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얼굴은 폭력 레벨 3입니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2018-03-08.
폭력의 피해자가 인터뷰를 했다. CCTV에 공개된 모습만으로도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부산에서 벌어진 데이트폭력 사건. 보이지 않는 데에선 더 끔찍한 폭력이 이루어졌다.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감금·폭력당하고 옷이 벗겨진 채 짐짝처럼 끌려가던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력의 피해를 알려야만 데이트 폭력에 대한 특례법이 만들어지고 가해자 처벌이 강화될 것이라며, 자신을 보며 피해당한 이들이 용기내기를 바란다며 피해 모습을 공개하고 인터뷰했다. 가해자의 처벌은 원체 있으나마나 하니까.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라 더 경악스럽다. 데이트 폭력은 성폭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지, 폭력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살인’에 가까운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반성도 없다. 끔찍한 영상과 골절된 피해자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가해자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 일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 댓글도 있다. 그것이 일부이라 하더라도, ‘일베’의 글이라 하더라도, 수긍할 만한 일인가.
사람이 폭력당해야 할 타당한 이유란 없다. 더구나 외모가 폭력의 이유가 될 순 없다. 폭력 피해자의 외모와 행동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피해자는 ‘맞아도 싼 얼굴 또는 몸매’이거나 ‘맞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그 정도는 맞을 만하다니. ‘성폭력 당할 만큼 생겼네’, ‘성폭력 당할 만큼 생기지 않았는데’라니. 제 자신의 외모 선호에 따라 폭력의 정도를 정하는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도 폭력 게임에 몰두한 모습 같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 이 손가락질은 가정 내에서,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뻔히 보이는 곳에서도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처벌받지 않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는 가해자를 만들어 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숨도록 만드는 현실에서 이번 피해자의 인터뷰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관한 합당한 처벌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몇십명은 더 다치고 죽어야만, 법이 만들어질까. 자신보다 27살 어린 중학생을 임신시킨 40대의 남성이 무죄로 판결되는 세상에서, 데이트 폭력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형량은 과연 얼만큼이나 높아질 수 있을까 싶다. 남성은 사랑이라 우기고 미성년자는 사랑이 아니라 했지만, 법은 ‘그건 사랑이야’라고 미성년자의 감정까지도 판단해줬다. 록산 게이가 지적했듯이 “너무나 자주 ‘그가 말했다’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전적 에세이 「헝거」에서 열두살에 당한 집단 강간 이후로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었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무기력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보호받지 못한 그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통을 잊기 위해 게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는 것이었다.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먹고 먹고 또 먹어 뚱뚱해지도록 만들었고 190cm에 261kg의 거구가 되었다. 또 짧은 커트 머리에 큰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을 부치(남성 역할을 하는 여성 동성애자)로 만들어 행동했다. 법원 판결에 의해 “사랑을 한” 중학생도 숏커트를 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록산 게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또다른 고통과 상처를 받게 되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멸시와 혐오,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혐오가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록산 게이는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껴 집단 성폭력 당한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했다고 해도 “집단 성폭력을 당한 몸”으로 록산 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거기에 조금은 이해를 조금 섞은 동정의 시선을 던졌을지 모른다. ‘그러니 몸이 그렇게 뚱뚱해도 어쩌겠어’라거나 ‘그런 몸으로 무슨 성폭력’이라거나 그런. 어찌되었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몸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시선을 던질 것이다. 흑인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더한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받는 록산 게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가하는 이 시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더욱 제 몸에 통제권을 잃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하며 혐오하며 세상을 버텨왔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이런 록산 게이가 마침내 조금 자신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거두는 변화는 눈물겹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그로 인해 변해버린 거구의 몸으로 인해 또다른 시선에 힘겨워하지만 마침내 무거운 몸으로 인해 발목까지 부서져버린 상황에서 자각하는 그때. 그것은 스스로가 가한 유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 거창한 이름으로 필요하리라 생각지 않고 그저 자신이 몸을 돌보고 자신의 몸과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깨달았다. 그리고 치유가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치유가 되리라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그 스스로 가졌던 허기를 지우고 치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겪은 일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내 몸에 남겨져 있다. 내가 겪은 일에서 살아남긴 했으나 그것은 이야기의 전부라 할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살아남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생존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으나 누가 날 여전히 ‘피해자’라 해도 신경 쓰지는 않는다. 나는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이름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피해자이고 그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산 게이와 여학생처럼 폭력으로 인해 자신을 지우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숨어 있는지, 앞으로도 얼마나 숨게 될지는 움직이지 않는 ‘법’의 변화가 조금 좌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오래도록 당연시하는 이 사회에 끊임없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록산 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것은 폭력의 역사이다. 록산 게이는 이 폭력의 역사에서 자신에 대한 많을 것을 알려주며 다시금 사회속으로 발을 내밀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했는지”를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