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시작된 적이 없다


  유교의 영향일까. 우리는 ‘나이’에 관해 꽤 민감하다. 인생을 태어난 순서로 서열화하여 호칭을 만들고 예의를 강조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다. 덧붙여 인생을 돌아보는 순간들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깨닫는 순간은 당연하겠지만 자동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그렇게 스물, 서른, 마흔이라는 나이에 예민해지고 그에 관한 무수한 글이며 노래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거다. 아니, 반대로 이렇게 쏟아져 나오니까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건가?!

  세월의 축적만큼 인생에 대한 회한과 감수성 또한 축적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나이’에 대해 각인된 의미부여 때문이다. 이것을 부추긴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발달의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시기를 공자가 말한 나이에 대한 약칭과 더불어 어쩌면 사회가 강요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의 성과주의 문화도 영향이 있겠지만.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나이에 관해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로고 말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나이대에 도달할 때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강제적인 말들이 되어 버렸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왈칵하면서 우리는 어느 나이에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절망하고 지나간 세월에 아련해 한다. 다가올 세월에 대한 꿈꾸기나 희망은 약해지고 마는 감수성과 사회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시인이 「서른, 잔지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낸 것이 1990년대. 당시에 이 시집은 후일담 문학이나 여성시의 측면으로 부각되었던 기억이 나지만 어쨌든 나는 ‘서른’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시집을 선택했다. 거침없이 서른에 잔치가 끝났다고 말하는 시인의 언어, 그리고 끝내는 그것 무슨 상관이냐라던 시의 말. 시인은 후기에 이렇게 썼다.


  “진짜로 싸워본 자만이 좌절할 수 있고 절망을 얘기할 자격이 있고, 온몸으로 실천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고민한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시대의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다가오는 봄을 속절없이 맞아야만 하는 이도 있으리라. 내 시도 그런 대책없음에서 나온 게 아닌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아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 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오랜 시간이 지나 시인은 외국의 유력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의 이야기와 함께 기사에 실렸다. 근로장려금 신청자가 된 이야기를. 그것은 시인의 생애를 가난한 예술가로 보이게 했고 실제로도 이 나라 예술인들은 가난하고 이 나라 청년들도 가난하고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고 마는 이들이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 선운사에서 中

 

  짧은 잔치라도 벌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잔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무도 잔치맛을 보지 못했다. 짧은 잔치를 벌인 자들도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속에서 살고 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생의 격량으로 휩쓸리는 청춘의, 그런 시절의 서른들이 살고 있다.


마치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는 듯 완벽한 하나의 선으로 미끄러지는 새


그 새가 지나며 만든 부시게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포스트모던하게 미치고픈 오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식당 입구에 줄 없이 서 있었다

 -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 속초에서 中


  나의 일곱에는, 스물에는, 서른에는, 서른 둘에는 무엇을 배웠을까. 앞으로의 나날들에 나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시대의 언어가 나에게 가르치는 서글픈 청춘의 언어들 대신에 나는 나만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