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존재가 외로울 때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2018-03-08.


  출간된 책은 너무도 많고 그중에서는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다. ‘괴물‘ 소설에 영향을 미친  <프랑켄슈타인> 도 그중 하나다. 어릴적 문고판으로 읽었다거나 다른 책들을 통해 수없이 언급되어 굳이 읽지 않아도 그 줄거리와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인데, 새롭게 특별판이 나왔다한들 내용이 다를 리 없을 터인데 왜 이번에는 <프랑켄슈타인>에 끌렸을까. 하얀바탕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청록색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표지가 눈길이 갔다.

  결론적으로 안다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 그러니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는 것도 유혈이 낭자하며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날뛰는 괴물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으니,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몰랐던 것을 보상하는 것마냥 여러 갈래의 생각이 들었고 1818년에 씌어진만큼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 고즈넉함이 오래남았다.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백하는 듯이 펼쳐낸다.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이라 이름 붙여졌을지 모르는 이 존재와 작가에 대한 연민이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유일지 몰랐다. 책이 등장한 순간부터 오랜 세월, 최고의 괴물로 상징된 이 존재에 대한 변명도 해주고 싶었다. 커트 보니컷은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같은 발명품이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째서 <프랑켄슈타인> 은 끔찍한 괴물, 악마의 대명사가 되었나. 그것은 이름도 부여하지 않은 창조가가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화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리라 고무되었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열정에 힘입어 피조물을 만든다. 그가 죽음과 시체에서 뽑아내어 창조한 피조물은 바로보기 끔찍할 정도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곧,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을 외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이 탄생한 순간부터 참혹하고 끔찍스럽게 여겼다. 그가 생각한만큼의 “아름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을 동원하여 끔찍스럽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상해보려 한다. 존재의 본질은 외형이 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회의하며 끔찍스러운 괴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 피조물을 버리고 살지만 그가 창조한 피조물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외형을 창조했지만 이 이름없는 피조물은 추위와 허기를 견디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과 언어를 습득한다. 또한 인간의 정, 따스함, 온기, 애정이라는 감정을 알아가고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갈구한다. 인간적인 교감에 대한 욕구는 극지방을 탐험하는 로버트 월턴 선장이 보낸 편지를 볼수록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느꼈을 외로움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채워지질 않는군요. 지금 이 순간 그 부재는 무엇보다 혹독한 불행으로 느껴지네요. 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거릿 누님. 성공에 대한 열의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환희에 동참해줄 이도 없고, 실망감에 시달릴 때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을 종이에 적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썩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감해줄 사람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보면 눈빛으로 화답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로 지칭된 이 괴물은, 어떤 악의도 가지지 않은 채 스스로 학습한 지식을 통해 인간 삶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아간다. 적어도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존재였다. 스스로 악한 존재일 수 없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아니 외형적인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된다. 피조물이 눈먼 노인으로부터 어떤 배척도 당하지 않고 지식과 진실한 감정으로 공감과 소통을 얻는 모습은 외형을 보자마자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슬픔과 괴로움 가득한 이 생명체의 절규를 프랑켄슈타인은 끝끝내 외면했다. 오직 외모가 끔찍스럽다는 이유로 악마로 규정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두고서 ‘악마’의 당연한 행태라 수긍한다. 끔찍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죄의식에 가득 차 방황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자기연민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룰 없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생명체를 창조하였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파괴하려 하지도 보살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많은 나날 죄책감과 자기연민만을 끌어 안은채 외면하고 도망다니는 것이 프랑켄슈티인이 하는 일이다. ‘외롭다’는 말을 끝끝내 외면한다.

  그 생명체는 먹을 것을 달라 하지 않았다. 옷을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다. 집을 달라 하지 않았다.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영혼에 온기를,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좀더 따스함을 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서만이라도 외면받지 않았다면 의지를 가지고 살인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피조물은 악마 그 자체였기에 그 존재가 하려는 모든 일들은 악의 행동이 된다. 존재 자체가 악이기에 절대로 믿을 수 없다. 피조물은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고 끔찍해 하는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자신과 같은 생명체와 함께 하는 것만을 바란다. 이들의 교환조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이 인류애,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강조한다. 인류를 위해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 피조물이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낳을 것을 생각할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류애, 그가 생각하는 책임감이란 피아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었다.

