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지음, 문동식.엄성은 옮김 / 시그니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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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중독


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시그니처, 2017-08-09.


  미국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터너 가족의 이야기는 새삼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 돈을 벌기 위해 작은 시골마을 아칸소로부터 대도시 디트로이트로 건너온 프란시스 터너와 비올라 터너 부부에게는 열 세명의 자녀가 있다.

  열세명의 아이가 있는 가정의 이야기는 한권의 책에 그들의 이야기가 다 못 실렸을 정도이다. 그들이 자라온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 한 명 한명의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대로 쓰려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너 하우스엔 이제 누구도 살지 않고 텅 비어있다. 이 텅 빈 집마저도 처분해야 할 상황에 놓인 열세명의 형제들은 집을 처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한다. 집은 시세가 고작 4천 달러지만 걸린 빚은 4만 달러이니 의견은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이 그 집에서 성장하면서 추억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기에…. 

  심리학자 아들러는 출생순서별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그런 아들러가 살아 있다면 이 열 세명 아이의 성격을 분석해달라 하고 싶지만 아들러의 논문에도 열세명까지는 분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첫째에 관해서는 책임감을 이야기하는데 터너가의 장남 프란시스 터너, 찰스 또는 차차로 불리는 첫째 역시도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한다. 이런 책임 중독을 가지고 있지만 차차가 보기에 터너가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중독’증상을 가지고 있다. 둘째 프란시스는 음식과 영양과 건강, 부엌 도구에 중독되어 있고, 로니는 오십이 넘어서도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 트로이는 성공, 쌍둥이 말린과 비올라는 일, 막내 레일라는 도박 중독이다. 차차의 아내 티나는 어떤가. 그녀는 종교 중독이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 있는 열세명의 장남은 여전히, 환갑이 된 나이에도 책임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차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유령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린 시절 창문으로 들어온 유령에게 펀치를 날리던 차차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타난 유령 때문에 의사 앨리스에게 치료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차차가 과도한 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란시스 같은 소년이 유령을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너무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땅에 묻었고 어머니는 떠나 계셨다. 두 분 다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바지를 끌어올려 입고 맨발인 유령이.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고 사진도 없었기 때문에, 이 유령이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한없이 깊었던 그였기에 어떻게 다시 찾아왔냐고 물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만일 유령을 간청해서 저세상에서 불러올 수 있다면, 어린 프란시스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차차가 가족 모두가 중독되어 있다고 보는 것처럼 터너가의 자녀들은 모두 삶의 어려움 속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 위안을 받고자 하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혼하며 홀로이 사는데 대한 외로움과 힘겨움 속에서 도박을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위안을 받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할때 차차는 유령에 매여 있었다. 어린 시절 딱 한번 본 그 유령에게 말이다. 유령을 보고 싸우기까지 한 차차는 가족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또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의 개성이나 특별함을 누리지 못한 상실감이 뒤늦게 생긴다. 다시 유령을 봤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도 유령을 보았다는 경험이 자신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었음도 안다.

  프란시스 터너 가족이 전쟁을 넘어 시골마을에서 공업도시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우리나라의 전쟁 전후,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과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몰락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터너가의 가족들 모두 살아가기 위해 움켜 쥔 것과 버린 것들이 있다. 스스로 버리게 된 것들과 타인에 의해 상황에 의해 뺏긴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꿈이다.


흑인들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손해를 볼까 봐 그냥 포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서 백인들이 알아서 뭔가를 하겠거니 믿는 거죠.


  ‘적당히’를 모르는 터너집안 사람들 속에서 차차는 ‘중독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두진 않겠다’ 다짐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겠노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은 “유령의 존재를 빌어 삶의 목적을 정의할 만큼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삶에서 목적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터너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같은 상실감을 내내 겪는 듯했다.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에서부터 쓸쓸한 느낌이 줄곧 따라오는데 그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부여되어 있던 잃어버린, 놓쳐버릴 수밖에 없던 나 자신을 위한 꿈과 희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마냥 가족을 위한 ‘희생’을 추켜세울 수는 없음을. 세월이 변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세대 차이와 삶에 대한 관점이 가져다주는 가치의 차이.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순간에라도 자아를 잃게 되는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터너 하우스에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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