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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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편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쯤 전에 편지가 도착했다. 북에 띄운 메시지가 USB에 담겨 왔다. 되돌아온 편지가 아닐 걸 알면서도 전달되지 못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북에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씁쓸했다. 만나지 못하면 소식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건가.

  이산가족 상봉 뉴스 속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연신 말하듯 고령의 노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우는 모습들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할머니는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야. 별로 안 애틋했어.”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작년부터 적십자 관계자들의 연락과 방문을 받았으니 이산가족과의 만남은 준비가 오래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북 생존자 명단이 교환될 즈음 북에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었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은 한번 보시겠구나 했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더라도 아쉬울 것 없었을 거라는 이 위안은 할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동생을 만나고 가셨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내가 갖는 것이니까.  

  아버지는 외사촌들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게 될 날이 올까. 북에서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삼촌의 생존 소식조차도 전해받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은 그런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산가족들의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많다는 것을, 남아있는 가족보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산가족’은 없어지겠지만 그 쓸쓸하고 슬픈 마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삶의 시작은 기쁨이지만 삶의 결말은 결국 슬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제목과 이 문장이다. 때로 이 제목이 맴돌 때가 있다. 소설은 참 쓸쓸하면서 따스했다는 기억을 준다. 삼 년 동안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맺은 ‘나’가 그들에게 띄우는 편지. 단 한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함께 한 눈먼 개 와조와 전전하며 하루의 마감때 쓰는 편지는 그날의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띄운다. 여행 중 만난 사람을 번호로 기억하는데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 751과는 여행을 함께하기도 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만큼이나 편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우체통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편지가,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로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맞닥뜨리고 위로하기도 했는데 소통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일련번호들. 할아버지 장례식날 받은 연인의 이별통지처럼 ‘나’만 그들에게 일방통행의 소통을 했던 것처럼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3년여의 나날. 모텔이 꽉 차는 날 고시원에 묵다가 화재로 겨우 살아나기도 한다. 기력이 다해 가는 와조 때문에 아무에게도 편지받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집에서 와조는 ‘나’의 곁을 떠난다. 편지를 받기를 원하는 집엔 ‘나’를 맞이한 편지도, 가족도 아무도 없다. 

  ‘나’가 와조와 함께 이렇게 편지여행을 다니게 된 시작에는 ‘나’의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고통과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견뎌가는 ‘나’의 여행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기대하는 만큼 세상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나’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교감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같이 있다’가 아니라 ‘같이 나누다’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끝없이 확장되는 일련번호에게 가 닿았으려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10년쯤 전 출간된 소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나’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련번호들처럼 번호표를 달고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사연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도 이렇게 한번 만나고서 돌아가면 간절히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받을 수 없었던 편지, 그로 인해 절망하고 그러나 또 희망하면서.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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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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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라서 서평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민음사, 2018.


  공채제도가 한국사회에만 있는 제도였나? 아무튼 이 책은 한국사회에 있는 수많은 공채제도 중에서 특히 문학공모전에 관한 르포다. 저자는 ‘공채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에 대한 집착, 서열 문화, 그리고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이 어떻게 좌절을 낳게 됐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학공모전에 중점을 두고 공채제도가 가지는 현실의 문제와 대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 관련 종사자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풍부하게 조사하여 다양한 사례를 든 취재 형태로 작가가 전직 기자라는 점이 소설보다 확실히 느끼게 한다.

  장강명은 문학계 공채제도의 혜택을 많이 받은 작가다. 많은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기자전력 사회현실을 다루는 소재들을 글로 녹여냄으로써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또한 그런 작가가 기본적으로 문학 공채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전제를 두고서 다루는 취재기는 어떤 흥미진진함과 통찰이 있을까, 기대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공채라는 시스템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기도 했음을 좀더 느끼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다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식 공개채용 제도가 과연 불합리한 제도일까.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으니 어떤 시스템이라도 문제가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공개채용은 한국에서 가장 비리가 없는 제도라고 인식된다. 문제은행식 시험이든 어쨌든 공평하게 문제를 풀고 맞은 개수에 의해 합격이 가려지는 이 방법에 대해 특별히 불편부당한 제도라고 하지 않고 오랜 세월 흘러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개입되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문화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 문화 자체가 공채제도 이외의 다른 평가방식을 감당할 여건이 미흡한 것도 같다. 미국 사회학자 토비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저자는 공채제도가 사회적 계급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공채제도의 지나친 경쟁은 합격은 곧 간판을 얻는 것, 권력을 얻는 것과 같게 된다. 합격자간 군대와 같은 기수문화 형성으로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구조가 형성됨은 물론이다. 반대로 불합격한 이들은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채제도가 아닌 다른 형태의 채용 시스템은, 어떤 장단점이 있는가에 관한 진지한 취재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서양에서 주로 이루는 심층면접과 추천에 의한 채용제도의 한국 적용이 공채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이 되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가 더욱 암울해 보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다루는 것이 문학상이니 문학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문학상 출신 저자는 이 문학상제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많은 문학상 지망자들이 문학상 제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으로, 그러면서도 다른 길이 없기에 문학상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는 자기 책을 낼 기회를 말한다. 가장 쉽고 빠르게 자신의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장편문학상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장강명처럼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는 기출간 작가들이 늘었고 거대 상금을 내건 공모전 또한 폐지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공모전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다른 형태의 책출간 방식을 이야기한다. 몇 개월 사이 5권의 책을 출간한 인기작가, 김동식 작가의 예를 든다.


