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기원전이란 말은 참으로 아득하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마저도 실체가 없는 미지다. 다만, 이 기원전 BC라는 단어에선 동양이 아닌 서양의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대해 다른 나라들보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 나라의 풍경이 떠올려진다. 문명의 발상지가 서양만 있던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기원을 그리스로마로 만들어버린 건, 신의 이야기 그리스로마신화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리스로마신화를 처음 접한 건 이야기 가득한 토마스 불핀치의 책이었다. 처음의 감흥이었는지 이후로 토마스 불핀치 것보다 재밌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널리 알린 공로자가 토마스 불핀치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쨌든 무수한 판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했다. 그림책, 만화책, 동화책 등등등.

  같은 이야기일텐데도 ‘원전’이란 말에 혹해 아폴로도로스의 책을 집었다. 이 원전이란 말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단단한 뼈대일 테고 기원이겠지만 어쨌든 뭐가 다르랴 하면서. 하지만 결론은 달랐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전달하는지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원전’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단단한 기원을 주는 느낌이었다. 형태에서 그것이 전해졌는데 성경식 형태와 같아 보였다. 또 신들의 탄생이나 자손들의 가계보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보통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야기’로 이어져 온다면 이것은 사건과 사실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다 간결한. 그래서 어쩜 이야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불친절하게 여겨질 것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사람이라는 아폴로도로스가 쓴 이 책은 ‘신’이 존재하는 듯이 역사서인 듯한 서술의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가 생략됨이 없이 잘 전개되어 있다는 점도 이설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참고하며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의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책은 그만큼 기원이며 원전이며 객관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저자 자신도 이 책의 목적이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다루기보다 그에 대한 ‘정리’라는 말에서 왜 이 책이 이렇게 서술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에 맞게 잘 쓰여진 책이다.

  저자가 만든 것인지 출판사가 정리한 것인지 신들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좋았다. 비슷한 이름이나 연대가 가물가물한 신들의 서열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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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것, 것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저, 오마이북, 2012.

 

  이 책이 기분 나쁜 건, 하나다. ‘너 때문에’라며 탓을 돌리다 문득, ‘내가?’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가 90이상이고 난 0.00001%만 하련다. 그게 솔직히 맞다고 본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0.00001%에 발목 잡혀 버린다. 나의 %가 결정적인 한방일 수 있음을 넘치지 않고 잘 버티는 컵에 내가 떨어뜨린 한방울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상황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든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한두 명의 개인이 바뀌면 그 사회는 그 몫만큼 바뀌게 된다. 나 혼자만 바뀌어도 세상은 한 사람만큼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기에 나의 변화는 항상 주변의 변화를 몰고 온다. p5~6


 지금, 우리는 망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이라니, 주욱 지금이었다. 지금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망가진 사회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모든 것들이 개판이다. 망가진 것은 내 책임이 아니었으니 복구의 책임도 내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열심히 지켜봤다. 사실, 망가진 것들을 탓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었겠나 싶다. 아니 그거라도 해야지.

  수많은 지표들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고 그나마 유일하게 총기사고는 거의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치안이 안전한’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당장 총기자유가 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체감하는 입장에선 치안이 안전한지 잘 모르겠다. 그것만이 자주 없을 뿐이라는 걸 아니까. 망가진 것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는데 하나씩 정리되어 보니 이토록 많았었나 싶은 것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꼽는 것이 더 쉬울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털 메인화면 뒤로 재빨리 숨어버린 당장의 전기, 가스 민영화 소식이나 ‘혐오’와 ‘분노’를 기반한 사건들,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안전사고들도 ‘망가짐’을 더하는 요소가 되겠지.

  망가짐의 이유는 결국 망가진 ‘의식’이 결정적인 건가. 망가뜨리는 주체와 더불어 망가짐을 방치하고 망가짐에 익숙한 사고들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진행된다. 약자가 되는 것은 권리는 사라지고 권력이 힘을 펼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뭐, 권리를 챙기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것을 어쩌라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물고 물린 이 약자의 삶과 권력의 세상.

  우리가 망가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패배주의에 물든 공명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상실된 것도 있지만 인터넷 상에서 비난이 속출하고 조롱이 난무하는 것은 공명심마저도 망가져 있기 때문이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패배의식 때문이다. 공명심은 느끼고 싶지만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짓이 ‘만만한 상대 물고 늘어지기’다. 이는 한국 주류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p87~88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외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많이 들어온 소리지만 투표해야 한다고. 지금 당장은 총선도 끝난 마당이라......마냥 투표를 끝내 놓은 시점에서도 ‘가시적’인 것이 아직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긴 하다. 당장 내년이 대선인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과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저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안타깝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모든 사회학 서적들은 ‘투표’를 강조한다. 나 또한 모든 것들에 결국 답은 투표이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무 자주 듣고 자주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이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진실성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진 사회에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일단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가 우선될 것이다. 당장 내가 취업하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명퇴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무얼 더 가지거나 내가 현재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눈 앞이 아득한 상황에서 내 안정을 먼저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눈 앞의 안전을 확보해야 그 다음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본능인걸.

