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에 가고 싶다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창비, 2009.

 

   이 책에선 빵냄새가 난다. 먹어보지 못한 빵이다. 이내 중독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선두로 우리나라에도 판타지 동화가 급격하게 등장했다. 청소년 소설에서 판타지의 등장은 위저드 베이커리가 처음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위저드 베이커리가 가진 장르적 특성은 다양하다. 다양한 종류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빵처럼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가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이 빵이 만들어진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10년 전 나온 이 빵은 요즘에 먹어도 전혀 옛날이야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신선하고 풍부한 맛이 흘러나온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제목이 환상적인, 예쁘고 아름다운 느낌의 마법의 세계로 안내해줄 거란 이미지는 시작부터 착각이었다. 재혼 가정의 소년이 겪는 갈등이야기가 시작인 듯 보이지만 소년은 이전부터 더 잔인한 파장을 견디어 내는 중이었다. 소년이 겪는 일 또한 판타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소년의 엄마는 자살했고, 자살 전 엄마는 소년을 낯선 길에다 버려두기까지 했다. 아빠는 재혼하고 새엄마와 의붓 여동생 무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갈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소년은 새엄마와 지속적으로 갈등하고 마침내 어린 동생 무희의 성추행범으로 몰려 집을 뛰쳐나온다. 그를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것이 동생 무희의 손가락이다.

  소년이 도망쳐 들어간 곳이 바로 ‘위저드 베이커리’다. 그곳엔 빵집의 분위기만큼이나 수상한 점장이 빵을 굽고 있다. 주문생산제다. 고객이 원하는 빵을 생산해낸다. 그 빵의 종류를 조금 살펴본다면 ‘악마의 시나몬 쿠키’ ‘체인 월넛 프레첼’, ‘부두인형’ ‘타임 리와인더’ 등이다. 이 빵들은 모두 마법의 빵이다. 고객의 욕망이 반영된 빵, 원하는 이를 사랑에 빠뜨리게 하거나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하는 힘을 지녔다. 소년은 빵집에서 기거하며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만난다. 점장은 도대체 이런 빵을 왜 만들어 내는가 싶지만, 점장은 제 욕망에 기인한 마법의 빵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은 채 소년은 이 빵집에서 위로와 충고를 얻는다. 언뜻 보기엔 소년의 집이나 빵집이나 기괴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소년이 선택하는 빵은 어떤 것일까. 이 다양한 빵 중에, 마법의 힘을 지닌 빵 중에서 소년의 욕망과 맞닿아 있는 빵은 무얼까. 삶의 위안을 얻게 된 빵집에서 소년은 계속 머무를 수는 있는 걸까.

  소년이 빵을 선택한 틈도 없이 점장은 소년에게 빵을 선물한다. ‘타림 리와인더’. 소년은 이 선물을 받아들고 어떤 시간으로 되돌아갈까. 소년에게 가장 힘든 시간의 어느날로 돌아간다면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그 시간은 언제가 될까. 무희가 자신을 지목했을 때일까. 이휘재가 나왔던 인생극장처럼 “그래 결심했어”의 순간, Y or N의 두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년이 빵을 먹으려는 순간은 역시 그 순간, 새엄마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무희와의 일이 있던 그 순간이다. Y가 빵을 먹는 것에 성공한 경우 소년은 6살 때로 돌아가 새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지 않도록 막고 부자가 함께 사는 것으로, N은 먹는데 실패한 경우로 아빠는 감옥에 새엄마와 무희와는 따로 사는 삶으로 결정된다. 소년은 어떤 삶을 원할까.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p200~201


  소년의 가슴 아픈 경험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결국 작가가 말하고픈 빵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나 한다. 선택과 책임. 욕망에 대해서도 가져야 할 책임. 그렇기에 마법의 빵을 생산하면서도 잊지 않았던 ‘저주’를 걸어 두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해 떠올리는 때가 많다. 우습게도 되돌아가고픈 순간은 어찌나 많은지. 지금 내 삶을 과거의 결정탓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타임 리와인더를 먹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까. 물론, 지금과 같은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 날엔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가져온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가져온 뒷날의 삶에 대해서는 또 지난 뒷날에 후회가 없을까, 책임을 전가하진 않을까.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p63