김민섭 작가는 김동식 작가가 왜 잘 돼야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소수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 ○○문학상이라는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되는 일, 그러한 제도권의 선택이 아닌 독자들이 만들어 낸 작가라는 것‘도’ 가능한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분은 거기에 동참했고 그 증거가 지금 여기 앉아 있다고, 했다.”


  ‘왜 잘 돼야 하는지’에 대한 김민섭 작가의 김동식 작가의 사례에 대한 의견은 참고할 만하지만 한편에서 바라보면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된 사례에 다름 아니다. 단지 특정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게시판 이용자들과 교감하며 쓴 글들을 책으로 엮은 줄 알았더니, 거기엔 김민섭 작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간판을 단 이의 적극적인 마케팅에 힘입은 바와 심사위원의 심사를 통한 문학상과 차이는 있지만 또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의문이 든다. 소수라고 하지만 심사위원은 차라리 복수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젊은 한국 신인 소설가 두 사람이 책을 내고 독자를 만난 과정에 의미시장한 공통점,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통의 결핍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독서 공동체다. 김동식, 또는 이진이라는 신인 작가의 신간 한국 소설이 나왔는데 읽어보니 준수하더라, 또는 보통이더라, 또는 시원찮더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 ‘우리 작가’라며 무조건적으로 열광하지도, 미등단 작가(또는 문단 작가)라며 외면하지도 않는 공간.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면 어떤지, 지난달, 지난해에 나온 다른 신인 작가의 작품에 비하면 어떤지 토론하는 공간. 그러다 적절한 맥락에서 호시 신이치와 프레드릭 브라운과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자들의 이름과 작품이 언급되는 공간. 그런 대화와 평판이 계속해서 쌓여 가는 공간. 그래서 예비 독자에게 정보를 주고,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공간.


  취향없이 흥미와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공부로 길들여진 독서,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보며 읽는 책, 누군가 유명한 이가 읽거나 추천하는 책들을 읽는데 적극적인 독서 시장과, 독자들. 길들여진 한국사회의 ‘독서’의 세계인데 저자는 독자의 몫이라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서평을 쓰라고 말한다. 독자들이 더 많이 책을 읽고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수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 책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맞는 말인 듯한데 몹시도 허무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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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08-1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었군요. 르포형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그닥 취향이 아니어서 스킵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이 소설은 특히 작가가 직접 소속되어 있는 분야라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모시빛 2018-08-20 08:10   좋아요 1 | URL
그 분야 관계자의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그 세계가 그렇구나, 나름 정보를 얻기도 하구요.
 
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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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비수가 되고 싶다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03-31.


  괴물에 대한 인상은 흉물스럽거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몬드> 속의 괴물 윤재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약물에 취한 것처럼 힘이 없이 보인다.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라 과소행동인데 이런 행동에 비해 생각은 과하게 넘쳐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한 기능이 한쪽으로 쏠린 듯이 소년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할애한다.

