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존재가 외로울 때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2018-03-08.


  출간된 책은 너무도 많고 그중에서는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다. ‘괴물‘ 소설에 영향을 미친  <프랑켄슈타인> 도 그중 하나다. 어릴적 문고판으로 읽었다거나 다른 책들을 통해 수없이 언급되어 굳이 읽지 않아도 그 줄거리와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인데, 새롭게 특별판이 나왔다한들 내용이 다를 리 없을 터인데 왜 이번에는 <프랑켄슈타인>에 끌렸을까. 하얀바탕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청록색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표지가 눈길이 갔다.

  결론적으로 안다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 그러니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는 것도 유혈이 낭자하며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날뛰는 괴물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으니,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몰랐던 것을 보상하는 것마냥 여러 갈래의 생각이 들었고 1818년에 씌어진만큼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 고즈넉함이 오래남았다.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백하는 듯이 펼쳐낸다.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이라 이름 붙여졌을지 모르는 이 존재와 작가에 대한 연민이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유일지 몰랐다. 책이 등장한 순간부터 오랜 세월, 최고의 괴물로 상징된 이 존재에 대한 변명도 해주고 싶었다. 커트 보니컷은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같은 발명품이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째서 <프랑켄슈타인> 은 끔찍한 괴물, 악마의 대명사가 되었나. 그것은 이름도 부여하지 않은 창조가가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화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리라 고무되었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열정에 힘입어 피조물을 만든다. 그가 죽음과 시체에서 뽑아내어 창조한 피조물은 바로보기 끔찍할 정도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곧,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을 외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이 탄생한 순간부터 참혹하고 끔찍스럽게 여겼다. 그가 생각한만큼의 “아름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을 동원하여 끔찍스럽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상해보려 한다. 존재의 본질은 외형이 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회의하며 끔찍스러운 괴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 피조물을 버리고 살지만 그가 창조한 피조물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외형을 창조했지만 이 이름없는 피조물은 추위와 허기를 견디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과 언어를 습득한다. 또한 인간의 정, 따스함, 온기, 애정이라는 감정을 알아가고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갈구한다. 인간적인 교감에 대한 욕구는 극지방을 탐험하는 로버트 월턴 선장이 보낸 편지를 볼수록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느꼈을 외로움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채워지질 않는군요. 지금 이 순간 그 부재는 무엇보다 혹독한 불행으로 느껴지네요. 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거릿 누님. 성공에 대한 열의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환희에 동참해줄 이도 없고, 실망감에 시달릴 때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을 종이에 적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썩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감해줄 사람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보면 눈빛으로 화답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로 지칭된 이 괴물은, 어떤 악의도 가지지 않은 채 스스로 학습한 지식을 통해 인간 삶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아간다. 적어도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존재였다. 스스로 악한 존재일 수 없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아니 외형적인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된다. 피조물이 눈먼 노인으로부터 어떤 배척도 당하지 않고 지식과 진실한 감정으로 공감과 소통을 얻는 모습은 외형을 보자마자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슬픔과 괴로움 가득한 이 생명체의 절규를 프랑켄슈타인은 끝끝내 외면했다. 오직 외모가 끔찍스럽다는 이유로 악마로 규정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두고서 ‘악마’의 당연한 행태라 수긍한다. 끔찍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죄의식에 가득 차 방황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자기연민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룰 없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생명체를 창조하였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파괴하려 하지도 보살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많은 나날 죄책감과 자기연민만을 끌어 안은채 외면하고 도망다니는 것이 프랑켄슈티인이 하는 일이다. ‘외롭다’는 말을 끝끝내 외면한다.

  그 생명체는 먹을 것을 달라 하지 않았다. 옷을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다. 집을 달라 하지 않았다.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영혼에 온기를,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좀더 따스함을 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서만이라도 외면받지 않았다면 의지를 가지고 살인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피조물은 악마 그 자체였기에 그 존재가 하려는 모든 일들은 악의 행동이 된다. 존재 자체가 악이기에 절대로 믿을 수 없다. 피조물은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고 끔찍해 하는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자신과 같은 생명체와 함께 하는 것만을 바란다. 이들의 교환조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이 인류애,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강조한다. 인류를 위해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 피조물이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낳을 것을 생각할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류애, 그가 생각하는 책임감이란 피아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었다.

  악의 본질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하면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이었는데, 어째서 피조물은 삶의 규율과 인간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결국 악한 행동이란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혐오는 피조물에게 외로움과 고독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을 더불어 주었다. 애정을 갈구하고 주려 했던 것만큼의 애정을 피조물이 받을 수 있었다면 그가 홀로이 깨달은 지식과 선한 감정의 기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메리 셜리는 열여덟에 이 책을 썼고, 자신의 아이를 잃었고, 그해에는 인도네시아 자바 군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화산재로 인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에 구상하고 생각했던 이 괴물 이야기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메리 셜리의 삶과 오버랩된다. 괴물과 광기는 이상하게도 이 화산 폭발과 같은 열기를 준다. 뭔가 덥고 습하고 끈쩍끈적함을. 그러나 이 소설은 극지방에서 시작되어 극지방에서 끝이 난다. 해빙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얼음의 촉감과도 같은 차분함속에 있다. 광기와 흥분과는 다른 느낌을 계속 갖게 되는 것이 그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음과 시리게 차가운 북극의 이미지가 이 비극적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끔찍스럽게도 외로워하는 이름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언어를 익히지 않았다면 덜 연민했을까. 그런 지식과 감정들이 살아감에 쓸모없었음이, 효용되지 않았음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예 처음부터 야성의 동물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다면 쉬이 괴물이라고 악마라고 생각하기가 쉬웠을까. 문득 내 안의 편견과 얕은 지식으로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를, 많은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