  악의 본질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하면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이었는데, 어째서 피조물은 삶의 규율과 인간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결국 악한 행동이란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혐오는 피조물에게 외로움과 고독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을 더불어 주었다. 애정을 갈구하고 주려 했던 것만큼의 애정을 피조물이 받을 수 있었다면 그가 홀로이 깨달은 지식과 선한 감정의 기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메리 셜리는 열여덟에 이 책을 썼고, 자신의 아이를 잃었고, 그해에는 인도네시아 자바 군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화산재로 인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에 구상하고 생각했던 이 괴물 이야기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메리 셜리의 삶과 오버랩된다. 괴물과 광기는 이상하게도 이 화산 폭발과 같은 열기를 준다. 뭔가 덥고 습하고 끈쩍끈적함을. 그러나 이 소설은 극지방에서 시작되어 극지방에서 끝이 난다. 해빙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얼음의 촉감과도 같은 차분함속에 있다. 광기와 흥분과는 다른 느낌을 계속 갖게 되는 것이 그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음과 시리게 차가운 북극의 이미지가 이 비극적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끔찍스럽게도 외로워하는 이름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언어를 익히지 않았다면 덜 연민했을까. 그런 지식과 감정들이 살아감에 쓸모없었음이, 효용되지 않았음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예 처음부터 야성의 동물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다면 쉬이 괴물이라고 악마라고 생각하기가 쉬웠을까. 문득 내 안의 편견과 얕은 지식으로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를, 많은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지음, 문동식.엄성은 옮김 / 시그니처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쩔 수 없는 중독


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시그니처, 2017-08-09.


  미국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터너 가족의 이야기는 새삼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 돈을 벌기 위해 작은 시골마을 아칸소로부터 대도시 디트로이트로 건너온 프란시스 터너와 비올라 터너 부부에게는 열 세명의 자녀가 있다.

  열세명의 아이가 있는 가정의 이야기는 한권의 책에 그들의 이야기가 다 못 실렸을 정도이다. 그들이 자라온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 한 명 한명의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대로 쓰려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너 하우스엔 이제 누구도 살지 않고 텅 비어있다. 이 텅 빈 집마저도 처분해야 할 상황에 놓인 열세명의 형제들은 집을 처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한다. 집은 시세가 고작 4천 달러지만 걸린 빚은 4만 달러이니 의견은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이 그 집에서 성장하면서 추억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기에…. 

  심리학자 아들러는 출생순서별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그런 아들러가 살아 있다면 이 열 세명 아이의 성격을 분석해달라 하고 싶지만 아들러의 논문에도 열세명까지는 분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첫째에 관해서는 책임감을 이야기하는데 터너가의 장남 프란시스 터너, 찰스 또는 차차로 불리는 첫째 역시도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한다. 이런 책임 중독을 가지고 있지만 차차가 보기에 터너가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중독’증상을 가지고 있다. 둘째 프란시스는 음식과 영양과 건강, 부엌 도구에 중독되어 있고, 로니는 오십이 넘어서도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 트로이는 성공, 쌍둥이 말린과 비올라는 일, 막내 레일라는 도박 중독이다. 차차의 아내 티나는 어떤가. 그녀는 종교 중독이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 있는 열세명의 장남은 여전히, 환갑이 된 나이에도 책임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차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유령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린 시절 창문으로 들어온 유령에게 펀치를 날리던 차차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타난 유령 때문에 의사 앨리스에게 치료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차차가 과도한 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란시스 같은 소년이 유령을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너무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땅에 묻었고 어머니는 떠나 계셨다. 두 분 다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바지를 끌어올려 입고 맨발인 유령이.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고 사진도 없었기 때문에, 이 유령이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한없이 깊었던 그였기에 어떻게 다시 찾아왔냐고 물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만일 유령을 간청해서 저세상에서 불러올 수 있다면, 어린 프란시스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차차가 가족 모두가 중독되어 있다고 보는 것처럼 터너가의 자녀들은 모두 삶의 어려움 속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 위안을 받고자 하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혼하며 홀로이 사는데 대한 외로움과 힘겨움 속에서 도박을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위안을 받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할때 차차는 유령에 매여 있었다. 어린 시절 딱 한번 본 그 유령에게 말이다. 유령을 보고 싸우기까지 한 차차는 가족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또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의 개성이나 특별함을 누리지 못한 상실감이 뒤늦게 생긴다. 다시 유령을 봤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도 유령을 보았다는 경험이 자신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었음도 안다.