  그건 그거고. 소설 속 어른들의 선택과 책임은 분명 문제였다. 삶의 고통이 어떠했을 지 남의 고통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을 속인들의 특성이라고 치고, 소년을 버리고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한 엄마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면서 재혼 자녀에게 서슴지 않고 냉대를 행하는 새엄마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들이 고통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빠나 그들이 행한 ‘결혼’으로 이어질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자세가 엉망이었다. 하나의 욕망만을 원하고 그 욕망에 따르는 책임은 지려 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일들이 행하는 잘못의 전형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가끔, 위저드 베이커리에 들리고픈 욕망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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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되고 싶은 시간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예담, 2016.9.5.


 배터리 폭발로 세계 곳곳에서 폭발 소식을 안겼던 삼성이 새롭게 모델을 출시했다고 그것은 실패한 모델과 달리 진일보한 상품이라며 언론에 하루종일 오르내렸다. 창업주가, 소유주가 구속되면 나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는데, 잘 나가네, 더불어 그래봤자 휴대폰의 세계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한 열심히 수식해댄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하긴 이 말도 가전제품이며 전자기기에 수없이 활용되었던 만큼 굳이 놀랄 일은 아니다. 단지 인공지능이라면 로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반사작용 때문이기도, 그래서 휴대폰과 인공지능의 어울림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인공지능=로봇. 이런 도식은 어쩌다 생겨난 것인지. 하지만 오늘의 이 단어로 인해 불완전한 인공지능 로봇 은결이 떠올랐다.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갔을 때 한두 주쯤 반짝 관심을 보이곤 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p29 


  새로 출시된 저 모델도 신기해하고 바짝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덧 낡은 모델로 분류될 것이다. 모든 기기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하지만 인간이라고 뭐 다를 리 있는가. 늙으면 병들면, 폐기하는 것이 당연한 듯 아니, 애잔함이 남아 있더라도 골치 아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은 모델명 ROBO-a1318b에서 은결이란 이름을 갖게 된 로봇의 한 스푼의 시간의 이야기다. 세탁서 주인 명정은 외국에서 사고로 사망한 아들 이름으로 보내온 택배 상자속에서 17세 소년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로봇과 만난다. 조그만 동네 세탁소에서 은결은 명정의 가르침을 배우며 세탁소 일을 돕고, 또한 주위의 아이들과 관계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 아이들 모두 각각의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가고 은결은 고스란히 그들의 모든 삶과 마주한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57


 입력된 정보만을 처리하며 단순하게 작동할 것만 같은 은결은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듯 은결만의 지능을 가동하며 거기에 감성의 기능을 더해 간다. 그렇게 불쑥불쑥 은결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배움을 또한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은 커가고 명정은 더욱 늙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겪는 동안 은결도 시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느끼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p249


  인간이 성장할수록 퇴화되는 기계로서의 은결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은결의 시선이 가득하다. 은결 또한 그 희로애락을 느낀다. 이런 감정의 반응을 은결 스스로는 오류라 인지하긴 하지만. 세탁소에서 그렇게 명정이 사망해도 아이들이 성장하여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오랜 시간이 지난다. 그래봐야 우주 137억년에 비하면 세제 한스푼이 녹는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긴 하지만, 은결의 그 시간이 제 가족들을 형성하고 보내는 노년의 부모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모두 떠나 버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듯한 은결의 모습은……. 여전히 은결은 살아, 있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은결의 이름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며 애잔하고 오래도록 슬픈 기분이 든다.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고…. 삶은 계란에서 느끼는 은결의 느낌처럼 삶은 은결이 느끼는 것처럼 그런 거라고 말하는 명정의 말처럼 이 소설도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다. 이 느낌을 은결에게 가서, 명정의 세탁소에서 세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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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 깃든 말


파과,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3..


