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배역 나의 역할


아낌없이 뺏는 사랑 

The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 (2014년)

피터 스완슨, 노진선 (옮긴이), 푸른숲, 2017-06-01.


  사랑일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의문이 가득했다.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란 제목 때문에 더해진 의문이었으니 The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 원제를 보고선 사랑은 무슨(혹은 개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는 이내 돌아서서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번역이 먼저 나왔을 뿐 작가의 데뷔작은 이 작품이다. 이야기는 너무 익숙하지만 그런대로 끝까지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한 소재를 잘 버무려 이끌어가는 작가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겠다. 타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스릴러에서는 단골 소재가 되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타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건 그 신분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비밀을 감추려는 자와 비밀을 파헤치는 자 또는 상황과의 대결이 된다.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는 ‘아낌없이’ 뺏는 여자가 등장한다. 누군가로부터 아낌없이 뺏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책제목을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의 조지가 스무살의 첫사랑 리아나를 20년 만에 만나면서 맹목적으로 빠져들어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렇게 단정해서 말하면 모든 소설이 전개되는 방식은 결국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라는 식상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조지의 리아나에 대한 맹목적인 흔들림이 책을 덮은 후 가장 물음표가 남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사랑일까. 그에 대한 회의로 말이다.  

  조지를 마주친 순간 다짜고짜 부탁을 하는 리아나에게 좋은 동네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애인까지 있는 조지가 보이는 반응은 그저 평균인 듯 보편인 듯한 마흔의 일상 때문일까. 철을 기다린 자석마냥 달라붙음을 허용하는 리아나에 대한 조지의 자석화는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감정을 싣는 사람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첫사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의미를 붙여놓은 감정의 처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맹목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단어에 대한 사랑을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화 속 룰루처럼 새로운 나를 만들어냈다면 그게 원래 모습보다 더 솔직하고…… 진정한 내가 아닐까? 아무도 가족을 선택할 수 없어. 이름이나 외모, 부모도 선택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권이 생기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영원히 변하지 않고 늘 똑같을 조지와 영원히 변신하기만 할 리아나의 이야기는 허무함이 가득하게 했다. 그토록 다른 사람이 되고픈 리아나의 간절함이, 선택할 수 없던 출발선이 달랐기를 바라던 리아나의 어떤 순간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한번의 기회를 얻은 리아나는 처음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한순간이라도 리아나가 바란 것에 진솔함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리아나는 욕망과 순간순간을 살아낸다. 어쩔 수 없었던 한번의 상황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범죄와 살인의 기회만을 쫓는 리아나는 그 삶을 위해서 변하지 않을 존재를 매우 필요로 한다.

  열악하고 피폐한 환경때문에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살 수 없음을 한탄하던 리아나가 선택하고 원하는 삶은 매우 위태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토록 편안하고 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삶이란 제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 매우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할 것이고 그런 계획 속에는 항상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조지처럼 누군가의 강렬한 욕망을 위해 늘 완벽한 배역을 맡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리아나, 그래 너같은 사람이 지금 이 세상에서 승자구나라는 한탄과 패배섞인 감정이 스며든다.

  욕구와 욕망을 무시한 채 살아가게 되면 결국 리아나같은 이들에게 모든 것들을 다, 남김없이 빼앗기게 될 것이다. 또한 인류 보편의 바람직한 가치와 결합되지 않은 욕구와 욕망은 세계 자체를 빼앗아 버릴 거라는, 그리하여 모두가 망하게 되리란 생각으로 나아간다. 무엇보다 갑자기 서글퍼지는 건 이래저래 발버둥쳐봐도 한번도 리아나였던 적이 없다는 것과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내 배역은 앞으로도 조지로 정해져 있다는 변하지 않을 사실 하나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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