  프란시스 터너 가족이 전쟁을 넘어 시골마을에서 공업도시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우리나라의 전쟁 전후,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과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몰락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터너가의 가족들 모두 살아가기 위해 움켜 쥔 것과 버린 것들이 있다. 스스로 버리게 된 것들과 타인에 의해 상황에 의해 뺏긴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꿈이다.


흑인들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손해를 볼까 봐 그냥 포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서 백인들이 알아서 뭔가를 하겠거니 믿는 거죠.


  ‘적당히’를 모르는 터너집안 사람들 속에서 차차는 ‘중독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두진 않겠다’ 다짐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겠노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은 “유령의 존재를 빌어 삶의 목적을 정의할 만큼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삶에서 목적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터너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같은 상실감을 내내 겪는 듯했다.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에서부터 쓸쓸한 느낌이 줄곧 따라오는데 그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부여되어 있던 잃어버린, 놓쳐버릴 수밖에 없던 나 자신을 위한 꿈과 희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마냥 가족을 위한 ‘희생’을 추켜세울 수는 없음을. 세월이 변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세대 차이와 삶에 대한 관점이 가져다주는 가치의 차이.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순간에라도 자아를 잃게 되는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터너 하우스에서 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얼굴은 폭력 레벨 3입니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2018-03-08.


  폭력의 피해자가 인터뷰를 했다. CCTV에 공개된 모습만으로도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부산에서 벌어진 데이트폭력 사건. 보이지 않는 데에선 더 끔찍한 폭력이 이루어졌다.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감금·폭력당하고 옷이 벗겨진 채 짐짝처럼 끌려가던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력의 피해를 알려야만 데이트 폭력에 대한 특례법이 만들어지고 가해자 처벌이 강화될 것이라며, 자신을 보며 피해당한 이들이 용기내기를 바란다며 피해 모습을 공개하고 인터뷰했다. 가해자의 처벌은 원체 있으나마나 하니까.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라 더 경악스럽다. 데이트 폭력은 성폭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지, 폭력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살인’에 가까운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반성도 없다. 끔찍한 영상과 골절된 피해자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가해자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 일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 댓글도 있다. 그것이 일부이라 하더라도, ‘일베’의 글이라 하더라도, 수긍할 만한 일인가.

