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 윤선아 옮김 / 강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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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짙어지는 글씨


  글을 읽고 작가에 대해 알고 나면 글의 내용이 달리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로서의 감성과 감각보다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낯선 작가를 아는 방식은 작품보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각인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프란츠 베르펠이란 작가는 단번에 ‘말러의 남편이야’가 되어 버렸다.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작가 역시 당대에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다. 워낙 알마 밀러의 사랑이 유명하다 보니, 아니 많은 예술가들을 사랑했기에 프란츠 베르펠 역시 그녀의 몇 번째 남자인가가 관심사였을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으로 이후 클림트, 코코쉬카, 건축가 그로피우스 둥 먾은 연인을 가진 여자로, 그래서 팜므파탈로 더욱 알려져 있다. 팜므파탈의 남편이 된 프란츠 베르펠에게 온갖 연인들을 뒤로 하고 프란츠 베르펠과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그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했을 것은 분명하다.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1936년 10월 아침, 레오니다스가 그날 받은 편지 한통으로 인해 안절부절하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부 차관이자 이제 오십인 레오니다스는 그 편지를 이십 여년 전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보내온 편지라 생각하지만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던 그때 자신은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는데 자신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자존감도 없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한다. 그가 자존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숙사 옆방의 유대인 친구에게서 받은 연미복 한 벌로 무도회를 가게 될 기회를 얻은 후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면서다. 그곳에서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를 얻은 후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 아멜리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멜리가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그와 결혼했던 만큼 자신의 성공길은 아내가 보장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옛 연인으로부터 한 청년의 후원을 부탁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직감을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은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아내의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달래기 위해 아내에게 편지를 보여주게 되고 다시 예측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베라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할 경우 아멜리가 터트릴 분노와 그녀의 복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멜리가 당장 이혼 소송을 제기할 거라는 사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만만하게 누리고 즐기는 재산, 바로 이 재산의 상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p168


  한 남자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통. 그때부터 남자는 그것을 들킬까 두려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제 생을 돌아본다. 이 소설에서는 그 남자의 내밀한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남자의 생각과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만나 제 성공을 위해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버리고 성공길을 달리는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메뉴이긴 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 시대적 배경을 더하고 주인공의 성격이나 특징을 조금만 더하면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작가는 그렇게 몇가지 터치를 함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을 급선회하게끔 하며 독자에게 다른 생각거리들을 안겨준다. 주인공이 편지내용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편지를 받고 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고뇌한다. 햄릿이 살아온 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 바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주인공, 레오니다스라는 인물의 위선과 철저한 기회주의적 사고다. 그리고 주인공이 편지를 받은 1936년의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시대였다. 작가 역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것이 1938년이었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시대에 고급 관료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레오니다스가 나치 정권에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한나 아렌트식으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해야 할까…. 철저하고 당연하게 전형적인 기회주의식 사고와 실천에 앞장서는 레오니다스이기에 그가 18년 전에 결혼을 빙자한 외도를 일삼은 일은 그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내적 고민의 대사들이 구구절절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반성으로 이어지기보다 결국 그저 그런 결론으로 치닫기 위한 세밀함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지나치도록 세밀한 그의 내적 갈등을 따라가다 문득, 깨닫는다. 아, 레오니다스. 이 사람 자신, 유대인이라니…….


“용서라는 말……” 베라가 그의 물음을 실마리로 삼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상투적인 빈말에 지나지 않아요. 난 그 말을 싫어해요. 후회할 만한 일을 했다면 그건 각자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있을 뿐이에요.” p199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이 발화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한 문장의 말이 입으로 나올 땐 생각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지만 생각은 수많은 가지를 확산하더라도 막상 내뱉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일부를 그 사람의 모든 의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생각 속엔 보다 바람직한 생각들도 있고 타인을 위한 배려도 있고 잘못에 대한 반성의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스치듯 지나가게 하고 욕망의 돌출과 생의 편리가 그 생각들을 누르고 결과가 되고 마는 말로 나타난다. 어쩌면 말로 나올 것이 정해진 채로, 그 정해진 결을 향해 생각들이 전진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만.

  롤러코스터 같은 진지하고 세밀한 고민의 균열이 이루어내는 힘은 줄거리를 뛰어넘어 레오니다스에게, 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에 휘감겨진다. 우울한 회색빛이 조금 깔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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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의 시대에 그저 좋은 사람이란 될 수 없다


셀레스트 응.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줌파 라히리, 애완의 시대, 트라우마, 자기연민과 자기암시, 꿈, 가정, 피임…

  아이들은 순수한가?, 그래서 결국 리디아를 죽인 자는 누군가. 리디아는 어떻게 죽었나.

   책을 읽는 중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이다.


