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존재들


아무도 아닌, 황정은 저


 

독자들이 좋아하는, 황정은 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이다. 많은 작가들이 고유의 문체와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황정은 작가 역시 단연코 그 독특함에서 빠지지 않는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할 것 없이 느낌상 ‘아, 이것은 황정은의 글이야’라고 알아챌 것 같으니, 작가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 스타일을 지지받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싶다.

  이 단편집에 흐르는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미지칭의 단어처럼 관계의 단절과 고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재조차 흐릿해지는 누군가를 보는. 하지만 그들이 흐릿해져가는 과정은 너무도 명확하게 주위에서 보고 들은 일이라, 또한 ‘나’가 겪는 일이라 슬프고 섬뜩해지기까지 하는.

  작가는 단편집이 시작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도 아닌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이라 읽는다고. 아무도면 어떻고 아무것도면 어떻게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너무도 큰 외면이 될 것이고. 말 한마디의 차이가 갖는 놀라움을 의미를 생각한다면, 작가의 이 말로 인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단편집의 분위기로 차곡차곡 걷게 될 것이다. 아무도와 아무것도를 연이어 되새김질하면서.

  그와 함께 각 단편집의 제목들을 곱씹는 맛이 단편을 읽는 것과 한발 먼저 나간다. 가령 「양의 미래」에서 화자는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p53)"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단편집의 제목이 나왔나 생각하게끔 하는데, 그렇다면 이 「양의 미래」는 왜 「양의 미래」인가하는 물음을 갖는다. 「上行」은 왜 「下行」이 아닌가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뒤늦게야 「명실」의 제목이 처음에는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양의 미래」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제쳐두고 「명실」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찾아 간다.

  어쨌든, 누구도 아무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 분명 그곳에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삶을 사는 세상을 맞닥뜨린 듯하다. 이것은 주체적 삶인가, 객체적 삶인가 헷갈릴 정도다. 선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냥 지금의 삶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보인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上行」중


  시골에서 고추를 따고 서울로 다시 가는 이야기,「上行」속의 고추밭 주인의 외침처럼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결코 관계맺음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느낌이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픈 울림이 되어 자리잡는다. 이렇게 살아가다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고 마침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미래는 아무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양의 미래」 속 화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양의 미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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