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가득한 남해 금산



이성복



  바다로부터 산으로 오르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숨을 헉헉거릴 때도 있었지만 귓가에선 계속 이 구절이 맴돌았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남해금산 中


  내가 밟는 어느 돌 속에 여자가 묻혀 있을까. 오랜 시간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었으니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지 오래되었을까.

  그렇게 남해 금산 돌무더기를 오른 첫 해, 뒤따르는 바다 내음보다 디디는 돌에 더 깊이 마음을 새겼던 때가 있었다. 돌 속에 묻혔는지 떠나갔는지 모를 한 여자 때문에. 그 여자는 떠나갔고 돌 속에 따라 들어간 마음으로 금산을 오르면 가까이 있는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함께 나 또한 푹 잠기어 있을 수 있었다.

  산 꼭대기, 반대편에 이르러서야 등산길이 아닌 찻길이 있음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금산을 가리라 했다면 찻길로 바로 들어서 한뼘 한뼘 디디고 올라온 돌무더기를 잊었을 것이다. 바다로 가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 선 것이 금산을 생각하기엔 좋은 운이였다. 이후로는 찻길로 금산 보리암으로 가게 되는 걸 보면.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은 금산의 돌을 밟아 올라가며 느끼는 여운이 시와 맞물려 오래 각인되어 있다. 표제어인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도 이 시를 다시 한번 더 보게 된다. 시집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이미지, 단어들이 있다. 이 시집에선 치욕과 어머니, 누이란 단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덮고 난 뒤에서 쓸쓸한 정서와 막막함이 감도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요!

- 치욕의 끝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이 이 먹먹함이여! 우리의 삶엔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다지도 치욕을 떨궈내지 못하고 바스라져 가는 걸까. 그 치욕은 한 개인의 삶일까, ‘우리’의 삶이었을까.


  “삶은 내게 너무 헐겁다”,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묶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소설 테스가 연상되는 ‘테스’라는 시를 보며 “누이만 아는 비밀”을 연결지어 테스가 겪은 일과 같은 치욕을 떠올려 보았다가 결국 그것은 먹는 일, 밥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됨을 떠올렸다. 테스의 일생이 떠올려지면 이 이야기의 치욕과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또 반복되는 ‘먹는’ 이미지들이 삶의 비애와 치욕의 원인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밥벌이를 위해 참고 당해야 하는 일련의 모든 견딤과 치욕들. 결국 살아가기 위해 치욕을 견디지만 그 치욕이 더욱 치욕스러워지는 ‘삶’이라는 공간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 찢긴 기억의 천막(天幕)에는 흰 피가 눈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나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그래서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희망을 꿈꿀 것인가. 희망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것인지, 어떤 모습을 희망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 여전히 먹먹한 채로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빗속에 젖어서도 공사장에서 못을 빼면서도 그렇게 그 자리에 묵묵히 있다.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강


  시가 입속에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될 때는 감각적인 한 구절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 하나가 좋아서 한 시구를 되뇌게 된다. 하지만 <남해금산>처럼 시집 전체가 한 이야기로 엮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집도 있다. 어렸을 때는 감각적인 구절 하나에 이게 뭐지, 이런 표현을, 이라며 쳐다보던 시구들에 이제는 이미지를 찾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푸욱 잠기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기보다 안개 가득한 먹먹함이라는 것을 남해금산은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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