  “리디아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즈음이다. 1977년 리디아가 사망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핵심은 ‘누가, 왜, 리디아를 죽였는가’로 모아진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그저 좋은 사람>이 떠오른 건 미국의 이민자 가정의 두 남매의 분위기가 이 소설의 남매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언뜻 미국은 이민자 가정들이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소재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 소설마다 미국의 유수한 상들을 휩쓸고 미국 평단의 반응이 좋게 나타났다. 하긴, 평이 좋으니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이런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또다시 느끼는 건 그런 이민자의 이야기를 쓴 작가들은 역시, 이민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읽은 책에 한정해서이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거의 100%였던 듯하다.

  이 책의 작가 셀레스트 응 역시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셀레스트 응의 아버지는 나사 소속 연구원이고 어머니는 화학과 교수라는 점을 볼 때 미국사회에서 나름 안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른바 금수저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 가정이 전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 지식의 결여로 인한 소외감이나 무시는 비교적 덜했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가미된 이야기인 걸까. 소설의 주인공들은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그들의 세 아이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가정에서 둘째딸인 리디아가 어느날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생각난 것처럼, 이 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긴 했다만, 이 소설의 소재는 익숙하다. 당연하겠지만 이민자 가정이 겪는 문제,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문제란 왕따와 정체성의 고민이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익숙한 소재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비틀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어 간다. 아마도 6년 동안이나 이 소설을 수없이 수정한 것이 보다 유연하고 흥미있게 소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 힘은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로 시작되는 추리와 미스테리한 형식에서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분명 함께 범인을 찾는 이야기인가 싶어 각을 잡고 범인을 추리하자라고 할라치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는 갈등과 욕망.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


한번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란 20대 젊은이 중에 이유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느낌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한번도 자신을 탐색해보지 못한 채 성장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도, 동력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은 온갖 걱정과 무기력을 채워진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주어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려 애쓰지만 그 일 또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에 완전히 책임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p70 <애완의 시대 중>


  <애완의 시대>가 생각난 것은 이 시대의 이 가정의 부모들에게서 베이비 부모 세대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들 모두에게서 애완을 보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고 길들여지는 이 애완을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이 가족에게 <애완의 시대>를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 피임도 절대적인 한 방법이다. 피임! 우리의 능력있고 강단있는 메릴린에게 필요한 것, 애초에. 자기결정권이란 말은 쉽다. 하지만 자기결정권의 궁극은, 최상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최상일 때 아닐까. 결코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의 결정을 따르리라” “너의 결정이 최고의 방법이다”라고 말한들, 공허함이 돌 뿐.


황금빛 찬란한 바닐라 향이 나는 인생을 꿈꿨을 테지만 결국 딸은 떠나버리고, 연필로 밑줄 친 꿈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이 작고 슬프고 텅 빈 집에, 작고 슬프고 텅 빈 인생에 갇힌 파리 같았을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메릴린은 날카롭고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슬픈가? 아니, 화가 났다. 엄마의 인생이 발하는 그 보잘것없음에 맹렬하게 화가 났다. 이거야, 메릴린은 분노에 싸여, 요리책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엄마를 기억하려면 이게 필요해. 내가 간직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p120~121


  사망한 것은 리디아인데, 리디아만큼이나 가족 모두가 사망한 것이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한바퀴 돌고 나면 정말이지 막내 한나의 존재가 각인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순수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들과 ‘다른’ 것에 항상 거리를 두다 못해 ‘낙인’을 찍는데 앞장선다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순수하기에 순수한 놀림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행동들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정말로 아이들은 순수한가. 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에, 안타까움과 울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른은 그렇게 변해가는가. 그들의 사고는 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식을 변질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눈이 파랄 수 있지? 어쨌거나 중국인 아냐?”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엄마가 미국인이잖아.”

    “갈색 눈이 우성이라고 생각했는데.” p269


  우리는 누구나 ‘나’가 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의 ‘나’가 아니라 나의 나가.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누구’를 분리하여 말해질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사회에 가정에 있느냐가 전적인 지분을 가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으로 나를 휩쓴다. 그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아닐까. 그것은 마냥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맥락의 말. 중심과 가치를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땐, 웃지 않는 거야. 꼭 기억해야 해. p366

 적어도 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진 않는다고, 절대로. 적어도 난 두려워하진 않아.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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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경영시인, 구본형


  그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면서 언젠가는 ‘변화경영시인‘이라 부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작가 인생 후반기의 진화 여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삶을 시처럼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시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시처럼 살고 싶다. 나고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무겁고 진지한 삶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바람길 위의 새처럼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깊은 기쁨, 그것으로 충만한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지. 어느 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문득 의미를 발견하여 말할 수 없는 헌신으로 열중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문득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느닷없는 전환은 아름답다. 그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깊은 인생, p11)”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가 진득한 수프를 끓여내는 것이다(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p451)”


