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소영현 외 지음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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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민주주의


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희노애락의 인생사에서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통제된다면 과연 인간은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존재한다. 어쩌란 말인지. 상투적이고 원론적인 말이 대안이 되겠다. “적당히”. 그 적당의 수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저래 치이고 마는 ‘감정’인 까닭에 오히려 적절한 상황에서 기를 펴지 못한 감정들이 분출되거나 분출되지 못하여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게, 웃음도 눈물도 분노도 왜 그토록 타인의 눈치를 봐가며 학습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건지. 감정의 자연스러움이 곧 진실이라면 이 비극적 감정의, 조작된 감정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은 감정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다. 각기 다른 전공의 세 명의 저자들의 말대로 하면 ‘감성적 사회비평’이다. 이것은 위로와 공감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비평이란 얘기다. 저자들의 목적은 이것이니 독자로서의 나는 그들의 의도에 맞는 변화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겠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제목으로 끌렸고 책 표지도 매력적이었다. 새해 들어 ‘감정’에 대한 새삼스런 고찰을 하다 여지없이 생각난 책이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인문학과 사회학이 가미된 글에 대한 호감은 내 개인적 취향이구나 싶다. 그러니 감성적 사회비평 역시도 취향 저격된 셈이다.

  감정의 가장 대표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를 중심으로 감정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상황들, 영화이거나 소설이거나, 점성술 등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모든 것이 감정을 탐구하는 자료가 된다.


감정에 대한 탐색은 단지 주체가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신체적 반응이나 직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론,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표상된 것과 감춰진 것의 역학, 역사와 현재의 연계와 상호 간섭 방식, 욕망과 가치의 충돌, 윤리와 관습이라는 사회적 요소들이 다선적이고 중층적으로 관여하는 복잡계에 대한 총체적 탐색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26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왜 감정에 대한 통제나 억압이 주로 이루어지는가, 자기계발서 속 감정에 대한 조언들은 왜 억제와 통제가 아니라면 특정감정에 대한 지향인가. 감정에 대한 교육은 그것만이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이 있는 것인가. 어쨌든 ‘감정’을 표출하는 주체가 정말 ‘나’가 맞는가. ‘나’의 감정표출에 대한 권리도 없다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는 과연 가능한가.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해 나타나는 영향은 무엇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감정 표현은 미숙하거나 유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세상과 대면하기 위한 결의이자 선택이다. 감정의 ‘집단적 표현’이 곧 저항의 제스처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p26~27


  “‘가정폭력’은 가부장제 위계가 은폐할 수 없었던 구조적 폭력의 일면이자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위계구조의 폭력적 분출(p58)”이다. 가정폭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수치와 분노의 감정에서 보면 인종적-국가적-계급적-젠더적 차원의 위계적 폭력 구조가 연관된다. 사실 모든 감정의 면면에 계급과 성별이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한 경험은 사실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을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갑질 속에 잘 드러난다. 또한 ‘남성의 화는 합리적인 분노‘로 ‘여성의 화는 성격이상’으로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계에서 보듯이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막고 있다. 그것의 이득이 없지 않다면 적극적인 개선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분위기 형성을 보건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위계적인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 이것을 저자들은 “감정민주주의 실현”이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결코 인간답지 않으며, 그런 위험사회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자라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옹호라기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패배주의적 탄식으로 다가왔다. p228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던, 아니면 익숙하지만 그래서 불편했던 감정의 표현 방식들에 대해 저자들이 비평은 공감을 준다. 일상의 모든 감정들에 대한 명철한 탐구를 통해 감정의 민낯과 포장된 감정에 대해 가늠하게도 된다. 감정표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데 무슨 인간다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잃어버린 나의 인간다움이 통제된 감정교육만큼이나 억압되어 있구나를 생각하게끔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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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일단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해서인지...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네요.
 
