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의 크기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고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인물은 말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야 하는 시대는 환희는 사라지고 온통 폭력이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폭력의 외관에 헷갈렸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폭력이다. 그럭저럭 살아가게 만든다는 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한 열의를, 정의를 빼앗겨 버리거나 지속할 생각이 없이 사는 시대. 그것을 드리운 것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그러한 테두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을 단 단편은 없는 정이현의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전의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 미적거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은 뚜렷하게 선악을 드러내지 않지만, 대놓고 타인에게 삿대질을 한다거나 무엄한 말을 늘어놓지 않지만, 그래서 어쩔 땐 약해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위해를 가한다. 의식하지 않든 아니든 그들은 결정을 미룸으로써, 책임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럭저럭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p139
사는 게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지 따진다면 그것을 묻는다는 게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물음 속에선 이미 대답이 전제한 듯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의 방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타인에게만 정의를, 배려를 강요하는 것은 또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사회가 삶의 최선의 선, 안전선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개인의 ‘행동’ 하나가 폭력인 시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일에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주 무시된다. p152
‘무시’는 타인과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관계치 않으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관계맺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는, 그 관계맺음의 틀을 규정하는 방식을 따로이 설정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는 표면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뻔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된 위선의 이 세계. 그 어떤 아름다운 포장을 하고 있더라도 결국은 포장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서글픔이 가득한 이 시대, 이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말과 행동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가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p31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p182
이렇게 삶이 이어진다. 농도 짙은 애정을 확인할 길 없이 흘러가는 시대. 사랑이, 애정마저도 쉽게 폭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대가 우리를 휘감는다. 예의없음을 상당히 예의있게 내뱉는 이 시대에 삶의 모든 것들에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은 듯 무심을 가장하는 이들에게 삶은 흘러가고 이어진다.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p130
그렇게 남은 생애, 지금 드러난 이 모습이 화석화된다면, 이것이 당연한 일들인 양 삶의 표준으로 남는다면, 그때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소설 속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먼 미래가 그려진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비애의 크기는 위선과 위악 그 중 어디에서 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