  제목을 보고서 폭력적이고 잔인한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작가가 시작부터 써놓은 으깨진 과일을 두고서도 전혀, 과일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을 꽃과 과일에 빗대어 좋은 이미지로도 나쁜 이미지로도 표현하고 있으니까. 청소년 소설로 등단한 작가지만 그 책에서도 이미 폭력에 관한 판타지소설을 전개했기에 이 제목 아래 실로 적나라한 폭력과 마주하는 것은 아닌가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적중했다. 폭력은 있었다. 다만,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행하는 쪽이었을 뿐. 단순 폭력행사자가 아니라, 킬러다. 그리고 그 일을 벌써 45년이나 해왔다. 이름마저도 각이 반듯하게 진듯한 느낌의 ‘조각’이다. 그녀는 그 일을 방역업이라 불렀다. 조각이 이 일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당연 폭력을 당한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외국인 병사로부터 당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다가 그녀가 가진 ‘힘’이 더 컸던 탓에, 전격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 소설은 미드에서나 볼 만한 65세의 여성노인이 여전히 현장에서 킬러 활동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방역업의 대모로 자리잡은 조각 여사의 일대기라고 할 것이다. 다만 한창 전성기로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쇠해가는 신체로 인해 겪는 심리와 현재의 상황에 더 방점을 둔다. 어쨌든, 외롭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부탁받은 이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조각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단했다. 자신보다 30년이나 어린 의사에게서 연정을 갖게 되는 것까지, 우리나라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님엔 분명하다.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각 여사가 처리한 인물만해도 한둘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 몸짱대회에 나가면 우승할만큼의 탄탄한 신체를 가졌다. 비록 이제 늙어가고 있지만.

  대체로 킬러를 다룬 많은 이야기들에서 킬러는 남자이고 특정한 ‘여인’으로 인해 감화된다. 그리하여 삶의 변화를 겪거나 죽게 된다. 그 죽음은 자의적 선택이고 그 선택은 마음을 주게 된 여인의 안위를 위해서인데, 여기 소설 속 주인공 조각 여사도 그 길을 그대로 간다. 그리고 조각 여사의 안티는 그녀가 제거했던 이의 아이로 커서 복수를 노리는 뭐 그런. 성별을 바꾸면 익숙하게 영화속에서 보아 온 킬러의,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따른다.

  소설 속에서 놀랍게 기억되는 장면은 조각 여사의 생사를 알듯 말듯한 사건 이후에 등장한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단장한다. 원장과 직원의 자부심처럼 그것은 케어이고 아트이다. 아무에게도 보여 줄 리는 없지만, 언뜻 누군가 보게 되더라도 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수군댄다 해도 하등 상관없을 그 손톱. 그 단장을 조각 여사는 마음에 들어한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네일아트를 바라보며 거리를 지날 때 정작 그녀에게 매니큐어를 해준 막내 직원은 훌쩍이고 있다. 그 아트를 무려 반값으로 계산했다고 욕을 먹은 탓에. 막내 직원의 변명이 압권이다. 그 손님, 그러니까 조각 여사의 왼손이 없었다고.

  일단 주인공이 킬러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직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제쳐두고서 소설을 보자면. 그래서 왜 파과인가.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333

 

  소설은 破果의 이미지를 간간히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조각이 바라보는 흐물어져 형체를 알기 힘들어진 과일처럼. 이 이미지는 그렇기에 애잔함을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단어 속엔 또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으니 빛나는 시절, 순간을 갖는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처럼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빛나는 순간이란 깨지고 사그라지는 순간에 빗대어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니까.

  나아가,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데 놀란다. 같은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여자 나이 16세, 남자 나이 64세를 가리킨다는 파과의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면서도 의미의 어원이 형성된 것을 보면서도 의문이 더해진다. “‘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이 두 개가 되는데” 이를 더하면 16이라 여자는 16세이고 곱하면 64가 되기에 남자는 64세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와 닿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이것의 기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왜 여자는 더하고 남자는 곱해야 하는지. 빛나는 순간조차도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상이하다는 뭐 그런 말인가. 여자의 빛나는 순간은 16세이고, 남자는 64세라는 말인가. 여자는 16세가 되면, 남자는 나이 64세가 되어야 비로소 으깨어진 나이란 말인가. 옛날 결혼적령기라고 적힌 것에서 피식 웃음마저 나온다. 이렇게도 사용하면서 남자 나이는 왜 64세라고 굳이 만들어내는 것인지.  

  파과의 의미를 破果로 보느냐 破瓜로 보느냐에 소설의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냥 파과라는 단어에 푹 담겨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또한번 그냥 흘려보지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단어들에 매여 특정한 나이에 습관적 우울증이 배가되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너무 민감하다. 내가 그런가.

