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북극곰...


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나무옆의자, 2017-07-10.


  

http://www.ytn.co.kr/_ln/0104_201712261515210315



  얼음 구멍 속으로 얼굴을 내민 물개를 보고 깜짝 놀라 넘어진 새끼곰이 너무 귀여워 눈여겨보다가 『우리의 남극 탐험기』를 떠올렸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흥미는 없었고 아쉬움이 많았기에 쉬이 잊고 넘겼는데, 극과 극은 통하는 건가.

  곰을 부를 때면 늘 북극곰이라 부르듯 남극에는 곰이 살지 않고 대표적으로는 펭귄이 산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인데 곰이 바다 북극에서 살고 펭귄이 대륙에서 살고 있다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알아 왔으니 익숙할 뿐, 이상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남극탐험기이지만 남극을 탐험하는 내용은 후반부에나 나온다. 전반부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만남과 상황 등이 나오는데 사실, 주인공들의 남극탐험에 대한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구나 남극을 탐험하러 가면서 만난 북극곰도. 놀란 북극곰을 보다가 떠올린 건 이것이었다. 그래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나다니. 뒤늦게 말이다.

  대륙으로 둘러싸인 바다 북극이나 얼음으로 덮인 땅 남극이나 땅과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음과 눈이 떠올려져 늘 추운 곳이라고만 생각해 오다가 새삼스럽게 남극과 북극의 차이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남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어도 북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는 것도. 이누이트족, 에스키모인들이 살고 있어 탐험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만 이래저래 북극이든 남극이든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든다.

  물론 소설속에서처럼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난다거나 하늘을 나는 펭귄을 만난다거나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말하는 곰과 펭귄에 대해서도. 극한의 지역을 탐험하며 발가락이 썩어 잘라낸 이야기도 나오지만 소설에서의 남극텀험기는 현실성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환상같고 장난같다. 오히려 이야기에서 현실성을 획득하고 나름 흥미로운 인물은 섀클턴 박사다. 미숙아로 태어나 망막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살아간 그가 겪는 일련의 일들은 남다르다. 상류층에 재력있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것과 또한 시력을 이유로 겪는 멸시와 조롱들, 그럼에도 타고난 의지와 특별한 성향으로 어린나이에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다. 늘,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그리고, 동성에 대한 박사의 사랑과 이별이야기가 더해진다.

  병렬식으로 박사와 주인공 나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리하여 어느 한 지점에서 그들이 만나 남극탐험을 떠나지만 시종일관 왜 남극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남극탐험을 떠났던 섀클턴 박사의 목소리가 이끌었다는 이유를 대기엔 부족하게 여겨졌다. 소설이니까 하면서도 너무 말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이 무엇인가, 내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게 무언가를 생각했던 소설이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라는 설정이 이 생각을 더하게 했다. 누구나 제 인생에 대해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있겠지만 주인공 ‘나’의 행동들은 치기어리게 보여서 공감이 덜했다. 이 주인공은 우연히 쓰게 된 글로 연이어 상을 받고 소설가가 되었지만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스타일이란 게 별건 아니고 정신 나간 놈들이 등장해서 되는대로 사고를 치고 헛소리나 찍찍 내뱉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이고 헛소리로 일관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내게 문학상을 안겨준 심사위원들은 그런 스타일을 신인 작가의 패기라고 좋게 평가해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내 유일무이한 장점이었던 것인데 그게 망가져버린 것이다. 문학 비슷한 거라도 써보겠다는 생각에 초심을 잃고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내 글은 무척 진지한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진지한 헛소리는 헛소리가 될 수 없었다. 재미도 없고 미학적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진지한 헛소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적어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진지한’은 못느꼈고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허무함이 밀려왔던 것만 기억에 남는데, 이렇게도 다시 소설을 떠올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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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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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을 찾는 밤에

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저, 민음사, 2016.8.26.


  별똥별이 떨어진다기에 도시의 불빛을 헤치고 기다렸다. 너무 밝아서, 도시의 밤은 너무 밝아서 별똥별은 보이지 않았다. 소원이 머쓱해져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추운 밤의 네온싸인과 아파트 불빛을 보면서 별빛과 불빛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했다. 별똥별은 떨어져 내려도 저 하늘의 삶같기만 하고 네온싸인은 화려하게 빛나도 하늘에 닿지 않을 번쩍임같았다. 닿을 수도 보이지도 않을 별똥별에다가는 온갖 류의 감정을 끌어다가 경외를 표하고 네온싸인은 고작 별빛을 방해하는 무리처럼 취급하는 밤, 내 삶이 저열한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소원을 외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잠깐, 소원이 있다는 건 욕망이 있음이라는 생각에 이젠 소원마저도 말하지 못한 삶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밤의 가련한 모노드라마는 일찍 끝났지만 아직 욕망은 남아 별빛과 불빛 사이에서 오래도록 흐르고 있다. 저 먼 우주속을 유영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한 남자가 끊임없이 전하는 메시지와 우주를 떠도는 이복형에게 전하는 동생의 메시지에 방해되지 않게, 흐르기를….