 삶을 시처럼 살고 싶은 열망은 2002년에도 보인다. 『사자같이 젊은 놈들』 속에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미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가 살아가고픈 인생을 그리며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던 듯하다. 시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듯 깊은 인생을 진득한 수프로 끓여내는 일이라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신화이야기를 가지고 『그리스인이야기』라는 진뜩한 수프를 마지막으로 끓여 내었다. 여기에서 그는 신화 속 영웅들의 삶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시로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신화 속 이들의 삶을 들려주며 종국에는 그들의 삶을 서사시처럼 읊어 내는 것처럼 그의 삶도 누군가에게, 또 그 자신에게 시로서 읊어 지리라. 그리고 그가 바랐듯이 ‘시처럼 살고 싶은 인생’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있어 그의 인생 또한 한 편의 시처럼 기억되리라.

 그가 떠난 후 그가 남긴 글들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세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그가 남긴 글들에서 선별한 60편을 묶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디오 고전읽기를 통해 남긴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다. 그가 사랑한 시, 그가 쓴 시들 역시도 한편으로 묶여졌으면 하며 ‘변화경영시인’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한, 그에게 변화경영시인이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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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


 그는 스스로를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칭한다. 이는 ‘변화경영전문가’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변화경영전문가라는 그의 역할을 충실히 해온 그 자신에 대한 또다른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매년 발간되는 그의 저서 속의 저자 소개에서도 나타난다. 그동안 변화경영전문가로서 소개되던 책에서 어느 날부터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소개되고 있었다(2008년 출간된 『세월이 젊음에게』에서는 여전히 변화경영전문가로 소개되고 있는데 2009년 『더 보스:쿨한 동행』에서부터는 변화경영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은 어떤 인식에서 이루어졌을까.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기술적인 컨설턴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제 그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공부하여 알게 된 것과 체득한 깨달음을 마음대로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을 다루고, 태도를 다루고, 가치를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했다(깊은 인생, p98).”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명명에 주저함이 없는 그의 면면이 드러난다. 실제 그의 저서는 동서양의 철학이 넘나들고 특히 그가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화’에서 ‘변화’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미 그는 모든 저서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기 위한 생각들을 실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화를 전면에 내세운 『신화읽는 시간』,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책이 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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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 사부님

구본형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다 보면 ‘부지깽이’라는 닉네임이 눈에 띈다. 부지깽이는 불을 지필 때 나무가 잘 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닉네임의 주인은 저자 본인이다.『더 보스:쿨한동행』(2009)에서 그는 이상적인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는 좋은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상사는 부지깽이, 부하는 땔감’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보다 앞서서 이미 스스로를 부지깽이라 칭하고 있다.


 “종종 나는 나를 ‘부지깽이’ 라고 부르곤 합니다. 어떤 감흥으로 그저 그렇게 불러 보았지요. 불이 꺼지려 하면 불씨를 뒤적여 불을 살려내고, 불이 너무 기세를 돋아 몽땅 태우려들면 누르고 벌려 불길을 가라앉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부지깽이지요. 그러다 종종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어 제 몸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를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라고 부를까 생각 중입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를 부지깽이라고 부르려면 땔감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땔감이란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들과 꿈벗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그는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이들은 자기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며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찾고자 하는 모색이 절망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연구원 제도에서 연구원들은 매주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칼럼을 쓴다. 이러한 과정을 1년 동안 진행하여 50권의 독서와 50개의 칼럼을 쓰고 이후 자신이 쓰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그가 이끌어 주었다. 또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운영하며 이른바 꿈벗을 양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와 소망을 찾아 위대한 삶의 전환을 모색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서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날마다 새벽기상을 실천하며 꾸준한 글쓰기를 해 온 것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하루 2시간의 자기 혁명을 이루도록 새벽기상과 새벽활동을 습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는 많은 땔감을 모아두었고 이들 땔감은 부지깽이의 손놀림 아래 열심히 불을 피우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많은 땔감들을 통해 그는 ‘사부님’ 또는 ‘스승님’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땔감과 함께 그 또한 성장한다. 연구원 제도를 진행하면서는 그 또한 함께 읽고 쓰는 과정을 하는 것이다. 또한 땔감의 습도와 종류에 맞추어 적절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가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반응하고 있는 모습은 역시 홈페이지의 무수한 댓글과 땔감에 대한 글들, 땔감들이 만들어낸 서문 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지깽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직화된 학교라는 정형화된 틀 속에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이러한 연구소를 설립하여 땔감을 부지런히 만들어 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 그 자신의 끝없는 변화와 자기혁명의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운영하였던 이 모든 프로그램들은 그를 사부님이라 부르는 제자들에 의해 다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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