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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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사고


  오랜 시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성이 객관적이 분석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것과 달리 감정은, 그것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거나 말했다.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감정이 생각에서 발현된다고, 감정이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만난 『감정의 항해』는 격하게 반가운 책이다. 저자 윌리엄 레디는 역사학 및 인류학 교수이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소 펠로로서 감정을 개념과 감정연구에 관한 역사를 분석하며 감정에 관한 새로운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학 전공자로서 ‘감정’의 연구에 역사를 활용한다. 그가 끌여들어온 역사적인 시기는 프랑스 혁명시기이다. 대체로 감정에 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연구를 혁명시기와 접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이론이 전개될 것인지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지식과 사료의 활용으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연구가 또다른 접근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크게 2부로 나뉘어 1부에선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내용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감정의 이론틀을 제시한다. 2부는 프랑스 혁명시대의 감정을 저자가 제시한 이론의 틀과 함께 대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에서도 어느 정도 견해가 일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의 이유는 이렇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감정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감정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모두 자유 속에서 살 자격이 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변화도 유의미해지고, 역사가 인간의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성격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기록이 된다. p9


  저자의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핵심적인 주장은 ‘인지’ 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며 인간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목표가 정해진다고 본다. 그에 따라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되고 그중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하게 되는데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나머지 활성화된 생각 재료가 감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모티브imotive”는 바로 이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모티브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감정만큼이나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개개 구성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의 의미가 변한다면 감정 역시도 변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저자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 속의 감정을 분석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정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를 이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민국을 들끓는 ‘분노’라는 감정이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구분하여 분석하면 감정체제에 대한 반응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로운 감정의 항해를 펼쳐나가야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오히려 경직을 강요함으로써 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감정 피난처란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라고 정의한다. 이 감정피난처는 기존의 감정체제를 뒷받침할 수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체제의 결과가 혁명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감정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혁명의 시기는 자유로운 감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은 이타애적인 개혁 제스처를 수단으로 하여 프랑스 전체를 일종의 감정 피난처로 변모시키려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리력을 투입하여 이타애와 박애를 확산시키려는 역설적인 시도가 전개되자, 1789년에 설계되었던 감정 피난처들은 4년 만에 공포정치라는 악성의 감정고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p223~224


  감정이 감정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감정의 항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들의 편지나 연설문, 민사소송의 판결문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한 내용은 저자의 우려가 나타난다. 그 시대가, 사회가 억압하는 감정체제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길들여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감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누리지 못함과 같다. 감정이 사고와 다르지 않다면 감정을 규율하는 감정체제는 사고 역시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의 감정과 사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 감정의 자유로운 항해는 결국 그 사회의 문화와 규율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또한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권력층의 입맛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감정의 항해를 보며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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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의 크기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고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인물은 말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야 하는 시대는 환희는 사라지고 온통 폭력이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폭력의 외관에 헷갈렸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폭력이다. 그럭저럭 살아가게 만든다는 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한 열의를, 정의를 빼앗겨 버리거나 지속할 생각이 없이 사는 시대. 그것을 드리운 것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그러한 테두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을 단 단편은 없는 정이현의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전의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 미적거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은 뚜렷하게 선악을 드러내지 않지만, 대놓고 타인에게 삿대질을 한다거나 무엄한 말을 늘어놓지 않지만, 그래서 어쩔 땐 약해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위해를 가한다. 의식하지 않든 아니든 그들은 결정을 미룸으로써, 책임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럭저럭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p139


  사는 게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지 따진다면 그것을 묻는다는 게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물음 속에선 이미 대답이 전제한 듯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의 방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타인에게만 정의를, 배려를 강요하는 것은 또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사회가 삶의 최선의 선, 안전선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개인의 ‘행동’ 하나가 폭력인 시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일에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주 무시된다.  p152


  ‘무시’는 타인과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관계치 않으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관계맺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는, 그 관계맺음의 틀을 규정하는 방식을 따로이 설정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는 표면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뻔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된 위선의 이 세계. 그 어떤 아름다운 포장을 하고 있더라도 결국은 포장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서글픔이 가득한 이 시대, 이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말과 행동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가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p31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p182


  이렇게 삶이 이어진다. 농도 짙은 애정을 확인할 길 없이 흘러가는 시대. 사랑이, 애정마저도 쉽게 폭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대가 우리를 휘감는다. 예의없음을 상당히 예의있게 내뱉는 이 시대에 삶의 모든 것들에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은 듯 무심을 가장하는 이들에게 삶은 흘러가고 이어진다.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p130 


  그렇게 남은 생애, 지금 드러난 이 모습이 화석화된다면, 이것이 당연한 일들인 양 삶의 표준으로 남는다면, 그때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소설 속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먼 미래가 그려진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비애의 크기는 위선과 위악 그 중 어디에서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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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워터십 다운을 향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Watership Down 

리처드 애덤스, 사계절 2002.


    제법의 작가들이 출간을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 애덤스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역시도 그랬다. 그가 렉스 콜링스라는 편집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만큼이나 책을 ‘보는’, 작가를 ‘보는’ 눈을 가진 이의 역할에 감사한다.

