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수비수가 되고 싶다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03-31.


  괴물에 대한 인상은 흉물스럽거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몬드> 속의 괴물 윤재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약물에 취한 것처럼 힘이 없이 보인다.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라 과소행동인데 이런 행동에 비해 생각은 과하게 넘쳐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한 기능이 한쪽으로 쏠린 듯이 소년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할애한다.

  하긴 ‘웃는다, 운다’ 또한 학습된 형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정의 예의를 오래도록 학습받아 왔으니 윤재 또한 그러한 교육을 엄마에게 받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대해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개인차가 있고 윤재가 말하듯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곧 정의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의학적으로 윤재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윤재의 상태에 엄마도, 할멈도, 나아가 세상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져주기를 더 바라는 건가. 사실, 어떤 상황에 따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후 아닐까. 그렇다면 감정보다 선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영역이 더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엔 ‘감정을 느껴서’ 일어나는 사건·범죄가 많다.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사이코 패스들의 연속적인 범죄와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시선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잠재적 범재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사고를 상실하기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등등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각의 결여 아닐까.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불능자 괴물 윤재와 감정과잉자 괴물 곤이의 대립을 보고 있으면 탁구가 생각난다. 공격수와 수비수 간의 싸움에서 공격수가 이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비수의 지속된 방어에 공격수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탁구 경기였다. 이 경기 이야기를 한 이는 수비수인 한국 선수가 방어만 하는데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나 흥미진진했다고 말했다. 결국 무너져 버린 공격수와 달리 수비수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는데, 딱 윤재가 그렇다. 곤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늘 같은 태도로서 대응하는 윤재에게 폭발하는 건 곤이다.

  내가 엄마라면 윤재를 어떻게 대할까 가정을 해보는데 그저 가정인데도 뭐가 막혀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편도체에 이상이 오는 것인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진다. 특별히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분노를 느낄 것 없는 상태. 이것은 살아가는데 특별히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만. 처음부터 비정상이라는 틀로 가둬지게 되는 소년이라면 아무래도 삶을 대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감정적인 동요가 되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든 사회를 살아가는 규율을 가르쳐주는 이의 방침이 소년, 윤재를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감정불능’ 아이가 ‘이성 불능’이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런 엄마와 할멈이라는 존재가 윤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도라가 등장해 동년배 여학생에 대한 호감을 느낌으로 인해 변해가게 되는 윤재를 드러냄으로써 도라의 역할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윤재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토대는 엄마였다. 엄마의 두려움과 공포가 기우였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엄마의 가르침이 윤재가 결핍 속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재는 그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만들어 갔다. 결국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가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이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함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 제 아이에게는 이기를 쫓는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가르침만 아니라면, 수많은 이들의 아몬드에 이상이 온다 해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없는 사회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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