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모르고 살았을까

 

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저, 이승원 사진, 추수밭, 2015.

 

  

  50편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펼쳐진 에세이다. 사진과 이야기는 그림자를 달고 있다. 이야기는 문학비평가 정여울의 시선으로 사진은 작가 이승원이 시선이 담겼다. 사진은 아련한 느낌이 드는 풍경과 인물들 위주다. 이국의 모습.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보면서 아련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련함이란 경험의 측면에서 그리움을 동반한 느낌일 터인데,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다니. 이 책속 사진과 글들이 그런 아련함으로 내내 따라다녔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 그림자가, 보기 좋았다.

   <그림자 여행>이라는 책제목의 부제는 ‘내가 꿈꾸는 강인함’이다. 그림자 여행도 여행일테니 여행속에서 맞이하는 감상의 글인가 했다. 결국 이것은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길고 깊고 멀다. 그림자를 마주하는 여행의 본질적인 목적이 ‘나를 알기’ 나도 모르는 트라우마를 걷어내기인 것처럼 강인함을 외치는 이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일까.

   여기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모습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로서의 삶과 글쓰기와 독서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살아가면서 받게 된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내가 그랬구나’ ‘나는 그렇다’라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나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굳어 온 습관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자 변하고픈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이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이려는’ 모습이 따로 있다. ‘보여야 하는’ 부분만 보인다. 그 외의 것은 꼬옥 숨겨둔 채 더욱 더 깊이 처박아 두게 된다. 사회에서 우리는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나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더러 그것이 ‘나’인 양 지내다가 하릴없는 무기력과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고서는 묻는다.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지?

 

어떤 뼈아픈 자극 없이는, 사람들은 좀처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할수록 아프다는 것을, 그 아픔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때에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스스로 묻어 두고 밟아 두었던 수많은 나날들의 내 모습이 감정이 구겨지고 헝클어져 곪은 상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와 더욱 큰 상처를 만들어 가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자잘해 보이던, 심지어 하찮아 보이던 작은 선택들이 천천히 만들어온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나를 만든 것은 어떤 ‘굵직 굵직한 순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하게 된다.

 

   나를 안다는 것, 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 고통을 동반한 것이듯 그 결과 또한 고통이 소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그림자. 그것을 마주하고 그 그림자를 끌어안을 때에야 비로소 나에 대해서 알았다고,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자를 찾는 일도 그림자를 끌어안는 일도 힘겨운 일이기에 많은 나날 외면해 왔던 것이라면 생은 그림자를 알아도 그림자를 외면해도 늘 고통과 상처에 놓인 존재가 된다. 조금 더 편안하게 이 상처를 마주하고 상처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런 길도 있음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직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칠흑 같은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캄캄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의 사생활을 목격했다. 달빛 아래 고요히 드러난 처연한 낙화의 풍경은 할로겐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보다 더 눈부셨다. 그때 나는 눈을 아프게 하는 압도적인 불빛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래의 빛깔을 끌어내는 '어둠속의 빛'을 보는 법을 배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어엿한 빛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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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안식처일 수 있을까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RHK, 2013.

 

 