  사람이 폭력당해야 할 타당한 이유란 없다. 더구나 외모가 폭력의 이유가 될 순 없다. 폭력 피해자의 외모와 행동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피해자는 ‘맞아도 싼 얼굴 또는 몸매’이거나 ‘맞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그 정도는 맞을 만하다니. ‘성폭력 당할 만큼 생겼네’, ‘성폭력 당할 만큼 생기지 않았는데’라니. 제 자신의 외모 선호에 따라 폭력의 정도를 정하는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도 폭력 게임에 몰두한 모습 같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 이 손가락질은 가정 내에서,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뻔히 보이는 곳에서도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처벌받지 않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는 가해자를 만들어 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숨도록 만드는 현실에서 이번 피해자의 인터뷰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관한 합당한 처벌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몇십명은 더 다치고 죽어야만, 법이 만들어질까. 자신보다 27살 어린 중학생을 임신시킨 40대의 남성이 무죄로 판결되는 세상에서, 데이트 폭력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형량은 과연 얼만큼이나 높아질 수 있을까 싶다. 남성은 사랑이라 우기고 미성년자는 사랑이 아니라 했지만, 법은 ‘그건 사랑이야’라고 미성년자의 감정까지도 판단해줬다. 록산 게이가 지적했듯이 “너무나 자주 ‘그가 말했다’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전적 에세이 「헝거」에서 열두살에 당한 집단 강간 이후로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었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무기력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보호받지 못한 그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통을 잊기 위해 게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는 것이었다.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먹고 먹고 또 먹어 뚱뚱해지도록 만들었고 190cm에 261kg의 거구가 되었다. 또 짧은 커트 머리에 큰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을 부치(남성 역할을 하는 여성 동성애자)로 만들어 행동했다. 법원 판결에 의해 “사랑을 한” 중학생도 숏커트를 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록산 게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또다른 고통과 상처를 받게 되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멸시와 혐오,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혐오가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록산 게이는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껴 집단 성폭력 당한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했다고 해도 “집단 성폭력을 당한 몸”으로 록산 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거기에 조금은 이해를 조금 섞은 동정의 시선을 던졌을지 모른다. ‘그러니 몸이 그렇게 뚱뚱해도 어쩌겠어’라거나 ‘그런 몸으로 무슨 성폭력’이라거나 그런. 어찌되었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몸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시선을 던질 것이다. 흑인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더한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받는 록산 게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가하는 이 시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더욱 제 몸에 통제권을 잃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하며 혐오하며 세상을 버텨왔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이런 록산 게이가 마침내 조금 자신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거두는 변화는 눈물겹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그로 인해 변해버린 거구의 몸으로 인해 또다른 시선에 힘겨워하지만 마침내 무거운 몸으로 인해 발목까지 부서져버린 상황에서 자각하는 그때. 그것은 스스로가 가한 유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 거창한 이름으로 필요하리라 생각지 않고 그저 자신이 몸을 돌보고 자신의 몸과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깨달았다. 그리고 치유가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치유가 되리라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그 스스로 가졌던 허기를 지우고 치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겪은 일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내 몸에 남겨져 있다. 내가 겪은 일에서 살아남긴 했으나 그것은 이야기의 전부라 할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살아남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생존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으나 누가 날 여전히 ‘피해자’라 해도 신경 쓰지는 않는다. 나는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이름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피해자이고 그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산 게이와 여학생처럼 폭력으로 인해 자신을 지우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숨어 있는지, 앞으로도 얼마나 숨게 될지는 움직이지 않는 ‘법’의 변화가 조금 좌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오래도록 당연시하는 이 사회에 끊임없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록산 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것은 폭력의 역사이다. 록산 게이는 이 폭력의 역사에서 자신에 대한 많을 것을 알려주며 다시금 사회속으로 발을 내밀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했는지”를 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문학사상사, 2018-01-18.


  나이가 들어가면서 발랄한 문장보다 무심히 파고드는 묵직한 문장에 마음이 오래 머문다. 패스트푸드를 맛깔나게 먹다가도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기어이 찾아서 먹는 날 같은.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은 저녁쯤이면 찾게 되는 찌개 같다. 이야기나 배경의 색다름이 아니라 익숙함이 주는 묵직함에 빠지게 된다.

  각각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동일한 주제로 글을 쓴 것만 같았다. 각 작품마다 특정한 기억에 사로잡힌 존재들을 보는 듯했다. 기억에 잡히어 갇힌. 그 기억은 마냥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의 회피로서 자리하는 기억쯤으로 여겨진다. 기억이란 언제나 현재의 일도 미래의 일도 아니니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땐 언제나 해결치 못한 마음을 건들일 것이다.

