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속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
제비뽑기 The Lottery And Other Stories
셜리 잭슨, 엘릭시르, 2014.
공포와 광기의 작가라 불리는 셜리 잭슨의 대표적인 단편집이다. 연결된 이야기로 읽다가 무언가 아리송함을 발견하여 다시 보고 단편집임을 알았다. 단편임을 알았다면 각 단편을 완료된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텐데, 단편이라 생각지 않아서인지 각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다. 묘하게, 그렇게 연결짓는 이미지가 있었다.
우선 형식에서 마치 장편인 것처럼 각 단편을 5부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다. 각각이 독립적인 이야기라면 굳이 이러한 구분을, 분류의 필요성이 있을까. 아마도 이 구분이 읽으면서 장편이라는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요인일 것이다.
내용 측면에선 셜리 잭슨이라는 작가하면 떠올려지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저자 특유의 이미지, 셜리 잭슨만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셜리 잭슨을 부르는 또다른 호칭은 ‘마녀’다. 이 단편집은 1부에서 5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의 앞장엔 조지프 글랜빌의『사두키스무스 트리움파투스』를 발췌하고 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각각의 단편들에도 이 ‘마녀재판’의 이야기를, 이미지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향하는 이야기의 틀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편집의 제목인 「제비뽑기」는 매년 미국 문학 교과서에 실린다고 하며 평론가들은 작가에 대해 “미치광이 아니면 천재”라 일컫게 해준 작품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이 심리적 공포와 광기를 묘사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이 단편집은 오히려 가벼움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그 속에, 저자 특유의 조이는 듯한 어두운 이미지가 드러난다.
또한 작품 속엔 제임스 해리스라는 이름이, 푸른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에 이야기의 연속성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반복된 이 이름과 이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가 의미하는 것, 이것도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단편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까도 이런 사람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사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인되어 있을 때마다 작은 소름이 돋으려 한다. 이 이미지와 이름은 마녀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듯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진 않는다. 단편집마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문제’와 관계된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에서 혹은 스쳐가면서도 꼭 그렇게, ‘일’을 만들어 버린다. 관계의 갈등을 촉발하게끔, 인식을 전환하게끔 하는 것이다.
단편 「마녀」에서처럼 평범하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선 아이에게 끔찍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의 모든 단편에서 평범한 모습을 한 채 내뱉는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글로 읽어도 기가 막힌데, 직접 경험한다고 하면 더욱 놀라우리라 여겨진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맘 속에 불쑥 스며드는 공포와 불안, 이것을 조장하는 제임스,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 중 몇은 이들을 통해 환기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욕망을 알아서, 거기에 기대어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매우 충격적이면서 놀라운 작품이라 일컬어지는「제비뽑기」는 마을의 축제에서 시작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일상의 풍경이 별스럽지 않게 드러나는 가운데 축제의 절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게 눈깜짝할 새, 경악스런 일이 벌어진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며 이뤄지는 제비뽑기 행사. 행사에서 제비뽑기를 굳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왜 제비뽑기가 이뤄지는지 드러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너무도 특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아 더 놀라운 사건이다. 표면에 악이라고 달고 있다면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전혀 선한 얼굴을 들이밀어 나타난 ‘악’에 ‘공포’에 휩쓸리니 더욱 공포와 광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 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 ”새파랗게 젊은 조 서머스가 모두와 농담을 해대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하건만.“
“어떤 곳에서는 이미 제비뽑기를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애덤스 씨가 말했다. “그래봐야 문제만 생겨.” 워너 영감은 단호히 말했다. “요새 젊은 것들이란.” p397
작가 셜리 잭슨은 미학적 의미에서, 문학적인 은유로서의 ‘마녀’ 이외, 실제로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 ‘마녀’로 취급당했다 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호러 미스터리에, 집단 광기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일 게다. 「제비뽑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집단적 광기의 덤덤한 표출은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녀’로 덧씌워진 셜리 잭슨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의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제비뽑기의 모습과 겹친다. 특정한 집단의 논리가 제임스 해리스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한발만 달리 뻗으면 극과 극의 논리를 겪게 되는 광장에선 3월 10일,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광장은 90여일 동안 진정한 축제였고 평화로웠다. 토론과 주장이 맞물리며 옳고 그름, 다름을 논의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고 다지는 자리였다. 논리와 신념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의 신념을 인정하는 방법을 아는 자, 상식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의 행사는 순조로웠다. 어느 순간 불거진 광장의 이야기에 제임스 해리스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몇몇의 제임스 해리스들이 등장하여 순수한 신념을 가진 이의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다만, 그들은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제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들을 광기에 물들게 했다. 타당한 논리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책임을 가진 지위와 역할은 던져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도 망각한 채로 제비뽑기를 준비하던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실과 진실을 인지하며 어쩌면 생각을 재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이들의 결말을 방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특정 단어만을 반복한 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선동으로 사람들을 공포와 광기에 담가놓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마녀사냥을 부르짖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가지는 집단 광기와 공포의 잔혹함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추상적인 공포에 기대어 희생양을 삼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특정한 이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마녀사냥이라는 말 속에는 어리석은 이들과 공포를 이용·조장하여 제 이익을 꾀하는 이에 대한 분노도 더해진다. 어쨌든 역사 속 마녀재판이라 불리는 사건들 속엔 분명 억울한 ‘마녀’가 존재했다.
특정인이 부르짖는 이 ‘마녀재판’이라는 말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마녀재판이라는 말 속에 담긴 억울함이 호도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과연 “마녀재판”일까.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지만 제비뽑기가 전하는 충격만큼이 전달되지 않는다. 짜증만이 날 뿐이다. 어떤 이들의 사전엔 단어의 정의가 제멋대로, 내 이익대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학력은 학벌은 정의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지 않는다. 욕망과 탐욕이 공포와 광기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씁쓸하다. 참으로 기쁜 날인데, 참으로 시원스러운 날인데 조금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은 몰상식과 몰인간성을 여전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단어 사전을 들고 권력과 재력으로 무장하고선 그것을 더 연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성을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불쾌한 제임스 해리스들, 푸른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지금도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제비뽑기를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