   37편의 문학과 연극, 영화에서 뽑은 사랑, 연애, 이별, 인연에 대한 이야기.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 작품으로부터 사랑이야기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 그 속엔 연애와 이별과 인연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정여울의 이 에세이는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서인지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문학비평이나 다른 비평에세이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결에서 차이가 있다.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가 보다 감성적이다. 사회학과 비평 용어로의 설명 대신에 문학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접근하는 평범한 생각들을 전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여울은 현대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사랑이 안식처일 수만 있을까. 사랑이 지닌 의미 때문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사랑이란 수만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사용된 사람에 의해 각각의 의미를 만들곤 한다. 그 다른 사랑의 모습은 타인에게 갈망을 공감을 느끼게도 거부를 느끼게도 한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에도 옳고 그름의 문제는 있다. 흔하게 얘기되는 불륜과 폭력이 동반된 그런 류를 ‘사랑’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덧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가 어렵다. 아직 옛사랑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성복 시인의 시 편지의 끝 문장에서 따온 에세이의 제목은 “잘 있지 말아요”다. ‘잘 있지 말아요’란 말은 애타는 감정의 조용한 떨림, 울음 같은 표현이 아닐까. 요즘의 참혹한 뉴스판 연애와 사랑에 관한 기사에서 이 의미를 지닌 말을 따온다면 “죽여 버린다” “가만 안 둔다”가 아닐까. 글로 써놓고 보니 더욱 더 섬뜩하다. ‘잘 있지 말아요’라는 문장이 주는 이별에 대한, 사랑에 대한, 서릿발같은 감정은 오히려 사랑의 충만함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듯하다. 이쯤되면 사랑의 완성은 이별할 때 말하는 이별어로 성립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세상 안쪽을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사각지대도 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 기대 혼자 파티를 견디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간신히 보이는 세상의 비밀도 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든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듣고 들어도 막상 경험이라는 위치에 올라서면 미처 몰랐던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각지대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사랑을 정의하는 나만의 방식이 될 것이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여기 저자가 추려낸 37편의 작품은 그 자체로도 읽어볼 얘기들이다. 거기에서 사랑을 읽어내든 다른 것을 읽어내든 말이다.

 

당신의 마음에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내게 없을지라도, 당신을 만나고 홀로 사랑하게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 이런 마음은 보답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존엄이다.

 

  하지만 사랑을 영혼의 존엄이라 얘기하는 저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곁들여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냥 한방향으로만 흐를 내 ‘사랑의 정의’가 위험한지 아닌지, 그 사랑에는 타인에 대한 존엄이 있는지, 정말로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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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마음산책, 2004-04-25 .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폭우 속에 침수된 차량 바퀴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 사진이 인터넷에 실렸다. 주욱 뻗은 한 팔이 물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롭게 물길로 미끄러지는 모습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새벽녘 날카롭게 그르렁거리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멀리로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오히려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분명 들고양이들인데 휴지통을 배회하며 주차된 차량 아래로 들어가 숨어 있기만 할 뿐이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재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고양이들의 생존전략도 변한 것인가. 또다시 태풍과 비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저 수많은 고양이들이 차량들이 차량의 주인들이, 마을의 주인들이, 그것을 쳐다보는 모든 이들이 걱정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은 이렇듯 청춘에 관한 문장이었다. 여전히 이 문장에 눈이 머문다. 이 책은 2004년 초판 출간되어 10년 뒤에 같은 제목의 2편이 출간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책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문장들. 아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음에 남게 된 문장들. 어떤 책이든 글이든, 마음에 와닿는 계기나 때가 따로이 있다. 삶의 위로가 되는 문장들이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경험과 상처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마다에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이, 글이, 문장이 있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8할이 글이 되는 건가.

  시간은 정말 재빨리 지나갔다. 예전에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보면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 문장을 좋아하던 시절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은 재빨리 지나간 것 같지만 대부분 하루는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별볼일없이 지나갔다. 별볼일없이 살아왔다는 것만큼 편안하고 다행인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크게 남은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련’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 켜켜이 내가 좋아한 책들을, 이야기를, 문장을 읽고 싶어졌다. 또한 미련일지도. 내가 살아온 생애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 희망을 주기도 절망케도 한 문장들이 그리워진다는 것. 사춘기, 청소년기라는 시절의 감수성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의 책들에 문장들에 마음이 쏠리는 것 역시도 ‘지나간 시절’이라는 데서 오는 감정이리라.

