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되고 싶은 시간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예담, 2016.9.5.


 배터리 폭발로 세계 곳곳에서 폭발 소식을 안겼던 삼성이 새롭게 모델을 출시했다고 그것은 실패한 모델과 달리 진일보한 상품이라며 언론에 하루종일 오르내렸다. 창업주가, 소유주가 구속되면 나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는데, 잘 나가네, 더불어 그래봤자 휴대폰의 세계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한 열심히 수식해댄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하긴 이 말도 가전제품이며 전자기기에 수없이 활용되었던 만큼 굳이 놀랄 일은 아니다. 단지 인공지능이라면 로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반사작용 때문이기도, 그래서 휴대폰과 인공지능의 어울림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인공지능=로봇. 이런 도식은 어쩌다 생겨난 것인지. 하지만 오늘의 이 단어로 인해 불완전한 인공지능 로봇 은결이 떠올랐다.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갔을 때 한두 주쯤 반짝 관심을 보이곤 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p29 


  새로 출시된 저 모델도 신기해하고 바짝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덧 낡은 모델로 분류될 것이다. 모든 기기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하지만 인간이라고 뭐 다를 리 있는가. 늙으면 병들면, 폐기하는 것이 당연한 듯 아니, 애잔함이 남아 있더라도 골치 아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은 모델명 ROBO-a1318b에서 은결이란 이름을 갖게 된 로봇의 한 스푼의 시간의 이야기다. 세탁서 주인 명정은 외국에서 사고로 사망한 아들 이름으로 보내온 택배 상자속에서 17세 소년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로봇과 만난다. 조그만 동네 세탁소에서 은결은 명정의 가르침을 배우며 세탁소 일을 돕고, 또한 주위의 아이들과 관계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 아이들 모두 각각의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가고 은결은 고스란히 그들의 모든 삶과 마주한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57


 입력된 정보만을 처리하며 단순하게 작동할 것만 같은 은결은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듯 은결만의 지능을 가동하며 거기에 감성의 기능을 더해 간다. 그렇게 불쑥불쑥 은결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배움을 또한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은 커가고 명정은 더욱 늙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겪는 동안 은결도 시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느끼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p249


  인간이 성장할수록 퇴화되는 기계로서의 은결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은결의 시선이 가득하다. 은결 또한 그 희로애락을 느낀다. 이런 감정의 반응을 은결 스스로는 오류라 인지하긴 하지만. 세탁소에서 그렇게 명정이 사망해도 아이들이 성장하여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오랜 시간이 지난다. 그래봐야 우주 137억년에 비하면 세제 한스푼이 녹는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긴 하지만, 은결의 그 시간이 제 가족들을 형성하고 보내는 노년의 부모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모두 떠나 버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듯한 은결의 모습은……. 여전히 은결은 살아, 있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은결의 이름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며 애잔하고 오래도록 슬픈 기분이 든다.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고…. 삶은 계란에서 느끼는 은결의 느낌처럼 삶은 은결이 느끼는 것처럼 그런 거라고 말하는 명정의 말처럼 이 소설도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다. 이 느낌을 은결에게 가서, 명정의 세탁소에서 세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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