  흠집이 나든 으깨어지든 인생이 흐물어지는 시기든, 어느 한때 빛나는 시절은 있을 것이니 그 시절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그러나 그 시절에 집착하지 않는 한때를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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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존재들


아무도 아닌, 황정은 저


 

독자들이 좋아하는, 황정은 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이다. 많은 작가들이 고유의 문체와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황정은 작가 역시 단연코 그 독특함에서 빠지지 않는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할 것 없이 느낌상 ‘아, 이것은 황정은의 글이야’라고 알아챌 것 같으니, 작가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 스타일을 지지받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싶다.

  이 단편집에 흐르는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미지칭의 단어처럼 관계의 단절과 고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재조차 흐릿해지는 누군가를 보는. 하지만 그들이 흐릿해져가는 과정은 너무도 명확하게 주위에서 보고 들은 일이라, 또한 ‘나’가 겪는 일이라 슬프고 섬뜩해지기까지 하는.

  작가는 단편집이 시작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도 아닌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이라 읽는다고. 아무도면 어떻고 아무것도면 어떻게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너무도 큰 외면이 될 것이고. 말 한마디의 차이가 갖는 놀라움을 의미를 생각한다면, 작가의 이 말로 인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단편집의 분위기로 차곡차곡 걷게 될 것이다. 아무도와 아무것도를 연이어 되새김질하면서.

  그와 함께 각 단편집의 제목들을 곱씹는 맛이 단편을 읽는 것과 한발 먼저 나간다. 가령 「양의 미래」에서 화자는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p53)"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단편집의 제목이 나왔나 생각하게끔 하는데, 그렇다면 이 「양의 미래」는 왜 「양의 미래」인가하는 물음을 갖는다. 「上行」은 왜 「下行」이 아닌가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뒤늦게야 「명실」의 제목이 처음에는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양의 미래」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제쳐두고 「명실」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찾아 간다.

  어쨌든, 누구도 아무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 분명 그곳에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삶을 사는 세상을 맞닥뜨린 듯하다. 이것은 주체적 삶인가, 객체적 삶인가 헷갈릴 정도다. 선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냥 지금의 삶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보인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上行」중


  시골에서 고추를 따고 서울로 다시 가는 이야기,「上行」속의 고추밭 주인의 외침처럼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결코 관계맺음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느낌이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픈 울림이 되어 자리잡는다. 이렇게 살아가다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고 마침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미래는 아무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양의 미래」 속 화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양의 미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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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속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

 

제비뽑기 The Lottery And Other Stories

셜리 잭슨, 엘릭시르, 2014.

 

  공포와 광기의 작가라 불리는 셜리 잭슨의 대표적인 단편집이다. 연결된 이야기로 읽다가 무언가 아리송함을 발견하여 다시 보고 단편집임을 알았다. 단편임을 알았다면 각 단편을 완료된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텐데, 단편이라 생각지 않아서인지 각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다. 묘하게, 그렇게 연결짓는 이미지가 있었다.

   우선 형식에서 마치 장편인 것처럼 각 단편을 5부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다. 각각이 독립적인 이야기라면 굳이 이러한 구분을, 분류의 필요성이 있을까. 아마도 이 구분이 읽으면서 장편이라는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요인일 것이다.

   내용 측면에선 셜리 잭슨이라는 작가하면 떠올려지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저자 특유의 이미지, 셜리 잭슨만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셜리 잭슨을 부르는 또다른 호칭은 마녀. 이 단편집은 1부에서 5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의 앞장엔 조지프 글랜빌의사두키스무스 트리움파투스를 발췌하고 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각각의 단편들에도 이 마녀재판의 이야기를, 이미지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향하는 이야기의 틀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편집의 제목인 제비뽑기는 매년 미국 문학 교과서에 실린다고 하며 평론가들은 작가에 대해 미치광이 아니면 천재라 일컫게 해준 작품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이 심리적 공포와 광기를 묘사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이 단편집은 오히려 가벼움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그 속에, 저자 특유의 조이는 듯한 어두운 이미지가 드러난다.