  그렇게 고전에 반열에 오른 <워터십 다운>의 작가 리처드 애덤스가 크리스마스에 사망했다. 그가 52세에 쓴 <워터십 다운>은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로 그가 환경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라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출판사의 거절의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다는 것과 토끼들이 귀엽지 않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독자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너무’ 긴 줄 모르겠고 토끼는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웠다.   이야기는 모두 4권이다. 1부는 택지 개발로 인해 살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이야기, 2부는 토끼들에게 이상향이라 불리는 워터십 다운에 가는 과정, 3부는 에프라파 잠입 작전과 탈출담, 4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에프라파 토끼들과의 싸움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모험이라 불릴 수도 있지만 이 토끼들의 모험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험 소설이 가지는 흥미진진함과는 다르다. 토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기에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듯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하다. 그만큼 이야기 속에서의 역할들이 뚜렷하다. 예언능력을 가진 파이버, 지도력을 가진 헤이즐을 비롯하여 이름처럼 용맹스러운 빅웍, 이야기꾼 댄더 라이언, 지략있는 블랙베리, 굴 파기의 대가 스트로베리, 어리고 소심한 토끼 에이콘과 핍킨 등이 그렇다. 이들 토끼들은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위험을 헤쳐 나간다. 이 상황속에서 지도자의 역할, 헤이즐의 활약이 눈에 띌 수밖에 없지만 예언가인 파이버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댄더 라이언의 역할에도 눈이 간다.

  두 토끼의 역할이 다른 듯하지만 일종의 종교적·정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파이버의 예언적이 능력은 샌들포드 마을의 위험을 감지하고 새로운 곳을 가야 한다는 계시를 전한다. 그리고 댄더 라이언은 토끼들이 힘들어 할 때, 지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때면 토끼들 사이에 전해지는 신화이야기를, 전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토끼들에게 힘을 북돋는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게다. 삶을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신념과 그 신념을 강화시켜줄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토끼들이 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위험하고 불안한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리더 헤이즐의 역량 덕분이다. 헤이즐은 강압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아니다. 자신과 함께 하는 토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문제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지를 잘 아는 리더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다고 할까.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장의 여정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헤이즐은 늘 고민하고 고뇌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헤이즐과 함께 하는 토끼들이 가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인들 상관없이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어디’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위험한 곳 샌들포드를 떠나 공포가 법인 에프라파 마을을 지나 그들이 정착하게 되는 곳.

 토끼들이 조금 더 여정을 계속하고 정착할 마을을 찾게 되는 것은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그 어느 곳이라도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며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했던 것은 토끼들이 자신들이 민주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들은 자신들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길 위의 나날들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길 위에서 토끼들이 익힌 삶에 대한 자세가 정착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토끼들의 모습을 통해 보다 나은 곳이 물리적 환경의 요소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제 저물어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절실한 깨달음을 주게 할 열한 마리의 토끼이다. 특히 헤이즐의 지도력과 헤이즐의 진정한 조력자인 파이버의 관계는 국정농단이라는 이 유례없는 나라에 살게 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을 정화시켜줄 것이다.

  토끼들이 나오는 우화, 어린이용 동화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놀랄 것이다. 이 책은 토끼들의 생존의 이야기이며 정치와 체제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토끼들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불을 밝힌, 뛰어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대

한민국이 2017년엔 새로운 나라로 정착할 수 있기를. 그리고 헤이즐과 같은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라스푸틴이나 한국판 라스푸틴이 아니라 파이버와 같은 조력자가 탄생하기를. 각각의 장점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기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면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기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속에 리처드 애덤스는 이 모든 것을 심어놓고 한세기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그의 영혼도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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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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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빨강의 로맨스


빨강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Red-시로 쓴 소설 

  한국에서 빨강에 대한 공포와 금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이라고들 말한다. 붉은 악마의 물결이 휩쓴 그때부터 “빨갱이”라는 말의 순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에 대한 노골적인 수사와 몰이는 유효하다. 빨강의 열정에 편승하여 빨강색 옷을 입고 빨강색 간판을 달고 빨강빨강 전도하던 이들이 그 몰이의 대표적 주자이다. 그것이 코메디 같아서 어떤 이들에겐 빨강이 종북의 상징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 어쨌든 여러 모로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 빨강이다.