  김연수의 청춘의 시절 감성 역시도 남달라 보인다. 작가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특히 애착을 느끼고 있고 다시는 산문을 쓰는 일은 없을 꺼라 말하고 있지만 2004년 이후 출간된 작가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 산문집을 나는 읽었다. 물론 지금도 작가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그의 글은 첫 문단 데뷔작과는 너무도 다른 깊고 섬세한 감성이 있다. 첫작품만 생각하며 김연수를 기억했다가는 동명이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작가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라고 하지만 글쎄 세월과 변화의 관계의 주종을 따지는 일이 뭐 중요한가. 세월은 흘렀고, 어쨌든 변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사실인데. 변했다는 사실에 깊은 회한만이 없다면야 변한 것이 또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닌 것이고.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표현의 섬세함이나 깊이, 감성. 그리고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청춘에 대해, 지나간 시절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아 보인다. 이제 3~40대-작가는 35세이 이 산문집을 썼다-에 느끼는 감정은 노년과는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노년에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마음씀은 중년에 바라보는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니 노년에서 바라보는 중년의 시절 역시도 청춘이다. 그러니 아직, 내 생에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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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


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 김영하, 마음산책, 2012-05-15, 초판출간 2005년.


  

   초판을 읽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그새 책은 재출간되었고 작가는 매주 텔레비전에 나왔다. EBS 세계기행 첫편에 김영하 작가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EBS 세계테마기행을 볼 때마다 세계 곳곳을, 특히 오지를 기행하고 싶은 갈망에 휩쓸렸는데 세계를 기행하는 일은 늘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서 하고 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기행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기쁨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위안삼는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동안 책을 읽는 일만은 버리지 않고 살았구나 하면서. 그러고 보면 내게도 책읽기가 삶에서 ‘랄랄라’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다. 소설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이하게 쓴. 일상의 이런 정도쯤이야.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깔끔하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는 담백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있다. 그속에선 어떤 신경질이 느껴지지 않아서일 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맞닥뜨릴 그런 순간들을 점잖은 생각으로 전환하는 일상이 부럽다. 생각해보니 방송에서 본 작가의 스타일이 이렇구나 싶다.

  소소하게 일상을 훑어보고 더불어 생각하는 랄랄라 하우스는 2005년 첫출간되었을 때 유행하는 sns의 대표적 프로그램인 싸이월드의 형식을 차용했다. 방문자들의 댓글반응까지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안 된 사이에 지금은 사라졌으니 인터넷 프로그램의 생명력이 얼마나 급속하게 변하는지 새삼 실감한다. 그토록 열렬한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그램의 소멸이 과학기술발달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급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레미제라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적 장발장으로 먼저 이 소설을 읽었을 듯하다. 장발장이 아닌 레미제라블은 엄청난 길이의 소설이었다. 레미제라블을 읽고 나서 빅토르 위고의 이 소설에 대해 박수를 쳤다. 아, 이아호! 소년소녀용 소설이나 청소년용, 만화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이 레미제라블의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랄랄라 하우스에 초기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의 제목을 소개했다. ‘너 참 불쌍타“. 정말로 배꼽 빠지게 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었기 망정이지 소리내어 깔깔거렸다면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웃음에 한번씩 작업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어도 변한다. 언어가 가진 뜻이 변하고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기도 소멸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각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역시도 필요를 기반으로 한 생각의 전환이 가져오는 것이니까. 너 참 불쌍다! 마구 웃었는데 갑자기 짠해진다. 휘몰아치는 변화의 한복판에서 노회한 사고로 일관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과학기술과 언어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변화, 변화, 변화. 이 말이 고통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인지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환경변화에 적응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이 안쓰럽게 느껴지긴 한다. 그냥 너 참 불쌍타 싶다.