   또한 작품 속엔 제임스 해리스라는 이름이, 푸른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에 이야기의 연속성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반복된 이 이름과 이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가 의미하는 것, 이것도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단편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까도 이런 사람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사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인되어 있을 때마다 작은 소름이 돋으려 한다. 이 이미지와 이름은 마녀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듯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진 않는다. 단편집마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문제와 관계된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에서 혹은 스쳐가면서도 꼭 그렇게, ‘을 만들어 버린다. 관계의 갈등을 촉발하게끔, 인식을 전환하게끔 하는 것이다.

   단편 마녀에서처럼 평범하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선 아이에게 끔찍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의 모든 단편에서 평범한 모습을 한 채 내뱉는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글로 읽어도 기가 막힌데, 직접 경험한다고 하면 더욱 놀라우리라 여겨진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맘 속에 불쑥 스며드는 공포와 불안, 이것을 조장하는 제임스,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 중 몇은 이들을 통해 환기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욕망을 알아서, 거기에 기대어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매우 충격적이면서 놀라운 작품이라 일컬어지는제비뽑기는 마을의 축제에서 시작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일상의 풍경이 별스럽지 않게 드러나는 가운데 축제의 절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게 눈깜짝할 새, 경악스런 일이 벌어진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며 이뤄지는 제비뽑기 행사. 행사에서 제비뽑기를 굳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왜 제비뽑기가 이뤄지는지 드러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너무도 특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아 더 놀라운 사건이다. 표면에 악이라고 달고 있다면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전혀 선한 얼굴을 들이밀어 나타난 공포에 휩쓸리니 더욱 공포와 광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 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 ”새파랗게 젊은 조 서머스가 모두와 농담을 해대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하건만.“

어떤 곳에서는 이미 제비뽑기를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애덤스 씨가 말했다. 그래봐야 문제만 생겨.” 워너 영감은 단호히 말했다. “요새 젊은 것들이란.” p397

 

   작가 셜리 잭슨은 미학적 의미에서, 문학적인 은유로서의 마녀이외, 실제로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 마녀로 취급당했다 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호러 미스터리에, 집단 광기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일 게다. 제비뽑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집단적 광기의 덤덤한 표출은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녀로 덧씌워진 셜리 잭슨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의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제비뽑기의 모습과 겹친다. 특정한 집단의 논리가 제임스 해리스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한발만 달리 뻗으면 극과 극의 논리를 겪게 되는 광장에선 310,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광장은 90여일 동안 진정한 축제였고 평화로웠다. 토론과 주장이 맞물리며 옳고 그름, 다름을 논의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고 다지는 자리였다. 논리와 신념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의 신념을 인정하는 방법을 아는 자, 상식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의 행사는 순조로웠다. 어느 순간 불거진 광장의 이야기에 제임스 해리스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몇몇의 제임스 해리스들이 등장하여 순수한 신념을 가진 이의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다만, 그들은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제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들을 광기에 물들게 했다. 타당한 논리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책임을 가진 지위와 역할은 던져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도 망각한 채로 제비뽑기를 준비하던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실과 진실을 인지하며 어쩌면 생각을 재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이들의 결말을 방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특정 단어만을 반복한 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선동으로 사람들을 공포와 광기에 담가놓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마녀사냥을 부르짖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가지는 집단 광기와 공포의 잔혹함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추상적인 공포에 기대어 희생양을 삼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특정한 이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마녀사냥이라는 말 속에는 어리석은 이들과 공포를 이용·조장하여 제 이익을 꾀하는 이에 대한 분노도 더해진다. 어쨌든 역사 속 마녀재판이라 불리는 사건들 속엔 분명 억울한 마녀가 존재했다.

   특정인이 부르짖는 이 마녀재판이라는 말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마녀재판이라는 말 속에 담긴 억울함이 호도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과연 마녀재판일까.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지만 제비뽑기가 전하는 충격만큼이 전달되지 않는다. 짜증만이 날 뿐이다. 어떤 이들의 사전엔 단어의 정의가 제멋대로, 내 이익대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학력은 학벌은 정의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지 않는다. 욕망과 탐욕이 공포와 광기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씁쓸하다. 참으로 기쁜 날인데, 참으로 시원스러운 날인데 조금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은 몰상식과 몰인간성을 여전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단어 사전을 들고 권력과 재력으로 무장하고선 그것을 더 연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성을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불쾌한 제임스 해리스들, 푸른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지금도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제비뽑기를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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