  하긴 ‘웃는다, 운다’ 또한 학습된 형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정의 예의를 오래도록 학습받아 왔으니 윤재 또한 그러한 교육을 엄마에게 받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대해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개인차가 있고 윤재가 말하듯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곧 정의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의학적으로 윤재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윤재의 상태에 엄마도, 할멈도, 나아가 세상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져주기를 더 바라는 건가. 사실, 어떤 상황에 따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후 아닐까. 그렇다면 감정보다 선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영역이 더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엔 ‘감정을 느껴서’ 일어나는 사건·범죄가 많다.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사이코 패스들의 연속적인 범죄와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시선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잠재적 범재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사고를 상실하기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등등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각의 결여 아닐까.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불능자 괴물 윤재와 감정과잉자 괴물 곤이의 대립을 보고 있으면 탁구가 생각난다. 공격수와 수비수 간의 싸움에서 공격수가 이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비수의 지속된 방어에 공격수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탁구 경기였다. 이 경기 이야기를 한 이는 수비수인 한국 선수가 방어만 하는데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나 흥미진진했다고 말했다. 결국 무너져 버린 공격수와 달리 수비수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는데, 딱 윤재가 그렇다. 곤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늘 같은 태도로서 대응하는 윤재에게 폭발하는 건 곤이다.

  내가 엄마라면 윤재를 어떻게 대할까 가정을 해보는데 그저 가정인데도 뭐가 막혀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편도체에 이상이 오는 것인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진다. 특별히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분노를 느낄 것 없는 상태. 이것은 살아가는데 특별히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만. 처음부터 비정상이라는 틀로 가둬지게 되는 소년이라면 아무래도 삶을 대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감정적인 동요가 되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든 사회를 살아가는 규율을 가르쳐주는 이의 방침이 소년, 윤재를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감정불능’ 아이가 ‘이성 불능’이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런 엄마와 할멈이라는 존재가 윤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도라가 등장해 동년배 여학생에 대한 호감을 느낌으로 인해 변해가게 되는 윤재를 드러냄으로써 도라의 역할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윤재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토대는 엄마였다. 엄마의 두려움과 공포가 기우였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엄마의 가르침이 윤재가 결핍 속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재는 그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만들어 갔다. 결국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가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이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함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 제 아이에게는 이기를 쫓는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가르침만 아니라면, 수많은 이들의 아몬드에 이상이 온다 해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없는 사회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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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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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장일까

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arte(아르테), 2017.


  『크루얼티』에서 보여주듯 국가를 위한 직업군의 삶은 위험이 가득하다. 액션과 스릴이 가득한 첩보 스타일의 이야기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고 이야기의 구조도 줄거리도 결국은 유사하기 그지없는데 지속적으로 양상된다. 이번에는 열일곱 고등학생, 그웬돌린이 외교관 아버지의 납치범을 추적하는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화되기로 했다는데 ‘영화관’이 좋아할 이야기구나 싶었다. 어떤 형태로든 CIA 비밀요원이란 흥미진진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웬돌린은 CIA요원이 아닌 열일곱 다른 아이들에게 왕따당하는 여학생일 뿐이다. 그 어떤 비밀훈련을 받은 적 없는 그웬돌린이 파리, 베를린, 프라하를 넘나들며 사라진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수많은 범죄자들과 맞닥뜨리는 일과 같다. 그 일을 겪으며, 아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 범죄조직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웬돌린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새삼 다른 의문이 들었다.

  우와, 그웬돌린, 정말 멋져!

  이런 반응은 들지 않았다. 액션 스릴러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의 정점을 밀레니엄의 마라가 가지고 있기에 그웬돌린의 매력이 비교되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그웬돌린의 창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바비’와 ‘공주’로 국한되는 여성성에 반발해서 그웬돌린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여성성의 제거가 곧 남성성의 극대화인가, 바비 공주 캐릭터도 여전사 캐릭터도 지나치게 안이하고 소비주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사라진 부모를 찾아가는 여정은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가 보여주었다. 그 시절의 어린 소년이 엄마를 찾아가던 여정과 최근의 소녀가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섭게 변화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그웬돌린은 더욱 더 무장해야 한다. 짧은 순간에 그웬돌린은 범죄와 폭력을 주요업무로 삼는 이들을 제압한다. 짧은 순간의 수련으로 오래도록 폭력을 쉬이 사용하던 남자들에게 신체적인 열세 없이 맞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판타지가 아니라 오버다. 그웬돌린의 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랄하다고 해야 할 범죄조직들, 인신매매단의 보스부터 말단 조직원의 숙련된 전문성은 사라져버린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당연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데 다른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웬돌린은 아버지가 표면적으로는 외교관이었지만 CIA 비밀요원이라는 점을 알고서 아버지를 절대 선의 위치에 놓는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납치한 일당들은 모두 가 ‘나쁜’ 사람이 된다. 이 전제는 나쁜 사람들은 모두 ‘죽여도 된다’라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그웬돌린이 만나게 되는 일당들은 마약거래, 인신매매, 무기 밀매를 일삼는 확실히 악한 이들이긴 하다. 범죄조직의 잔혹성에 맞추어 그웬돌린 또한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혹해진다. 더 악한 일들을 처단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고 더 큰 잔혹성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열여덟이 된 그웬돌린의 활약상은,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해진다. 이건 성장일까.