  빨강이 의도치 않은 자의적 해석과 이미지 투영으로 빨강은 탄생 이래 영원히 그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빨강에 드리워진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가 ‘괴물’이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의 대가로 세 개의 머리와 몸을 가진 괴물이 키우는 소들을 훔치는 과업을 수행한다. 괴물의 이름은 게리온이고 붉은 섬이라는 뜻의 에리테이아(Erytheia) 섬에 살고 있다. 그가 키우는 소떼들 역시 붉다. 

  이 이야기에 상상의 나래를 더해 그리스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는 빨강 소떼를 돌보는 이상한 날개가 달린 빨강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시의 전문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T.S. 엘리엇 수상자인 작가 앤 카슨은 게리온의 이야기를 재창작한다. 빨강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를 시로 쓴 소설로 엮어 낸다.

  상상력이 스테시코로스에게 빚을 진 측면이 있겠지만 형식과 이야기의 구조와 완결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이 이야기는 게리온의 시선에서 고전의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소설의 문장보다 시적 언어로 쓰여진 까닭에 함축적이고 미학적이다. 언어를 음미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어린 게리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기에 ‘괴물’의 성장기를 지켜보게 된다.

  우리가 아이에게 ‘괴물’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아이가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행하는 그것처럼 광기적인 절대 악의 모습을 지니지 않아도 또래와의 사귐에 소극적이거나 학교 생활에 부적응하게 되면 그 선에서의 다름을 이유로 괴물이라고도 부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린 게리온은 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행하는 이미지보다 그 나이의 아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괴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지도 모른다.

  다르다. 외면적인 다름을 말하자면 어린 소년 게리온의 어깨엔 작은 빨강 날개가 있다.


네가 약한 아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넌 약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준 후

그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p52~53


  게리온은 커다란 코트로 자신의 날개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게리온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빨강 토마토 위에 10달러 지폐를 찢어 머리카락을 만들어 자서전을 만든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그리고 사춘기에 이르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었고 삶의 세계는 몇눈금 하강했다.“

  다시 한번 제목을 보자면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엔 “로맨스”라는 부제가 있다. 이 로맨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건데 로맨스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필시 게리온의 로맨스라고 짐작할 만한데 그 어디에도 게리온의 이성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좀더 한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바라보면 명백히 헤라클레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삶의 세계의 눈금이 하강했다라고 할 헤라클레스와의 만남은 사춘기의 게리온을, 이후의 게리온의 삶을 변화시킨다. 둘은 사랑의 날을, 로맨스의 나날을 보낸다. 함께 화산을 보러 가며 여러 곳을 여행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내 무심해진다. 게리온에게 실연의 상처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가 아니다.


그의 얼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당한 걸 잠시 잊었다가

이내 기억했다. 토사물이 요동치며

게리온에게로 떨어지다가 그의 썩은 사과 속에 갇혔다. 아침마다 충격이 되돌아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p109


  오랜 시간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지만 헤라클레스 옆에 앙카시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새 연인. 우연한 만남 가운데에서도 세 사람은 서로 어울리고 게리온의 빨강 날개를 보게 된 앙카시는 빨강 날개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빨강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신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미칠 것이다. p173


  앙카시는 헤라클레스와의 삼각점에서는 연적이지만 게리온의 영혼에겐 구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빨강 날개를 감추었던 게리온이지만 앙카시를 통해 빨강 날개의, 자신에 대한 ‘특별함’을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빨강 날개, 날개는 날아오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특별함을 깨달은 게리온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를 것이다.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처음부터 자신의 영웅적 자질에 대해 썼다. 신화 해석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영웅의 여정, 모험담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웅성을 부여받은 이가 온갖 고난을 헤치며 마침내 자신의 ‘소명’을 알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영웅에겐 여행이 필수이다. 그러니 게리온 역시도 여행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로맨스”의 의미에 한발짝 들어가면 서구문학에서 로맨스는 중세의 기사모험담을 말한다. 그러니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로맨스>는 게리온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게리온을 절망에 빠뜨린 건

그가 날개 달린 빨간 사람으로서 인생 초년에 일상으로 받아들인

조롱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정신의 완전한 이탈이었다. p134~135


  게리온은 외면이 남과 다르다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힘겨워했다. 어린 게리온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은 게리온의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게리온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적인 상태에 이른다.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해 갖는 부정, 차별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암흑으로 잠식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름’의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어지고 있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의 주체를 뒤집음으로써 ‘영웅’과 ‘괴물’과 ‘다름’에 대한 생각의 전이를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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