  관제 센터, 들리나? 관객 여러분 들리시나요?

  누군가가 듣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농담, 아니 필사의 말을 던지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서로 형제라는 사실은 존재함만으로 알 뿐인 이들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아들이 재혼한 엄마와 새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이복동생을 살해한 뉴스가 도배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송우영과 이일영의 말은 너무도 애틋했고 예쁘게 들렸다. 각기 우주와 코미디극장에 서 있지만 안락하게 정착하지 못한 두 형제의 이야기는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만든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전해주려 형 이일영을 찾아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송우영의 이야기와 모체 우주선과 분리된 우주비행사 이일영이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보내는 메시지가 소설의 서사인데도 소설은 긴박스럽게 느껴지기보다 나른하게 느껴진다. 이 알 수 없는 나른함이 무중력상태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데 따른 방향상실일까.


서 있을 때만 웃기는 건 아니지만, 서 있을 때 가장 웃긴 건 확실합니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일어서는 상상을 하는데요. 상상만으로도 이야기가 잘 됩니다. 이야기라는 놈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모양이에요. 그런 면에서 전파를 닮았죠. 우리가 빌어먹을 인공위성들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전파는 무조건 직선으로만 움직이니까 그걸 지구 반대편에 보내기 위해 반사를 시킨 거잖아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인공위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자, 모두들 인공위성을 하늘로 올려 볼까요?


  모체 우주선에서 분리된 이일영의 현재는 일찌감치 어머니와는 떨어져 살아야 했던 과거의 이일영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는 버리고 떠난 아들에게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한 편지들을 남기고 아들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전하려 애쓰는데, 이야기가 우주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칙칙하지 않고 청아하게 맴돈다.

  극한의 상황에서 소멸해가는 산소속에서 농담처럼 말을 던지는 이일영과 연일 농담처럼 진담을 뱉어내는 코미디언 송우영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 두 형제가,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농담이 짙었을까 싶었다. 이토록 잘 맞을 수 없을 텐데 생각하면 그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말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참 닮았구나 싶었다.

  삶은 농담이라 말하지만 진담을 잔뜩 뱉어놓고서 스리슬쩍 농담이다, 농담이다 하면서 밀어내버리는 말들이 삶속에서 너무나 많았다는 생각을 한다. 농담. 농담처럼 말하듯 하지 않았다면 살아감이 너무 힘들었을려나. 농담이라 덧붙이면서 삶이 더 위태로웠을라나. 위로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더욱 슬퍼지는 농담같은 이야기를 이 소설에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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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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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면 망한다

선한 이웃, 이정명, 은행나무, 2017-05-29.


  1987년의 6월이 있었지만 2016년의 12월을 겪어야 했다. 아직 2016년, 2017년은 끝나지 않았고 끝이라는 것도 어떤 식으로 결론날지 알 수 없다. 여전히 폭풍이다. 1987년 6월의 함성을 질렀던 이들은 2016년의 상황을 맞닥뜨릴지 알았을까. 그러니 모르는 것이다. 지금, 30년이라는 세월을 흘러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여전히 반복된 악의 고리를.

 『선한 이웃』은 연극연출가를 중심으로 1980년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연극처럼 꾸며지는 이야기가 연극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30년전의 이야기가 전혀 30년전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야기가 갖는 힘은 폭발한다. 무대에 올린 연극을 준비하는 등장인물들처럼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어떤 식으로든 주어진 일에 호기심을 넘어선 사명감을 투영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나치시대에도 그랬듯이 아이러니하다. 비극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살인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악한이 아니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들이다. 인간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말했다.


  운동권은, 특히 7, 80년대에는 지식인이자 삶의 정의를 고뇌하는 철학자이자 세상을 구원하는 세력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활동했다. 지금의 운동권이란 말은 오랜 동안의 프레임인지 지식인이라는 말보다는 특정집단을 비하하는 말로 다소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30년 전의 운동권이 가진 시대를 고민하는 사색과 행동력은 놀라우리만치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소설 속 영웅으로 등장한 최민석처럼.