  그래도 저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니 내 삶이 절박할 때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내 삶을 다른 이가 보아주길 원한다면 말이다. 이렇듯 역지사지의 심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가자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 희망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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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904년 6월 16일의 랩 혹은 일기




이것은 랩이야!

 

  어디에서 뽑은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책을 순위화한 목록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본 목록들의 상위권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나는 타인이, 전문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목록을 살피면서도 이 율리시스를 잘 피해왔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이미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이야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제임스 조이스의 시각으로 다시 읽을 필요까지야라며 스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강제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책을 펼치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까닭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등한시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지며 이 두꺼운 책을 얼른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짐과 동시에 읽는다는 기쁨이 솟구쳤다. 그토록 사람들이 율리시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정복욕이지 않을까.

  율리시스를 읽다가,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것은 랩이야’란 생각이었다. 사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말들이 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생각의 흐름을 감히 말이 뒤따라 갈 수 없다. 

  오디세우스 10년의 이야기보다 율리시스 하루의 이야기가 이렇게 양적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페넬로페 역시 남편을 기다리면서 무수한 내적 갈등을 했을 것이고 거듭 거듭 생각의 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몰리가 내뱉는 문장들을 보면서 마침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블룸의 생각들을 다시 뒤적였다. 마침표가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읽어 가면서의 호흡도 달라진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이겠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블룸의 간결하면서도 딱딱 끊어진 호흡과 달리 몰리의 호흡은 쉴새가 없다. 여성의 생각도 수다스러움이려니 하는 걸까. 아무튼 몰리의 생각들은 랩처럼 음악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했고 내용의 놀라움도 상쇄시켜주는 듯 고조시켜 주는 듯한 문장들을 읽으며 현대판 랩으로 읽어 내려갔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이 아니다


   율리시스 이야기를 생각했던 내게 당연 첫 장부터 ‘이게 뭐지’란 당황스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담이다. 머릿속을 항해하는 이야기. 하루 동안에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가. 참 재밌네, 재밌어란 생각들을 하면서 어딘가를 떠도는 것만큼 의식의 흐름 역시도 재미있는 유랑이란 생각을 했다.

   거창하게 들리는 의식의 흐름이란 문학용어가 사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소설기법이 가미되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낯설다기보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 뭔가 익숙해, 익숙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쓰라고 재촉받으며 제출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일기가 아니라 뭔가 가정의 격랑을 겪을 때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써내려간 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토록 기법적으로 쉬운 소설이 어디있을까.


율리시스는 외설인가 아닌가


   조이스의 연보에서 율리시스가 외설시비로 휘말렸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뭐?’. 그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마광수의 책. 마광수의 책을 본 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저런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을까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하다. 결론은, 글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이건 꼬투리 잡는 인간과 집단은 있고 그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집단은 있으니.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시의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는 해금조치가 되었으니 이 책은 외설시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설’에 더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본다면 이런 시비가 있다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유럽도 역시, 실제 외설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해 낸 작품들을 보는 것은 인식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일단, 율리시스는

 

   당대에 그토록 시달림을 안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이토록 격찬을 받으며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소개에, 작품 소개에 구구절절하게 나온 바에 의하면 <율리시스>가 가지는 가치는 혁신적인 소설기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나올 시점에 한창 주가를 홀리던 의식의 흐름 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어미학이라고 한다. 언어미학의 관점에서는 번역을 보는 입장에서는 늘 아쉽다. 어떻게 언어유희가 활용되는지를 모국어를 느끼는 그 맛으로 알고 싶지만 늘 각주를 의지해야 하며 그마저도 쉽게 와 닿지를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 언어유희를 즐기는 나로서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율리시스>를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위치지은 이유란다. 그 위치를 지은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 문학을 전공한다는 ‘전문가’에 의해서겠지.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고 조이스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들도 있다 한다. <율리시스>로 문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율리시스>를 끝까지 읽은 사람보다 많다라는.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올려놓는 것이 그러니 의아스럽기도 할밖에. 그토록 공격받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소설은 공격으로 인해 더욱 회자되어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T. S.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자기들의 작품을 쓸 때 이 책의 영향을 받았나나 어쨌다나.

  왜 ‘다름’은 늘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나의 이해하지 못함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들은 참 안타깝다. 어쨌든, <율리시스>보다 더 욕먹었던 작품이 <피네간의 경야>인데, 이 책도 지난 번부터 계속 읽어야지 하고 있던 책이다. 욕을 많이 먹은 작품이라니 또 불끈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말년에 눈 때문에도 딸 때문에도 힘들었던 제임스 조이스, 지금 후대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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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와 글쓰기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랩같은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

  내가 <율리시스>를 보완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므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몇 번을 더 읽고 나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주구장창 분석해 댈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경외감, 달리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율리시스>를 읽었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이것이 하루의 기록이라는 것에 놀라고 이것이 율리시스의 뼈대를 가져왔다는 데 놀라고 조이스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의 돌려쓰기라는 데 놀라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델이라는데 놀라고 아무튼 놀라고 놀라고.

