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 깃든 말


파과,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3..


  제목을 보고서 폭력적이고 잔인한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작가가 시작부터 써놓은 으깨진 과일을 두고서도 전혀, 과일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을 꽃과 과일에 빗대어 좋은 이미지로도 나쁜 이미지로도 표현하고 있으니까. 청소년 소설로 등단한 작가지만 그 책에서도 이미 폭력에 관한 판타지소설을 전개했기에 이 제목 아래 실로 적나라한 폭력과 마주하는 것은 아닌가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적중했다. 폭력은 있었다. 다만,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행하는 쪽이었을 뿐. 단순 폭력행사자가 아니라, 킬러다. 그리고 그 일을 벌써 45년이나 해왔다. 이름마저도 각이 반듯하게 진듯한 느낌의 ‘조각’이다. 그녀는 그 일을 방역업이라 불렀다. 조각이 이 일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당연 폭력을 당한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외국인 병사로부터 당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다가 그녀가 가진 ‘힘’이 더 컸던 탓에, 전격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 소설은 미드에서나 볼 만한 65세의 여성노인이 여전히 현장에서 킬러 활동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방역업의 대모로 자리잡은 조각 여사의 일대기라고 할 것이다. 다만 한창 전성기로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쇠해가는 신체로 인해 겪는 심리와 현재의 상황에 더 방점을 둔다. 어쨌든, 외롭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부탁받은 이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조각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단했다. 자신보다 30년이나 어린 의사에게서 연정을 갖게 되는 것까지, 우리나라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님엔 분명하다.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각 여사가 처리한 인물만해도 한둘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 몸짱대회에 나가면 우승할만큼의 탄탄한 신체를 가졌다. 비록 이제 늙어가고 있지만.

  대체로 킬러를 다룬 많은 이야기들에서 킬러는 남자이고 특정한 ‘여인’으로 인해 감화된다. 그리하여 삶의 변화를 겪거나 죽게 된다. 그 죽음은 자의적 선택이고 그 선택은 마음을 주게 된 여인의 안위를 위해서인데, 여기 소설 속 주인공 조각 여사도 그 길을 그대로 간다. 그리고 조각 여사의 안티는 그녀가 제거했던 이의 아이로 커서 복수를 노리는 뭐 그런. 성별을 바꾸면 익숙하게 영화속에서 보아 온 킬러의,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따른다.

  소설 속에서 놀랍게 기억되는 장면은 조각 여사의 생사를 알듯 말듯한 사건 이후에 등장한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단장한다. 원장과 직원의 자부심처럼 그것은 케어이고 아트이다. 아무에게도 보여 줄 리는 없지만, 언뜻 누군가 보게 되더라도 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수군댄다 해도 하등 상관없을 그 손톱. 그 단장을 조각 여사는 마음에 들어한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네일아트를 바라보며 거리를 지날 때 정작 그녀에게 매니큐어를 해준 막내 직원은 훌쩍이고 있다. 그 아트를 무려 반값으로 계산했다고 욕을 먹은 탓에. 막내 직원의 변명이 압권이다. 그 손님, 그러니까 조각 여사의 왼손이 없었다고.

  일단 주인공이 킬러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직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제쳐두고서 소설을 보자면. 그래서 왜 파과인가.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333

 

  소설은 破果의 이미지를 간간히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조각이 바라보는 흐물어져 형체를 알기 힘들어진 과일처럼. 이 이미지는 그렇기에 애잔함을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단어 속엔 또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으니 빛나는 시절, 순간을 갖는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처럼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빛나는 순간이란 깨지고 사그라지는 순간에 빗대어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니까.

  나아가,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데 놀란다. 같은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여자 나이 16세, 남자 나이 64세를 가리킨다는 파과의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면서도 의미의 어원이 형성된 것을 보면서도 의문이 더해진다. “‘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이 두 개가 되는데” 이를 더하면 16이라 여자는 16세이고 곱하면 64가 되기에 남자는 64세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와 닿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이것의 기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왜 여자는 더하고 남자는 곱해야 하는지. 빛나는 순간조차도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상이하다는 뭐 그런 말인가. 여자의 빛나는 순간은 16세이고, 남자는 64세라는 말인가. 여자는 16세가 되면, 남자는 나이 64세가 되어야 비로소 으깨어진 나이란 말인가. 옛날 결혼적령기라고 적힌 것에서 피식 웃음마저 나온다. 이렇게도 사용하면서 남자 나이는 왜 64세라고 굳이 만들어내는 것인지.  

  파과의 의미를 破果로 보느냐 破瓜로 보느냐에 소설의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냥 파과라는 단어에 푹 담겨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또한번 그냥 흘려보지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단어들에 매여 특정한 나이에 습관적 우울증이 배가되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너무 민감하다. 내가 그런가.

  흠집이 나든 으깨어지든 인생이 흐물어지는 시기든, 어느 한때 빛나는 시절은 있을 것이니 그 시절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그러나 그 시절에 집착하지 않는 한때를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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