 꼬투리 잡는 인간과 집단은 있고 그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집단은 있으니.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시의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는 해금조치가 되었으니 이 책은 외설시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설’에 더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본다면 이런 시비가 있다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유럽도 역시, 실제 외설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해 낸 작품들을 보는 것은 인식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일단, 율리시스는

 

   당대에 그토록 시달림을 안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이토록 격찬을 받으며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소개에, 작품 소개에 구구절절하게 나온 바에 의하면 <율리시스>가 가지는 가치는 혁신적인 소설기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나올 시점에 한창 주가를 홀리던 의식의 흐름 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어미학이라고 한다. 언어미학의 관점에서는 번역을 보는 입장에서는 늘 아쉽다. 어떻게 언어유희가 활용되는지를 모국어를 느끼는 그 맛으로 알고 싶지만 늘 각주를 의지해야 하며 그마저도 쉽게 와 닿지를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 언어유희를 즐기는 나로서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율리시스>를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위치지은 이유란다. 그 위치를 지은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 문학을 전공한다는 ‘전문가’에 의해서겠지.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고 조이스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들도 있다 한다. <율리시스>로 문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율리시스>를 끝까지 읽은 사람보다 많다라는.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올려놓는 것이 그러니 의아스럽기도 할밖에. 그토록 공격받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소설은 공격으로 인해 더욱 회자되어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T. S.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자기들의 작품을 쓸 때 이 책의 영향을 받았나나 어쨌다나.

  왜 ‘다름’은 늘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나의 이해하지 못함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들은 참 안타깝다. 어쨌든, <율리시스>보다 더 욕먹었던 작품이 <피네간의 경야>인데, 이 책도 지난 번부터 계속 읽어야지 하고 있던 책이다. 욕을 많이 먹은 작품이라니 또 불끈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말년에 눈 때문에도 딸 때문에도 힘들었던 제임스 조이스, 지금 후대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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