   

“생각해보면, 이 애들이 너무 어리다는 생각도 들거든. 어쩌면 저 빨간 머리는 페테르부르크에 계속 살면서 학교 선생님이나 뭐 그러게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저 애를 창녀로만든 거잖아.“ 에밀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 앞으로 펼쳐진 길을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철학자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거야.“


  5개 국어를 하는 그웬돌린 역시도 통역가가 되었을 지도 모르고 왕따로 기억되는 학교에서 만난 테렌스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다. 세상이 그웬돌린을 잔혹한 여전사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고 열광하고 있다니. 나도, 생각을 아예 안해야 마음이 편해지려나.

  

“그럴 리가 없어요. 클라디보는 괴물이잖아요, 아빠. 클라디보는 인신매매범이에요, 여자들, 어린 소녀들을…….”

하지만 아빠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직접 겪어보았을 테니까.

“맞아, 하지만 CIA는 상관하지 않지.”

“하지만 클라디보가 CIA 요원이라면 어째서 아빠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거예요?”

“돈 때문이야, 그웬. 언제나 돈 때문이지.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야. 클라디보의 보스였던 조릭은 거액의 계좌를 남기고 죽었어. 클라디보와 다른 CIA요원이 그 돈을 가로채려고 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아낸 거야.”


정의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야. 오늘 밤에 네가 한 일이 바로 정의야. 정의의 얼굴은 추하고 비열하거든.


   세상은 가치와 신념보다 ‘돈’이 우선한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가장 잘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라는 이 씁쓸한 말, 모든 범죄의 이유는 돈이고  CIA 요원이라면 악인이 아닐 거라는 이 믿음이 깨지는 일 또한 잔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며 달려왔던 그웬돌린의 아버지는, 믿을 수 있는 CIA 요원인 걸까. 미심쩍어하면서도 그웬돌린에게 처음부터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해야 했고 결단을 해야 했던 그웬돌린의 활약의 정점은 인신매매로 잡혀 있던 소녀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를 찾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를 찾고 난 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달려간 그웬돌린은 이제 이전의 그웬돌린으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다. 범죄의 잔혹성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 그 세계를 잊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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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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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의 시절을 지나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영미소설의 대다수, 수많은 작가의 책을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저자는 27년간 200여 권을 번역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가늠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작가보다도 기억에 남는 번역가 정영목의 번역의 방법과 번역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 독자들이 말하는 ‘번역투’ 문장에 대한 생각, 번역의 역할과 번역가로서의 자세, 번역과 글쓰기 등에 관한 저자의 고민과 생각 등은 번역 작가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저작을 편하게 읽어왔으면서도 쉽게 ‘아, 번역투’라고 하던, 책이 흥미롭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으면 쉬이 ‘번역탓’으로 돌리던 것을 쑥스럽게 한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되었다고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윤기 작가의 신화관련 책에서 도대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고 영어 원문을 기재하지도 않은 ‘육준강대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원서찾기 전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가장 머리를 아프게 했던 번역서였고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로베르트 발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번역되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맛, 느낌을 알고 싶어 원문을 애타게 읽어보고자 했던 적도 있고 영미권이 아니라 동구권, 아랍권,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끌리는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나마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하여 나온다면 환호하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번역의 세계는 가야할 길이 멀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적다는 것, 또한 노벨상 후보로서의 위상을 얻는 일이 힘들다는 것,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오역 논란 등이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AI가 바둑 세계 제패에 이어 번역과 창작에까지 진출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저자는 기계의 번역에 대해, 특히 소설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AI가 멋진 번역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안심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이 사람의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계속 사람의 일이었으면 한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 나름의 우회로를 거쳐 인간번역과 같은 수준, 혹은 더 나은 수준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우회로는 인간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이 책 한권 한권을 번역하는 동안 번역의 원칙과 방법이 되었다.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겠다.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고민들, 나만의 원칙과 방법을 찾아가기까지의 저자의 노하우와 깊은 생각들이 같은 직업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할 때는 자기 학대적인 면과 과대망상적인 면이 공존하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확, 와닿는다. 그래서 일이란 언제나 힘들다. 내가 하는 일에서 원칙과 방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비록 자기학대를 부추기는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일을 대한다면 때론 과대망상쯤은 허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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