  대상 수상작 손홍규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청년의 어깨에 내려앉았던 늦은 오후의 설핏한 햇살 한 줌”이라거나 “저녁이 기지개를 켰다”는 문자이 주는 해질 무렵의 나른함과 쓸쓸함이 한껏 어리어져 있다. 한껏 지난 시절을 생각하는 불한당 무리들의 현재는 그 과거가 차곡차곡 쌓이어 만든 현실이다. 지금 그들은 기억 어딘가를 돌며 되돌릴 수 없는 그순간의 기억에 빠진다. 되돌아보는 삶은 어찌 후회가 붙지 않는 것이 없는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마음과 같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한때는 꿈이 없다라는 말이 그렇게나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꿈을 꾸었다는 말이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꿈이 없음은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하지만 꿈을 꾸었다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종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기억상실증인 남자가 등장한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당연하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낯설기만 한 자신이기에 행동 하나도 자연스러울 수 없다.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과 그들의 말 한마디에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그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그럼에도 무엇이든 의심스럽기만한 그때에 취향이 자신의 본질을 알려주리라 믿는 남자를 보며 이상하게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찬의 <새의 시선>과 조해진의 <파종하는 밤>은 각각 용산 참사 사건과 산업화의 폐해인 수은중독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새로이 기억하는데 카메라가 사용된다. 각각 사진과 다큐멘터리로 그날을 구성하고 기억한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앙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 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의 문장을 생각하면서 기억이란 마냥 편치 않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기억이란 기억하고픈 대로 기억하려 해도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에, 기억 속에서 나의 존재를, 내 삶을 절대적으로 호감으로 구성하려 해도 절대로 될 리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스의 모든 것 - 2017년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금희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크메팅


체스의 모든 것, 현대문학, 2016-12-07.


  한때 체스두기를 좋아했다. 체크메팅! 외쳐대며 즐기던 때가 있었는데 세월 오래 흘렀다고 규칙이 가물가물하다. 장기와 비슷한 룰을 가지고 있는 체스 규칙을 놓고 제법 옥신각신 했는데 누구와 두었는지 어디에서 두었는지 정말 내가 체스를 두기나 했던 건지 그런 체스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건지… 오래되고 묵직한 장기판이 여전히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장기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장기를 두지 않은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장기룰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체스는 한순간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신기루 같기만 하다. 오로지 체크메팅이란 단어만을 남긴. 체크메팅은 나의 말이었을까. 상대방의 말이었을까.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설 속 금화처럼 나는 체스를 두는 순간 오로지 이기기에 몰두했던가. 기껏해야 초등학생이었을 그때 놀이를 즐기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이십대 국화가 되고픈 이기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다. 금화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금화는 진정 이기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화를 바라보는 영지는 “정말 대단히 무심한 애라고 저 무심함은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세 남녀의 관계를 영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소설에서 이 셋의 관계는 참 미묘하다.

  

선배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아니, 감자는 같이 먹으려고 그렇게 해놓은 것인데 어떻게 감자를 혼자 다 먹을 수가 있나고요. 감자는 그런 게 아니고요, 선배 혼자 맛있게 먹고 말라는 것이 아니고 감자는 우리가 다 먹어야 하고 그렇게 같이 먹으면 좋은 건데 왜 감자를, 그러니까 왜 감자를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요!


  감자를 두고 울분을 터뜨리는 금화를 볼 때 분명 무심함이 아닌 ‘공격성’이 느껴진다. 묘하게도 이러한 금화의 모습은 ‘노아 선배’를 향할 때가 많다. 자칫 이성적인 호감에 대한 반어적인 행동인 듯이 여겨질 수도 있을 만큼 금화는 노아 선배와 ‘함께’ 하면서 선배에게만  무심하지 않다. 어쩌면 노아 선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영지의 시선에서는 금화의 ‘무심하지 않음’을 ‘이성적인 관심’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는 둘 사이에서 조정자인 듯 보이지만 없어도 무방한 위치다. 영지는 한번도 체스 게임에 등판하지 못하고 체스를 두는 둘을 지켜보는 존재다.


둘은 여전히 체스에 대해 얘기했지만 체스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고 체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만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대화가 저렇듯 열띠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공허한가 생각했다. 대체 체스가 뭐라고, 저렇게 싸우는가. 우리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영지의 공허함은 둘의 대화내용이 아니라, 영지가 체스룰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함께’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 같다. 체스가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체스 규칙을 아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체스가 아닌 대화에도 영지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서 과연 ‘규칙’이란 건 중요한 문제였을까. 금화는 체스협회 표준 규칙처럼 “퍼블릭한 게 아니라 프라이빗한” 저만의 규칙을 내세운다. 표준적인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아 선배는 늘 ‘특정한 힘’에 굴복한다.

  영지의 생각처럼 체스는 우리 사는 거랑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체스가 뭐라고 이토록 상관있나 싶었다. 아닌듯해도 피할 수 없는 규율이 삶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형태로도 체스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