  이 작가, 교묘한 방법을 쓴다. 자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생각보다 글이 편하게 읽혀졌다. 어쩌면 다른 생각들을 하지 않고 별생각없이 읽으려 했기 때문일지도. 처음엔 무수하게 달려있는 각주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 많은 각주들을 다 이해해야 하니 첫 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책을 북리뷰가 끝난 이후에도 완전히 다 읽기로 작정을 하고서야 각주를 잠시 잊고 그냥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니 내 식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글이 넘어갔다. 아마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글들을 곱씹게 되겠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해석하려는 생각들이 이 글을 읽는 방해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의미찾기에 매달리지 않는 것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긴 한데.

   제임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구성과 등장인물을 자신의 <율리시스>를 써 나가는 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제목과 목차만 봤을 때만 해도 이것은 그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이것이 왜 율리시스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율리시스와의 연관성을 계속 곱씹는 맛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그 긴 세월을 바깥에서 떠돌아다닌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이야기다. 제임스 조이스가 태어난 곳,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율리시스 속에 담겨 있다.

  <율리시스>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들을 끌어와 이 뼈대를 설명하자면, 율리시스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3부 구조와 같다. 텔레마키아, 율리시스의 방랑, 귀향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장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그것들을 차용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온전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는 작자 자신이기도 하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다. 율리시스에서는 조이스의 작품들 속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런데 또 이들 모두는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의가 실제 모델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감동이란 건 무얼까. 어떤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탁월하다? 그냥 율리시스는 놀랍다. 가만 보면 별 일 아닌 것들을 쉽게 써내려가고 있어, 전혀 대단치 않은 작품이다. 왜냐고, 이것은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말과 이야기들 아닌가? 딱히 신비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익숙한. 이것을 소설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들 놀란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나도 소설을 쓰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늘, 첫 시도가 중요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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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시작된 적이 없다


  유교의 영향일까. 우리는 ‘나이’에 관해 꽤 민감하다. 인생을 태어난 순서로 서열화하여 호칭을 만들고 예의를 강조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다. 덧붙여 인생을 돌아보는 순간들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깨닫는 순간은 당연하겠지만 자동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그렇게 스물, 서른, 마흔이라는 나이에 예민해지고 그에 관한 무수한 글이며 노래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거다. 아니, 반대로 이렇게 쏟아져 나오니까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건가?!

  세월의 축적만큼 인생에 대한 회한과 감수성 또한 축적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나이’에 대해 각인된 의미부여 때문이다. 이것을 부추긴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발달의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시기를 공자가 말한 나이에 대한 약칭과 더불어 어쩌면 사회가 강요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의 성과주의 문화도 영향이 있겠지만.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나이에 관해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로고 말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나이대에 도달할 때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강제적인 말들이 되어 버렸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왈칵하면서 우리는 어느 나이에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절망하고 지나간 세월에 아련해 한다. 다가올 세월에 대한 꿈꾸기나 희망은 약해지고 마는 감수성과 사회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시인이 「서른, 잔지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낸 것이 1990년대. 당시에 이 시집은 후일담 문학이나 여성시의 측면으로 부각되었던 기억이 나지만 어쨌든 나는 ‘서른’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시집을 선택했다. 거침없이 서른에 잔치가 끝났다고 말하는 시인의 언어, 그리고 끝내는 그것 무슨 상관이냐라던 시의 말. 시인은 후기에 이렇게 썼다.


  “진짜로 싸워본 자만이 좌절할 수 있고 절망을 얘기할 자격이 있고, 온몸으로 실천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고민한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시대의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다가오는 봄을 속절없이 맞아야만 하는 이도 있으리라. 내 시도 그런 대책없음에서 나온 게 아닌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아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 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오랜 시간이 지나 시인은 외국의 유력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의 이야기와 함께 기사에 실렸다. 근로장려금 신청자가 된 이야기를. 그것은 시인의 생애를 가난한 예술가로 보이게 했고 실제로도 이 나라 예술인들은 가난하고 이 나라 청년들도 가난하고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고 마는 이들이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 선운사에서 中

 

  짧은 잔치라도 벌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잔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무도 잔치맛을 보지 못했다. 짧은 잔치를 벌인 자들도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속에서 살고 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생의 격량으로 휩쓸리는 청춘의, 그런 시절의 서른들이 살고 있다.


마치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는 듯 완벽한 하나의 선으로 미끄러지는 새


그 새가 지나며 만든 부시게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포스트모던하게 미치고픈 오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식당 입구에 줄 없이 서 있었다

 -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 속초에서 中


  나의 일곱에는, 스물에는, 서른에는, 서른 둘에는 무엇을 배웠을까. 앞으로의 나날들에 나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시대의 언어가 나에게 가르치는 서글픈 청춘의 언어들 대신에 나는 나만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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