  소설속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은 몇되지 않는데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거대하다고 느껴진다. 권력이라는 것이 중심에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운동권을 결집시키는 운동가이자 시민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얼굴없는 운동가 최민석과 정보부 수뇌부의 요원으로 최민석을 쫓는 엘리트 김기준의 대립을 기본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1차전은 최민석의 승리다. 최민석을 검거하지 못한 김기준과 팀은 해체되고 김기준은 좌천되기까지 한다.


‘로마는 한 사람의 권위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인가?’

Shall Rome stand under one man's awe?

그는 ‘awe'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경외‘로 번역되는 그 단어는 공경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모든 권력이 존경과 공포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토록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존경을 얻지 못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얻었던 존경을 철회당한 지배자들은 어김없이 공포를 행사해왔다. 대본 집필 당시, 태주는 그 단어를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는 시저의 정치적 ’권위‘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대사가 브루터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조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권위가 아니라 복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공포, 즉 ’독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삶은 철저한 계획, 시나리오를 짠 이후에 실행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기준과 최민석의 대립 사이에 연극연출가 이태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태주가 무대에 올린 <줄리어스 시저>의 대사 한줄이 문제가 되어 연극 상영이 중단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된다. 그런데 이태주는 보름만에 방면되었고 극단계에 변절자라 낙인찍히게 된다. 재기를 위해 이태주는 또다른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 연극에 삼류배우 인생으로 살던 김진아가 캐스팅된다. 재기를 위해 이태주가 열심히 연극을 준비하듯 좌천된 김기준 역시 최민석을 검거하기 위해 보다 더 철저한 검거작전을 위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김기준이 최민석을 검거하게 될까. 최민석은 이태주인가. 이태주는 자신이 준비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이것은 이야기를 따라 가며 사소하게 느끼는 궁금증이었다. 독재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전형적으로 느껴지다가 문득 한 지점에서 내가 크게 간과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기 위한 권력층의 행동들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떠나서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너무도 유치하다고 늘 생각해왔다는 점이다. 유치찬란하고 너무도 뻔히 보이는 그릇됨이기에 일견 코믹스럽게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들은 권력욕을 가진 허영덩어리이자 옮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정도의 지적수준과 사고를 가졌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도 그 시대에서든 이 시대에서든 재력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자들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먹고 있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드러낸 말과 행동 때문에 너무 수준을 낮게 보았거나 의도적으로 그렇게라도 그들을 무시하려 애썼는지 모르겠다.


지금 기준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기껏해야 말도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는 것밖에 없었다. 관리관은 잠시 턱을 불끈거리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인간은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존재야. 예수, 마르크스, 모택동, 무슨 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이념들, 하다못해 엉터리 점쟁이까지. 앎으로써 믿게 되는 진실이 있는가 하면 믿는 대로 알게 되는 진실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야.


  막나감이 권력과 합쳐졌을 때 가지는 파괴력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소설속 관리관에게 뒤통수를 맞은 나는 다시 한번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 때문에 어질하다. 사과하나를 더 먹기 위해 어떻게 사과를 베어무는 양과 사과를 씹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같이 권력과 야망을 위한 본능적인 시나리오를 아는 자들을 너무 쉽게 유치하고 한심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서 그들의 시나리오조차도 한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나리오로도 무대를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 상영관을 꽉 채우면 볼 것은 그것뿐이 없게 되리라는 것도. 시나리오가 뭐 별건가. 프레임이란 말로도 대체가 가능할 거다. 얼마든지 정교한 시나리오를 짜고 그에 맞는 배역들을 섭외할 힘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실감해야 할 듯하다. 지금 역시도 관리관은 새 판을 짜고 있다. 쉽게 무시하고 간과하다가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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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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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

괜찮은 사람, 강화길, 문학동네, 2016-11-30.


   다른 사람, 괜찮은 사람, 귀한 사람, 친한 사람, 중요한 사람, 눈사람?

  ‘사람’이라는 말이 제목으로 내용 중에도 자주 쓰인 작가의 단편집 『괜찮은 사람』은 읽기에 괜찮았다. 단편마다 가득한 스릴이 괜찮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느낌이 괜찮았다. 이렇게 말하고보니 또 이상하다. 그 느낌이란 것이 살아가면서 익숙하게 느끼는 불안감을 담고 있기에 낯설지 않았다가 더 적당할까.