  랄랄라 하우스의 부제는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이다. 헬조선 사회에서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일은 버겁지만 때론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묘하고 유쾌한 생각을 갖는 것이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된다. 청량제같은.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을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이 책에 있는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고. 작가는 작가라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경험을 쌓고 또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환경 내에 그것을 바탕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생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환경’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그 경험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사고를 지배하니까. 하지만 사고를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힘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 방법의 차원에서 이 책 역시 나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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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뮤즈란 없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유혹적인 글쓰기

메러디스 매런 (엮은이), 생각의길, 2013-12-13.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 20인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20인 작가들의 이력을 보면 퓰리처상, 오헨리문학상, 오렌지문학상, 펜포크너상, 맨부커상 등을 수상하거나 매번 다양한 언론에 올해의 책으로 소개된 책의 ‘저자’들이다. 이들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엮은 매러디스 매런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을 “재능기부”라는 기획 덕분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모두 유명하고 잘 팔리는 작가들이지만 그들이 지금의 결과를 이루기까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작가들은  이 경험들을 글을 쓰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

   작가들 각자의 글쓰기 방법이나 ‘작가’에 대한 생각은 유사점도 있고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 물어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대답을 이들 역시도 하고 있었다.

   “일단 써라.”

    다양하고 흥미로운 제목으로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고 있는 책들의 최고의 방법은 항상 그랬다. 일단 많이 읽고 쓸 것! 허무의 끝을 달리는 말이긴 하지만 어느덧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방법임을 수긍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의 글쓰기 방법을 말하는 책들은 똑같은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토록 무수하게, 계속 나올 수 있는 거지?

 

쓰고 싶은 기분이 안 내킬 때도 글을 써라. 세상에 뮤즈란 없다. 글쓰기는 고된 노동이다. 나쁜 원고는 언제라도 교정할 수 있지만, 빈 원고지를 들고 교정할 수는 없다. - 조디 피코

 

   조디 피코의 ‘빈 원고지를 교정할 수 없다’는 말이 와 닿는다. ‘뮤즈’란 없다는 말 또한 격하게 공감한다. 왜, 특히 남성들에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뮤즈’가 필요했을까. 그런 인상들이 각인되어 ‘뮤즈’나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이 있다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다수의 창작자들에게 뮤즈란 여성이었고 여성은 창작의 주체자이기보다는 창작자를 보조하는 수단이었다. 여성의 창작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그래서 폄하되거나 남성에게 빼앗기거나.

   20인의 작가들을 보니 여성 작가가 훨씬 많다. 이들은 특별한 ‘뮤즈’에 대해서 언급하진 않았는데 그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내면으로 돌리고 있다. 글을 씀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자신만의 ‘행복감’이 그들이 글을 쓰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 채 완전히 몰입해버린다.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세계에 깊이 빠져서, 현실의 삶이 약간 모호해진 느낌이 너무 좋다. - 제니퍼 이건

 

나는 꿈꾸기 위해 글을 쓴다. 다른 인간과 접속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기록하기 위해,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방문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일종의 원초적 욕구 때문에, 그리고 돈 때문에 쓴다. - 메리 카

 

글쓰기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냥 내 자신이다. - 수전 올리언

 

   이런 시간을 더욱 많이 누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이들에게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일처럼 보인다. 직장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의 고통, 글에 대한 반응이 없을 때, 어느 에이전시에서도 글에 대한 연락이 오지 않을 때의 참담함,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쓰지 못하는 답답함이 작가들이 가지는 문제이다.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시간외에 어떡하든 시간을 만들어 내어 글을 쓰기 위해 분투하는 작가들의 글쓰기 습관은 이들이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 준다. 짬이 나는 모든 시간을 글쓰기에, 글쓰는 습관에 들이기 위한 처절한 노력들이 결국 글쓰기의 비결이라고 작가들은 말한다.

   어떤 영감이 찾아오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뮤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늘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매일쓰기, 습관의 글쓰기가 그들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매혹되어 있는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들이 글을 매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작가들은 ‘특별’하기에 그런 작품들을 썼고 상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이들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들으면 전혀 특별하지 않게도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읽었고 글쓰기 강좌를 들었고 그리고, 열심히 썼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또한 이 단순한 일을 잘 해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래서 특별해 보인다.

   뮤즈를 기다리지 않는 것. 뮤즈가 찾아올 때 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 스스로가 뮤즈라는 것을 믿는 것. 이들이 얘기하는 유혹적인 글쓰기의 비결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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