  산다는 건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것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는 것일 게다. 모호한 상황과 그로 인해 겪는 모호한 심리가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조차도 불확실함을 전하면서 확실성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고 늘 확실성을 얻어가는 것은 아니기에 인생은 늘 불안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사소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삶의 불안과 긴장을 더해 우리의 삶들은 과민성대장증후군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것 아닐까.

  타인이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괜찮은 사람이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나 또한 적정의 추켜세움을 받을 만큼의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구가 불안속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은근한, 확고한 폭력에 대해서도 확실함이 아니라 모호함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인가. 내 생각이, 느낌이 확실한가.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닌가. 이 예민함이 나를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과 정말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건, 굉장한 차이였으니까.


  상황에 대해 모호함으로 일관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안과 공포를 뛰어넘는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 소설속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상황은 늘 되풀이될 것이다. ‘참는’ 것이 ‘모른 체’가 되고 나면 모든 상황은 그것에 맞추어 흘러가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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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배역 나의 역할


아낌없이 뺏는 사랑 

The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 (2014년)

피터 스완슨, 노진선 (옮긴이), 푸른숲, 2017-06-01.


  사랑일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의문이 가득했다.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란 제목 때문에 더해진 의문이었으니 The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 원제를 보고선 사랑은 무슨(혹은 개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는 이내 돌아서서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번역이 먼저 나왔을 뿐 작가의 데뷔작은 이 작품이다. 이야기는 너무 익숙하지만 그런대로 끝까지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한 소재를 잘 버무려 이끌어가는 작가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겠다. 타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스릴러에서는 단골 소재가 되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타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건 그 신분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비밀을 감추려는 자와 비밀을 파헤치는 자 또는 상황과의 대결이 된다.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는 ‘아낌없이’ 뺏는 여자가 등장한다. 누군가로부터 아낌없이 뺏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책제목을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의 조지가 스무살의 첫사랑 리아나를 20년 만에 만나면서 맹목적으로 빠져들어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렇게 단정해서 말하면 모든 소설이 전개되는 방식은 결국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라는 식상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조지의 리아나에 대한 맹목적인 흔들림이 책을 덮은 후 가장 물음표가 남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사랑일까. 그에 대한 회의로 말이다.  

  조지를 마주친 순간 다짜고짜 부탁을 하는 리아나에게 좋은 동네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애인까지 있는 조지가 보이는 반응은 그저 평균인 듯 보편인 듯한 마흔의 일상 때문일까. 철을 기다린 자석마냥 달라붙음을 허용하는 리아나에 대한 조지의 자석화는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감정을 싣는 사람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첫사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의미를 붙여놓은 감정의 처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맹목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단어에 대한 사랑을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화 속 룰루처럼 새로운 나를 만들어냈다면 그게 원래 모습보다 더 솔직하고…… 진정한 내가 아닐까? 아무도 가족을 선택할 수 없어. 이름이나 외모, 부모도 선택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권이 생기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영원히 변하지 않고 늘 똑같을 조지와 영원히 변신하기만 할 리아나의 이야기는 허무함이 가득하게 했다. 그토록 다른 사람이 되고픈 리아나의 간절함이, 선택할 수 없던 출발선이 달랐기를 바라던 리아나의 어떤 순간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한번의 기회를 얻은 리아나는 처음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한순간이라도 리아나가 바란 것에 진솔함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리아나는 욕망과 순간순간을 살아낸다. 어쩔 수 없었던 한번의 상황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범죄와 살인의 기회만을 쫓는 리아나는 그 삶을 위해서 변하지 않을 존재를 매우 필요로 한다.

  열악하고 피폐한 환경때문에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살 수 없음을 한탄하던 리아나가 선택하고 원하는 삶은 매우 위태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토록 편안하고 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삶이란 제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 매우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할 것이고 그런 계획 속에는 항상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조지처럼 누군가의 강렬한 욕망을 위해 늘 완벽한 배역을 맡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리아나, 그래 너같은 사람이 지금 이 세상에서 승자구나라는 한탄과 패배섞인 감정이 스며든다.

  욕구와 욕망을 무시한 채 살아가게 되면 결국 리아나같은 이들에게 모든 것들을 다, 남김없이 빼앗기게 될 것이다. 또한 인류 보편의 바람직한 가치와 결합되지 않은 욕구와 욕망은 세계 자체를 빼앗아 버릴 거라는, 그리하여 모두가 망하게 되리란 생각으로 나아간다. 무엇보다 갑자기 서글퍼지는 건 이래저래 발버둥쳐봐도 한번도 리아나였던 적이 없다는 것과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내 배역은 앞으로도 조지로 정해져 있다는 변하지 않을 사실 하나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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